[스페셜1]
오승욱 감독의 60, 70년대 한국 액션영화 자습서 [3]
2004-02-13

제3장 근대화의 파도 위에서 표류하는 악당들

◎ 문제(논술형 문제) 다음 대사를 듣고 느낀 점을 서술하라.

장동휘: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은 하-이얀 까마귀와도 같은 삶이었다.

백로가 되고 싶어 온몸에 밀가루 칠을 한 하-이얀 까마귀…(허공을 응시하며 한숨)

그러나 그 까마귀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밀가루 칠이 벗겨질까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자! 우리 이제 맹세를 하자구나. 양과 같이 순한 삶을 살기로….

부하들: 형님! (일제히 고개를 떨구며) 흑흑흑….

(출제자. 얼짱 감독 류승완)

◎ 심화학습

군 복무를 위해 머나먼 변방, 동양의 휴전국가 대한민국의 공항에 첫발을 내디딘 미군들이 처음 받은 인상이 온통 똥냄새뿐이었다는, 논밭만 보여도 코를 감싸쥐었던 그 60년대. 경제개발 5개년계획. 조국 근대화!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 초가집도 고치고 마을 길도 넓히던 그때에 컴컴한 극장 안에서 깡패들도 개과천선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물론 독불장군처럼 지난날 깡패들의 영웅 김두한의 세계를 남근주의적인 극우사상으로 무장하고 그 자신이 협객이길 원했던 김효천 감독(<팔도 사나이>, 장동휘·박노식 주연, <실록 김두한>, 이대근, 서미경 주연)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고 파멸의 구렁텅이로 폭주하는 사나이들을 그린 당대 최고의 감독 이만희(<원점>, 신성일·문희 주연, <암살자>, 장동희 주연)가 있었지만, 그외 대부분 영화의 악당들은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그 앞에 나타난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려고 전쟁 고아, 또는 얼어죽어가던 거지 새끼였던 자신을 지금까지 키워준 조직을 배신하거나 떠나려고 한다. 그런 그들을 그냥 내버려둘 리 없다. 지난날 그들을 먹이고 입혀준 주먹과 죄악들은 결코 공짜가 아니어서 대가를 지불하고 떠나야 한다. 그들이 깡패라는 견장을 떼어버린 순간부터, 그들을 지켜주던 폭력과 그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던 악업이 고스란히 청구서를 들이민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의 삼층밥을 기꺼이 먹던 박노식은 김희라는 최무룡은 신성일은 눈내리는 명동에서, 광복동 거리에서 부둣가에서 한팔을 잘리거나 사랑하는 여인의 자살을 보거나, 총에 맞아 죽어가거나 피를 흘리며 비틀비틀 어디론가 떠나가버린다. 하지만 동시대 일본의 야쿠자영화들이 협에 대해 그것이 우익적인 결론일지라도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는 데 비해 우리의 명동 깡패들은 입으로만 의리를 말할 뿐 공허하다. 세상은 바뀌고 관객도 바뀌고 있는데 영화 속의 깡패들은 항상 제자리에서 낡은 의리만 되풀이한다. 결국 깡패들이 등장하던 한국 액션영화는 동어반복만 되풀이하고 어깨에 힘만 주다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밀가루 칠이 벗겨질까 두려워만 하다가….

제4장 60년대 말 70년대 초 무국적, 불량 액션영화들에 대한 감상적인 변호

먹을 것도 할 일도 없는 가난한 고향을 버리고 밤차를 타고 야반도주하여 도착한 서울역의 새벽.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남산에 올라가 걷혀가는 어둠을 보며 ‘서울아 내가 왔다! 앞으로 십년. 그래, 앞으로 십년 동안 내 물불 안 가리고 열심히 일해 서울! 널 내 걸로 만들겠다’던 가난한 소년소녀들은 청계천 방산시장에서 각성제를 먹어가며 밤을 새워 미싱을 돌리고, 하루종일 박하사탕을 포장하고, 그렇게 살았다. 그들에게 고생하는 이 시간들은 돈을 모아 성공하는 그날까지는 죽어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뭄에 콩나듯 잔업이 없는 어느 일요일 오후 유일한 오락거리인 극장을 찾았을 것이고, 그들을 위해 그들과 똑같이 일년에 몇편씩 공장에서 일하듯 영화를 찍어냈던 가난한 충무로 사람들의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액션영화들에는 지긋지긋하게 가난한 당대의 현실이 억지로 감춰져 있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위스키를 마시고 칵테일을 마시고,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양식만 먹는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깡패이면서 피아니스트이고 말도 안 되는 호화주택에서 살며, 팝송을 틀어놓고 고고춤을 춘다. 그래서 도대체 이게 어느 나라인지 알 수가 없는, 가난한 자들의 원망과 탄식이 만들어낸 이상한 모조공간이 만들어진다. 그 모조공간 속에서 주인공들은 사랑하고 싸우고 죽어간다. 특히 박노식 감독의 이상하게 불균질한 영화들을 보라. 도대체 저런 옷이 어디서 나왔는지 레이스가 달린 옷이며 소품들은 도대체 뭔지. 저 이상한 신체 훼손과(<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난데없는 저 이국정조(<쟉크를 채워라> <인간사표를 써라>. 박노식 감독의 이상하고 불균질한 영화를 보고 있자면 의욕에 불타는 장면전환에 순진하다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하다. 난 감독 박노식이 집착하는 장면전환 기법과 영화의 모티브들에서 결핍 때문에 만들어진 과대포장의 슬픈 허세를 본다)는 또 뭔가?

고달프게 일을 하는 그래서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잊고 싶었던 그 시대의 남성들. 하면 된다는 믿음 아래 강해지자! 울면 안 된다며 수돗물로 주린 배를 채워가며 돈을 모았던 그들은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남성 판타지의 세계에서 잠시나마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새 사람이 되기 위해 조직을 떠나 비굴한 성실함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박노식에게 감정이입하며 그들이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이다. 깡패영화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두용 감독의 태권도영화(<분노의 왼발>, 챠리 셸 주연)가 나와 구질구질하게 의리를 읊조리기보다 전광석화 같은 발차기로 의리를 가르쳐주는 그런 영화들이 자리를 차지하다 사라졌다. 그로부터 몇년 뒤 그 고단하던 남자들이 기반을 잡고 좀 살 만해지자 이번에는 서울로 올라왔던 수많은 처녀들의 시대가 도래한다. 청계 피복 공장에서, 구로공단에서 철야로 일하다 극장으로 가서 자신들의 신데렐라 되기를 꿈꾸며 성공한 신데렐라가 아니라 찢기고 훼손당한 신데렐라들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호스티스영화의 전성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 그런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결핍의 흔적들을 보고 킬킬거리는 그런 세상이 되었다.

글: 오승욱/영화감독·<킬리만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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