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갈라지고, 다리가 무너진…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을 올해 보게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준비작업부터 후반작업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겨울엔 영화아카데미 졸업생들이 모여 만든 옴니버스영화 <이공>에 들어갈 단편영화 한편(<씽크 앤드 라이즈>)을 찍었고, 올해 전주영화제에 삼인삼색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디지털영화(<모자이크 다큐멘터리: 인간 조혁래)도 한편 찍을 예정이다. <살인의 추억> 일본 개봉 때문에 일본 방문 일정도 잡혀 있고 최근엔 뉴질랜드의 웨타 스튜디오(<반지의 제왕> 삼부작을 만든 곳)에 가서 신작에 들어갈 특수효과에 관해 논의했다. 봉준호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골룸처럼 정신분열에 걸릴 상황”인 셈이다. 어쨌든 무엇보다 궁금한 건 세 번째 장편영화다. 영화사에서 정한 가제가 <더 리버>라는 이 영화는 도시재난영화라는 사실 말고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구체적인 내용을 들을 수 없었지만 “뉴질랜드에서 CG 작업을 한다”는 사실과 “맨 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쓰고 있다”는 말로 미루어 짐작하면 전작과 톤이 다른 상상에 기반한 영화일 것으로 보인다.
-신작은 도시재난영화라고만 알려져 있다. 어떤 영화인지 좀더 설명해 달라.
=도시재난영화인데 한강에서 벌어지는 얘기다. 전에 인터뷰할 때는 한강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얘기도 안 하고 서울에서 재난이 일어난다고 했더니 기자분이 강북이요 강남이요, 묻더라. 그게 참, 그 경계라서. (웃음) 한강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 이상은 미안하지만 비밀이다. 각계의 지시가 있어서 올해 여름까지, 특수효과에 대한 확신이 들 때까지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계기로 떠올린 이야기인가.
=중고등학교 때 내 방이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였다. 잠실대교가 보이는 아파트였는데 밑층에서 여고생이 뛰어내려서 자살한 일도 있었다. 한강을 보면서 떠올린 얘기다. 만날 한강 위를 지나다니면서 상상이 차츰 구체화됐다. 한강이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굉장히 스펙터클하다. 그동안 한강 주위에서 수백장 사진을 찍고 작업했었는데 잊혀진 스펙터클을 볼 수 있을 거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잘 모르던 한강을 보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건가.
=TV 보면 한강 둔치는 연인만 존재하는 아주 재미없는 공간으로 쓰이는데 제대로 앵글을 들이대면 구조물이나 교각이 굉장히 신기하다. 얼마 전 뉴질랜드 특수효과 스튜디오 웨타에 다녀왔는데 그쪽 특수효과팀도 굉장히 놀라더라. 이게 어디서 찍은 거냐며. 컴퓨터그래픽한 거냐, 물어보기에 아니 이거 실사다, 그랬더니 엄청 놀라더라. 도시 한복판에 이렇게 큰 폭의 강이 있고 시멘트 구조물이 터널처럼 소실점이 보이는 이미지로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한 거다. 영국의 템스강이나 파리의 센강은 훨씬 작잖나. 우리로 치면 중랑천 수준이다. 게다가 전두환 정권 때 밀어붙여서 시멘트로 둔치를 만들었다. 그것도 흥미롭고.
-한강에서 무언가를 봤다고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대립구도를 연상해도 되나.
=아니다. 먼저 발견한 사람이 얘기하면 아무도 안 믿어주고, 난 그런 시추에이션이 싫다. 그래서 곧바로 점프해서 난장판이 벌어진다. 재앙이 이미 닥치는 상황으로 간다. 9·11 때 비행기가 무역센터를 들이받는 장면을 생중계로 보지 않았나. 특히 두 번째 비행기는 생중계 상황에서 들이받았기 때문에 나도 봤다. 굉장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인데 모두 목격한 거잖나. 누구는 보고 누구는 못 본 게 아니라. 모두가 목격한 가운데 너무나 엄청난 상황이 터진다. 거의 수습할 여유를 안 주는 그런 느낌이 영화의 초반부가 될 거 같다.
-그래도 지금까지 영화를 보면 늘 한국사회에 대해 뭔가 말하고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무도 그런 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얘기 안 하려고. 섣불리 할 바엔 하지 마라. 한국사회를 잘 모르겠고 엽기적이고 항상 궁금증을 갖고 있다. 얼마 전에 이 영화와 관련없이 박완서 소설을 봤다. 한국전쟁 때 얘기를 쓴 소설인데 박완서씨가 6·25 때 꽃피는 시절이었더라. 책을 읽고 나니까 그 세대에 대해 조금 이해가 되더라.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세대가 아니구나. 어릴 때 기성세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X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어떻게 TV에 나와서 저런 얘기를 할까. 그런데 불쌍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한국사회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번 영화는 그런 거랑 별로 상관없고(웃음) 순수 오락의 결정판이라고만 써달라.
