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식 감독, 전도연, 박해일 주연의 <인어공주>가 필리핀 세부에서 마지막 촬영을 했다. 딸이 우연한 계기로 젊은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목격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국내 촬영을 마쳤고 지난 3월6일부터 11일까지 필리핀에서 수중촬영 장면을 찍었다. 제작진과 동행해 취재한 <인어공주> 수중촬영 현장의 이모저모를 들여다보자.
“짐 이리 줘. 밑에 놓을게.” 지난 3월6일 필리핀 세부행 비행기, 뒷자리에 앉아 있는 전도연씨가 필름통을 받아든다. 앞뒤 좌석 간격이 좁기로 악명 높은 필리핀항공 이코노미 좌석에 앉아 있는 그는 마치 프로듀서 같다. 비즈니스 좌석이 아닌 걸 불평하기는커녕 스탭들이 책임질 필름통까지 나서서 챙긴다. 전도연 같은 스타가 스탭과 똑같은 대접을 감수하다니, 내심 놀래 뒤돌아봤지만 그의 행동이 가식처럼 보이진 않는다. 웬만한 배우면 지방촬영 때 묵을 호텔의 수준까지 미리 출연계약서에 못박고 들어가는 요즘 관행을 무시하는 전도연씨의 이런 태도가 스탭에게 어떤 신뢰를 주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나중에 “<인어공주> 촬영일정이 너무 늘어져서 전도연씨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다는 소문이 있던데”라고 떠보자 동행한 <인어공주> 투자사 유니코리아의 투자사업부 팀장 박덕배씨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너무 잘해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고 답했다.
태풍으로 페허된 제주바다를 대신해
“우리 영화, 아주 헝그리해요.” 옆자리에 앉은 박흥식 감독은 대뜸 이렇게 말한다. 평균 제작비가 30억원을 웃도는 요즘 전도연, 박해일 같은 스타급 배우를 쓰고도 제작예산이 25억원인 영화였다는 게 ‘헝그리’의 요지다. 아마 소문난 필리핀의 휴양지 세부까지 촬영을 가면서 ‘헝그리’라는 표현은 안 어울린다 여기겠지만 사정을 들어보면 이해가 간다. 당초 <인어공주>는 지난해 10월에서 12월까지 세달간 촬영을 마칠 계획이었다. 11회 서울 촬영을 마치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제주도 아래 작은 섬 우도에서 나머지 촬영을 진행했는데 섬의 기후 때문에 곤혹을 치렀다. 태풍 매미는 결정적이었다. 태풍이 치는 동안 영화를 찍은 건 아니었지만 매미가 휩쓸고간 뒤 우도의 풍광은 전과 달랐다. 무너진 돌담은 다시 쌓으면 되는 것이지만 바다 물속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제작진은 우도에서 3일간 수중촬영을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태풍으로 혼탁해진 탓에 물속 장면의 선명도가 확연히 떨어져 도저히 영화에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해양생태 전문가들은 1년이 지나야 다시 맑아질 것이라는 속편한 예언을 했다. 섬의 날씨변화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해가 쨍쨍해서 촬영 준비를 서두르고나면 갑자기 비가 내리고 비가 내려 철수하려고 들면 해가 드는 식이었다. 원래 일정대로 찍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다보니 배우들은 눈보라가 치는 바다에도 뛰어들어야 했다. 한번은 우도로 간 제작진으로부터 촬영이 연기됐다는 소식만 들려오자 제작사 나우필름 대표 이준동씨가 직접 섬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는 풍랑이 거세지는 바람에 3일간 섬을 떠나지 못했다. 아무튼 기후의 악조건 때문에 65회 예정된 촬영은 80회를 넘어섰고 제작비는 2억원이 초과됐다. 가능하다면 한겨울의 바다에도 뛰어들 용의가 있는 배우와 스탭이 있었지만 수중촬영만은 불가능했기에 마침내 필리핀행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이다.
심상치 않은 출발, 고두심 병원 긴급 우송
다행히 고두심씨의 건강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제작일정은 처음부터 꼬이고 말았다. 감독은 고두심씨 없이 장면 연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에 진퇴양난에 빠졌다. 고두심씨에게 다시 물에 들어가자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 장면을 포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두심씨는 <꽃보다 아름다워> 촬영 때문에 다음날 서울로 돌아가는 일정으로 이곳에 왔던 것이다. 결국 박흥식 감독은 고두심씨 촬영분을 서울에 가서 다시 찍기로 하고 일단 첫날은 적응훈련에 투자하자고 결정했다. 고두심씨가 몸에 이상을 일으킨 것도 수심 5m가 넘는 낯선 바다에 대한 두려움이 결정적이었던 걸로 보였다. 오후 3시부터 전도연씨와 박해일씨는 해녀와 우체부 복장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안전요원인 스킨스쿠버 3명과 수중촬영 기사 박상훈씨가 배우들의 물속 움직임을 보살폈고 일조조건, 탁도 등 여러 가지 수중조건을 점검했다. 박상훈씨는 수중촬영의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수중촬영은 노출과 포커스를 맞추는 게 특히 어렵다. 기본적으로 물이 맑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데다 물속에서 촬영을 하면 카메라를 고정시키는 것도 어렵다. 한컷 찍는 데 1시간 이상 걸리는 건 기본이다.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하루 10컷 넘게 찍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그러므로 수중촬영기사는 필름, 스킨스쿠버, 바다에 대해 완벽히 알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