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마 선언의 마지막 목소리
- <당신의 손 안에> Forbrydelser
감독 아네트 K. 올레슨
출연 앤 엘레노라 요르겐센, 트리네 다이홀름
"우리는 삶의 매순간을 통제받고,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사회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삶이란 사람들의 손에 맡겨야만 하는 것이다." - 아네트 K. 올레슨
여성 교도소 사제로 막 부임한 안나는 죄수 중 한명인 케이트가 신비한 치유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안나는 그 소문을 믿지 않지만, 케이트가 “당신, 임신했군요”라고 말하던 날, 불임이던 자신이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이는 유전자 결함으로 인해 죽은 채 태어나게 될 운명. 안나는 흔들리는 믿음을 가지고 케이트를 찾아가지만, 불신이 믿음을 물리치면서, 고통과 비극이 찾아온다. 아네트 K. 올레슨은 덴마크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2002년 첫 번째 장편을 만들기 전까지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로 경력을 쌓아왔다. “가능하다면 다큐멘터리의 기운을 가진 극영화를 만들고 싶다. <당신의 손 안에> 역시 그렇게 찍었기 때문에 나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솔직한 감정을 담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 올레슨은 믿음과 구원이라는 난해한 주제를 두 여인의 만남 속에 녹여내 베를린영화제 경쟁작 중 처음으로 환호성을 받았다. 한편에선 희망이 부서져도, 세상의 또 다른 한편에선 희망을 놓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고 말하는 영화. 이제는 해체된 도그마 선언의 마지막 목소리이기도 하다.
9년 만의 재회 - <비포 선셋> Before Sunset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출연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나는 제시와 셀린느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다. 9년이 지나면서, 그들은 나이를 먹었고, 삶은 더 복잡해졌다. 그럼에도 제시와 셀린느는 계속 살아갈 것이다." - 리처드 링클레이터
<비포 선라이즈> 이후 9년이 흘렀다. 그 사이 제시는 작가가 되었고, <비포 선라이즈>의 기억을 담은 첫 번째 책을 홍보하기 위해 파리에 머무르고 있다.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은 파리에서의 마지막날, 9년 전처럼 금발을 하나로 묶은 셀린느가 제시 앞에 나타난다. <비포 선셋>은 <비포 선라이즈>의 속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영화일 것이다. 무엇보다 제시와 셀린느가 여섯달 뒤에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지켰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비포 선셋>은 제시와 에단 호크, 셀린느와 줄리 델피가 한 사람처럼 섞이면서 세월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어 정이 가는 영화이기도 하다. “로맨스를 냉소적으로 보게 됐다. 하지만 나의 로맨스는 좀더 현실적이 되었다”고 말하는 델피와 그동안 겪었던 연애를 푸념하는 셀린느가 겹치는 것처럼. 링클레이터와 그의 배우들은 <비포 선라이즈>를 찍을 무렵, 농담처럼 흘리기는 했어도, 날마다 속편을 만들어야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몇년 전부터 세 사람은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엄청난 대사를 눌러담은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15일 만에 가볍게 찍은 <비포 선셋>은 베를린영화제에서 쉴새없이 터져나오는 웃음과 박수로 환영받았다.
그녀에게 내일은 없었다 - <몬스터> Monster
감독 패티 젠킨스
출연 샤를리즈 테론, 크리스티나 리치
"나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같은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에일린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첫 번째 살인을 했지만, 두 번째부터는 아니었다. 그녀의 행동을 설명하기보다 그녀의 마음에 들어가고 싶었다." - 패티 젠킨
<몬스터>는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자” 에일린 워노스가 자유로웠던 마지막 날들을 기록한 영화다. 거리를 떠돌면서 몸을 팔던 에일린은 어느 술집에서 레즈비언 소녀 셀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 며칠 뒤 에일린은 자신을 강간하려던 남자를 살해하고, 절망을 품은 채 셀비와 달아난다. 그러나 살인을 멈추지 못하는 에일린은 자신을 도와주려던 남자와 형사를 포함해 모두 여섯명을 살해하게 된다. 이 영화로 데뷔한 감독 패티 젠킨스는 어린 시절 상처를 파헤치는 평범한 방식 대신 살인이 일어났던 1989년으로 곧장 돌진하는 길을 택했다. 에일린은 연인을 먹여살리기 위해 고속도로에 나가 살인을 하고 지갑을 턴다. 그러나 그 범죄는 너무도 직설적이고 단순해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살기 위해, 더이상 공중화장실에서 몸을 씻지 않기 위해, 셀비와 함께 있기 위해 저지른 일이므로.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인 샤를리즈 테론의 연기는 연출보다도 더욱 주목을 받았다. 테론은 몸무게를 30파운드 불리고 메이크업의 도움을 받았지만, 몸짓과 눈길과 억양은 스스로 터득한 것.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트로피가 매우 고됐을 그 시간을 보상해주었다.