-만화적인 느낌이 강한 영화를 연상해도 되나.
=SF나 만화적 느낌은 없을 거다. 아까 말한 재앙의 핵심이 초자연적인 것이긴 하지만 시간적 배경이 현재이고 장소도 한강이며 인물도 사실적인 서민이 나오고. 대재난이 일어난다는 딱 한 가지 전제만 생경하고 다른 건 일상적인 영화다. M. 나이트 샤말란의 <싸인>이 예가 될 수 있다. 가족들이 미국 시골 옥수수밭 마을의 아주 일상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데 그곳에 외계인이 나온다. 아주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런 느낌이다.
-주인공은 어떤 사람들인가.
=한강에서 매점을 하는 서민 주인공들이다. 내 취향이 이런 영화에서 군대나 경찰이 설치는 게 싫다. 스토리상 그런 게 안 나오게 돼 있다. 서민 주인공이 이 재난에 맞서 싸운다. 한강에서 매점을 하는 주인 부자와 패밀리가 나오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핵심이다.
-어떤 드라마가 주축이 되나.
=강렬한 드라마다. (웃음) 지금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중이라 더이상 말하긴 어렵다. 서민들의 강한 투쟁드라마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국가는 도와주지 않고. 늘 그랬듯이.
-특수효과는 뉴질랜드 웨타 스튜디오에서 해결하는 건가.
=국내 업체는 인사이트비주얼과 얘기 중인데 웨타랑 같이 하려고 생각한다. 이번에 뉴질랜드에서 <반지의 제왕> 부록에서 많이 보던 얼굴들을 만났다. 한국에선 아직 해본 적이 없는 영역이라 웨타와 접촉해보는 거다. 기본적인 로케이션이랑 컨셉을 디자인한 게 있는데 그쪽에서 좋아하더라. 나중에 스케줄 조정만 잘하면 별 문제는 없을 거 같다. CG를 국내 업체와 조인트해 작업할 가능성이 많다.
-염두에 두고 있는 배우들은 있나.
=아버지 역엔 변희봉 선생이 확정이다. 다른 캐스팅은 이런저런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되는 거니까 아직 뭐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
-<이공>에 들어간 단편 <씽크 앤드 라이즈>를 보면 원신 원테이크로 찍었던데 원신 원테이크에 특별한 애착이 있나보다.
=어떤 거창한 미학적 슬로건이 있어서가 아니다. 6분짜리 단편인데 내용을 요약하면 ‘내기’다. 과연 계란이 물에 뜨냐, 안 뜨냐. 이런 내용이면 원신 원테이크로 찍어야 될 거 같았다. 마술쇼를 TV에서 보여줄 때 커트를 안 하고 보여주는 거랑 비슷하다. 커트를 하면 거짓말로 보이니까. <살인의 추억>에서 여경보 기사와 호흡을 맞춰봤는데 이번에도 스테디캠으로 원신 원테이크를 찍으니까 좋아하더라. 스테디캠 다룬 지 10년 됐는데 6분짜리 롱테이크는 처음 해본다, 좋다, 그러면서 셰퍼드처럼 숨을 헥헥 헐떡이시더라구. (웃음) 본인도 도전하는 걸 좋아해서. 아역에서 변희봉 선생까지 노련하게 해서 아침 7시30분 집합해서 오후 3시에 촬영을 다 끝냈다.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을 보면 늘 추적시퀀스가 등장한다.
=쫓고 쫓기는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있다.
-<톰과 제리>를 좋아했나? (웃음)
=<톰과 제리>는 프레드 큄비가 제작한 버전을 좋아했다. 예전에 TV에서 할리우드 영화클립을 모아서 고 정영일 선생이 해설하는 걸 봤는데 오늘은 ‘쫓는 자와 쫓기는 자’를 주제로 보여준다면서 추적장면만 편집해서 해설했다. 아주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추격신, 특히 쫓기는 입장이 되는 걸 좋아한다. (웃음)
-이번 영화도 코믹한 요소가 많은가.
=그건 나의 본능인 거 같다. 유머나 이상하게 웃기는 건 저절로 나오는 거라서. <살인의 추억>도 코믹요소를 배치한다는 계산으로 그런 게 아니고 저절로 그렇게 된 거다. 유머가 없는 영화는 평생 못 찍을 거 같다. 공포영화를 누가 하라고 해도 하다보면 웃길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