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잡을 수 없는 느낌의 액션 누아르
돌이켜보면, 언제나 누아르였다. 그들의 웃음에는 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들은 살인을 하거나 살인의 욕망으로 뒤척이고 있었다. 억압의 고통이 감독에게까지 전이된 <장화, 홍련> 이후 김지운 감독이 누아르로 돌아간 것은, 누군가 <조용한 가족>을 코믹누아르라고 부른 것처럼 일종의 회귀본능 같은 것이 아닐까. 아직 가제조차 정하지 못한 김지운 감독의 신작은 <장화, 홍련> 이전의 영화들처럼 말도 많고, 사건도 많고, 인물도 많은 누아르다. 한 남자의 인도적인 선택이, 눈사태처럼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비극을 몰아오는 이야기. 빛과 어둠의 난무가 관건인 누아르에서, <장화, 홍련>의 서늘하고도 화사한 스타일이 어떻게 변태(變態)할 것인가. 1고가 막 나온 지금,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영화에 대해 물어보았다.
-어떤 이야기인가.
=주인공 S는 중급 호텔의 영업권을 가지고 있는 패밀리 안에서 넘버투쯤 되는 사람으로, 일은 칼 같이 처리하는 타입이다. 어느 날 그는 보스로부터, 자신의 출장기간 동안, 보스의 젊은 애인과 그녀의 새로운 남자를 감시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만일 현장을 목격하면 알아서 처치하거나, 직통 전화를 하라는 말과 함께. 마침내 S는 그 여자와 정부의 불미스러운 현장을 목격한다. 그런데 여태까지 한번도 그런 적이 없던 S가, 갑자기 직접 처치를 못하고 주저한다. 그러다가 보스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마지막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또 한번 망설인다. 혹시 이 둘이 앞으로 안 만나겠다고만 하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보스에게는 나쁜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되는, 모두가 다 해피한 상황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결국 S는 둘에게서 약속을 받고, 보스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는다. 보스는 출장에서 돌아오고,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S는 습격을 당한 채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뜬다. 그리고 “너 왜 그랬냐”고 보스가 묻는다. 영화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웃음) 굉장히 속도를 내서 빠른 전개를 할 예정이다. <장화, 홍련>보다 세배는 대사가 많고 다섯배는 빠르고 열배는 액션이 많은 영화가 될 것 같다.
-윤리적 선택 때문에 파멸해가는 이야기인가.
=모티브는 선택이지만 그외 여러 요소들이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에 대한 주인공의 분노, 진실을 알고 싶은 욕구, 걷잡을 수 없는 파멸 등. 결국은 집단 자체가 완전히 다 파멸된다. 무지막지한 대살육극이 처음에는 작은 모티브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잘 따라가도록 만드는 게 중요할 것 같다.
-현재 한국영화는 상당히 업그레이드된 폭력을 다루면서, 주인공은 윤리적 선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가 어떤 경향이다. 이 영화가 그러한 경향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미학이 끝나는 지점에서 도덕이 거론된다”라는 말이, 어린 시절의 나에게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나는 ‘윤리적 선택’의 대안은 ‘인상(印象)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한 인물의 선택은 결국, 한순간의 어떤 인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다. 윤리, 도덕을 앞서가는 방법은 가치를 무효화하는 것이다. 사실 윤리는 나한테 좀 잘 안 맞는다. (웃음)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영화에는 항상 메시지가 없다.
-장르는 액션누아르라고 들었다.
=원래 갱스터나 누아르를 좋아한다. 지난해 <조용한 가족>을 5년 만에 다시 보다가, 그 영화가 코믹누아르였다는 걸 깨달았다. 누아르가 가진 여러 요소들인 음모, 인간의 어두운 열정, 비정함, 파멸 등이 그 영화에 다 있다. 그래서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장르로 데뷔했음을 깨달았다. (웃음)
-누아르 중에서도 특별히 염두에 둔 모델이 있나.
