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경 감독님을 만났고 10월부터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재미있게 봤기 때문에 처음부터 호감이 있었다. 시나리오를 보니까 나만 잘하면 되겠구나 싶더라. 전도연씨랑 일한다는 것도 중요했다. <질투는 나의 힘> 할 때 배종옥씨 같은 면이 있다. 만나자마자 편해졌고 마음이 통했다.
-배역 비중으로 보면 전도연씨에 비해 상당히 떨어진다. 그 점이 꺼려지지 않았나.
=처음부터 전도연씨 영화라는 걸 인정하고 들어갔다. 감독과 같이 일할 배우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 구애받진 않았다. 해녀라는 소재가 참 독특했다. 워낙 외국영화랑 비슷한 한국영화가 많은데 해녀를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뭔가 따라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전도연씨에 비해 비중이 적긴 하지만 <살인의 추억>과는 개념이 다른 거 같다. 나만의 영역이 있어서 좋았다. 내 입장에선 홀로서기 개념이 당장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본다. 앞서 가고 있는 선배들 뒷모습을 보면서 내가 몰랐던 걸 알게 되는 과정도 좋다. 그런 계기가 충분했으면 좋겠다. 물론 어느 순간이 되면 같이 못하는 순간이 생기긴 할 거다. 누구누구는 피하는 식의 개념도 있을 수 있고 계산이 들어갈 수도 있고. 아무튼 캐스팅됐을 때 주위 반응이 잘 어울린다는 쪽이었다.
-영화의 색채로 보면 <질투는 나의 힘>이나 <살인의 추억>쪽이 아니라 <국화꽃향기>를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국화꽃향기>에서 박해일 연기를 보면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 정통 멜로인데 장르적 테크닉에 익숙하지 못한 연기라는 느낌이었다.
=<국화꽃향기>는 최루성 멜로로서 앞으로는 더이상 나올 수 없는 장르가 아닐까 생각했다. 감정이 깊이 들어가는 연기인데 쿨한 것과 달라서 느낀 바가 많았던 작품이다. 숙제도 많이 남긴 영화였고. 영화 초반에 고민을 많이 했다. 상상력을 동원했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고. 왜 그런 거 있잖나. 한국하고 일본하고 축구 시합을 했는데 열심히 했지만 1:0으로 진 거, 그런 거 같다. 좋게 보면 다음번엔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본 셈이다.
-<인어공주>의 진국이라는 인물은 어떤 사람인가.
=이름 그대로 “아, 그 사람, 진국이야” 할 때 진국이다. 자기 것만 잘하고 그런 사람을 진국이라고 그러진 않는다. 늘 주위 사람을 돌보고 그래서 스스로는 퇴화해가는 사람이다. 전혀 악의가 없는 친구다. 직접적으로는 감독님이 진국 같다. 연기할 때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궁금할 때는 감독님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본다. 비슷하게 따라하면 “OK”가 나는 경우가 많다. (웃음) <질투는 나의 힘> 때도 그랬는데 감독과 극중 캐릭터가 비슷한 경우가 상당히 있다.
-극중 진국은 아주 밝고 따뜻한 캐릭터인데 박해일 이미지에는 소년 같은 얼굴 뒤에 도사린 어둠이 있다. 숙취 때문인가. (웃음)
=초등학생 때 집이 목동 근처였는데 집에서 소, 돼지, 개를 키운 적이 있다. 아버지가 건축업을 하다 잘 안 돼서 가축을 키웠는데 어느 날 기르던 가축이 한꺼번에 몰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여름에 더위를 먹어서 그런 거다. 그 무렵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다닐 때 성가대에서 드럼이랑 베이스를 치고 그랬다. 고등학생 때는 같은 반에 음악 좋아하는 친구랑 어울리다가 밴드를 만들었고 대학 가서도 음악을 했다. 데모테이프도 만들고 그랬는데 우연히 아르바이트로 하게 된 아동극에서 배우로 첫발을 디뎠다. 그러면서 음악은 취미로 계속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무렵 부모님 말씀 따르거나 여기서 끝장을 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끝장을 보자고 뛰어든 게 연극이었나.
=연극 <청춘예찬>이었다. 정말 힘들었던 시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임순례, 박찬옥, 봉준호 등 세 감독이 모두 그 연극을 봤으니까.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영화라기보다 연극 혹은 노래하는 느낌으로 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밴드를 했던 내 얘기니까.
-그동안 출연 제안이 꽤 있었는데 TV드라마는 거의 안 했다.
=최근에 MBC에서 <한뼘드라마>를 찍었다. 단편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단편영화랑 비슷한 거라서 하게 됐다. TV드라마를 별로 안 한 건 하나라도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TV는 제작시스템이 워낙 빠르다는데 나처럼 느린 사람이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겁먹는 점도 있다.
-지난해 <살인의 추억>과 <질투는 나의 힘>으로 갑자기 스타덤에 올랐다. CF도 2편 찍고. 갑작스런 스타덤에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무덤덤한 게 약인 거 같다. 정작 바빴던 건 <국화꽃향기>와 <질투는 나의 힘>이 연달아 개봉하던 시기였다. 지금은 오히려 부담이 덜하다. 밀도있게 작업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생겼다.
-배우로서 다음에 넘어야 할 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뭘 넘어야 될지 모르겠다. 뭘 넘겠다고 생각하고 가면 너무 오버가 되기도 하고.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아서도 곤란한 것 같다. 조금씩 해나갈 뿐이다.
-박흥식 감독에게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한다는 말을 들었다.
=감독님 말 믿지 마라. (웃음) 진국이 연순과 사귀는 대목에서 너무 선수같이 보이면 얘기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찍은 거 보시고 감독님이 그러더라. “넌 아무리 해도 선수처럼은 안 보인다”고. (웃음)
-<인어공주>는 해피엔딩의 영화인가, 비극적 톤의 영화인가?
=부모에게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영화는 세월이 흘러 망가진 부모의 모습도 보여준다. 판타지지만 리얼한 영화,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비극이나 해피엔딩이 아니라 부모님 젊은 시절이 어땠는지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 그 정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