이방인들의 후손, 그들이 사는 법 - <잊혀진 포옹> El Abrazo Partido
감독 다니엘 버만
출연 다니엘 엔들러, 아드리아나 아이젬버그
"이 영화의 배우들은 내게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다. <잊혀진 포옹>은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그런 일상과 지나는 행인 하나하나까지 모여 만들어진 영화다.' - 다니엘 버만
올해 베를린영화제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라틴아메리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대부분은 정치적이고 진지한 영화였지만, <잊혀진 포옹>은 다르다. 아르헨티나는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유독 유럽 이민이 많은 국가. 이제 서른을 넘긴 다니엘 버만은 유럽 이민 자손들의 정체성을 고민하면서도, 그 정체성을 농담의 재료로 삼아 수다스럽고 귀여운 영화를 만들었다. 아리엘은 아르헨티나 청년이지만, 홀로코스트를 피해 폴란드에서 탈출한 유대인 가문의 자손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는 갓난 아들을 두고 이스라엘을 위해 자원입대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단 한마디 설명도 없이. 아리엘은 의문을 풀기 위해 유럽으로 가려고 하지만, 또다시 한마디 설명도 없이, 아버지가 아르헨티나에 돌아온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는 어머니와의 그것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믿는 버만은 구경거리 많은 좁은 골목길을 돌아 화해의 지점에 도달한다. 젊은 기운이 넘치지만, 타고난 지혜로 마무리를 짓는 영화.
그 소녀들에게 희망을 - <마리아의 은총> Maria Full of Grace
감독 조슈아 마스턴
출연 카탈리나 산디노, 예니 파올로 베가
"이 영화는 자기 몸 안에 마약을 담아 운반하는 이들에 관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헤매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 조슈아 마스턴
조슈아 마스턴은 콜롬비아 이민사회 바로 곁에서 성장한 브루클린 출신 젊은이였다. 그는 뉴스에서나 보는 마약운반책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어떤 영화도 그들의 시선에 서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포도알보다도 커다란 캡슐을 수십개 삼키면서까지 새로운 인생을 찾으려 하는 콜롬비아 이민의 이야기를 자신의 첫 번째 영화로 선택했다. 열일곱 소녀 마리아는 상사와 다투고 공장을 그만둔다. 그녀는 하녀로 일하려고 보고타에 가지만, 수천달러를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뱃속에 마약을 넣고 미국에 가기로 결심한다. 서로 모르는 척하면서 비행기에 탄 일행은, 마리아의 친구 블랑카까지 모두 네명. 그중 한명은 캡슐이 터져 뉴저지 모텔에서 죽고, 마리아와 블랑카는 도망쳐나온다. <마리아의 은총>은 리얼리즘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이를 악무는 십대 소녀의 절박한 감정이 배어나오는 영화다. 마스턴은 콜롬비아 출신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하루 동안만 읽을 수 있게 했고, 그뒤에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직접 겪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사실적인 연기와 꼼꼼한 연출이 맞물린 이 영화는 베를린에 착륙하기 전에 이미 선댄스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는 은총을 입었다.
어느 만취한 밤의 악몽 - <빨간 불빛> Feux Rouges
감독 세드릭 칸
출연 장 피에르 다루생, 캐롤 부케
"사랑하는 누군가가 사라지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받게 된다. <빨간 불빛>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서스펜스를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매우 현실적이다." - 세드릭 칸
<빨간 불빛>은 메그레 경감 시리즈로 유명한 추리작가 조르주 시므농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중년남자 앙트완과 그 아내 엘렌은 여름캠프에 간 아이들을 데리러 보르도로 떠난다. 약속시간에 늦은 엘렌을 기다리면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한 앙트완은 운전을 하면서도 술을 마시고, 화가 난 엘렌은 혼자 기차를 타겠다는 메모만 남긴 채 사라진다. 앙트완은 밤새 기차를 뒤쫓지만 어느 곳에서도 엘렌을 찾을 수가 없다. 감독 세드릭 칸은 술에 취한 남자가 겪는 악몽 같은 하룻밤과 우연처럼 이루고 만 복수를 단순한 스릴러 이상의 영화로 만들어냈다. 앙트완의 사라진 기억 속엔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 걸까, 엘렌은 왜 병원에서 발견될 걸까. 이처럼 원작의 드라마는 그 자체만으로 흥미롭지만, 칸은 각색을 “작가의 등 뒤에 숨지 않고, 그가 말하고자 한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가는 일”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칸은 부모를 살해한 연쇄살인범의 여정을 따르는 영화 <로베르토 수코>로 주목받은 젊은 감독.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연약하고 불안한 남자를 집요하게 뒤쫓는 <빨간 불빛>은 관객마저도 그 떨리는 신경세포 안으로 포획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