=영화사적으로 누아르는, 40년대의 존 휴스턴이나 하워드 혹스의 고전누아르와 프랑스의 장 피에르 멜빌이나 자크 드레이가 만들었던 시적누아르가 있다. 이번 영화는 행동으로서의 액션이 많다는 점에서 고전누아르고, 인물이 심리적 강박관념을 가지고 파멸하는 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시적누아르다.
-최근의 한국 영화감독 중 유독 장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장르의 어떤 점에 매혹되었는가.
=멋있다는 점. (웃음) 장르가 사람들에게 계속 사랑받는 이유는, 장르의 어떤 점들이 사람들을 계속적으로 건드리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도 내가 장르에 기대하는 어떤 것들 때문이었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나 장르를 만드는 게 즐겁다. 보통 다른 감독들은 먼저 이야기를 결정하고 이후에 장르를 결정하는데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와 하고 싶은 장르가 일치한다. 장르에 대한 호기심도 많고, 좋아하지만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장르에,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들어가면 어떻게 부딪칠 것인지도 궁금하다. 좋은 장르영화, 특히 누아르영화는 장르적 즐거움과 함께, 자기 삶을 점검하면서 인생의 쓴맛을 생각하게 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삶의 의미를 반문하고 점검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내 목표다. 더이상은 할 수도 없고 할 마음도 없다.
-염두에 둔 배우는 있나.
=이병헌, 장동건, 정우성. (웃음) 멋있게 생긴 사람이 멋있는 배역을 맡아서 멋있게 연기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나면 멋있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코믹이나 유머는 없나.
=유머도 있다. 인물들은 심각하고 진지한데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의 아이러니가 있다.
-<장화, 홍련>에서 코믹을 배제한 것은 선택이었나.
=맨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만들 때는 장르적인 탄력성이 있는 스탠더드한 호러영화를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반대가 됐다. 아이들의 공포 혹은 아이들이 이렇게 된 이유를 생각하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깊어진 것 같다. 그러다보니까 염정아씨가 가지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유머들도 식당신을 제외하고는 많이 못 살렸다. 얼마 전에 봤던 영화 <아이덴티티>처럼, 퍼즐 같은 다중인격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왔던 건데. 그 아이디어를 쓰기에는 인물들이 너무 절절했다.
-<장화, 홍련>의 경우 아이러니를 만드는 거리감을 두기에는 감독이 인물들에게 너무 정서적으로 밀착했던 게 아닌가.
=송강호와 임수정, 문근영과의 차이였나. (웃음) 송강호 같은 배우는 작품 전체를 알고 그 안에서 판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아무리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경우에도 관객이 즐길 수 있는 거리감을 풍요롭게 전달한다. 반면, 두 소녀들은 내가 지시하는 세계를 살게 된다. 그러다보니까 정서적으로, 전에 했던 작업과 달라졌다.
-이번에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장화, 홍련> <메모리즈>가 호러에 대한 호기심이었다면 이번에는 액션누아르에 대한 호기심이다. 액션보다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해결 방식이 폭력밖에 없는 이 사람들에게 폭력은 과연 어떤 작용을 하는지, 그 상태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가능한 것인지, 극한으로 치달은 인물들이 파멸되기 직전에 무엇을 느끼는지를 전달하고 싶다
-영화제목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모두 다 그녀를 좋아한다’였는데, 1고를 쓰고 나서 보니까 ‘모두 다 그녀를 좋아했을까?’가 되어야 할 듯해서(웃음) 다시 정해야 될 것 같다. 고민 중이다.
-가제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나.
=<말타의 매>에서 말타의 매는 맥거핀이다. 그걸 통해서 인물의 욕망이 분출되고, 어리석고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 가제에서 여자는 말타의 매와 같다.
-가장 어두운 영화가 될 것 같다.
=‘어둡다’라기보다는 ‘걷잡을 수 없다’는 느낌에 가깝다. 더불어 걷잡을 수 없이 되어가는 인물을 쫓아가는 것은 상당히 서늘하고, 폭력적이고, 무겁지만, 전개는 경쾌하고 스피디하게 갈 예정이다.
-언제쯤 들어갈 계획인가.
=여름에 들어간다는 건 확실하다. 개봉은 아직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