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덕스런 날씨와 수심 5m가 넘는 낯선 바다에 대한 두려움
3월9일,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바다는 화가 난 듯 보였고 취재진은 다시 촬영팀의 연락을 기다려야 했다. 상당히 많이 내리던 비가 오전 10시를 넘자 그쳤다. 오후에 바다로 나가자 밧줄에 묶인 네척의 배가 해안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나란히 서 있었다. 드디어 진짜 촬영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도착하자 대번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해녀복 입은 필리핀 여성들의 아우성?
해녀복을 입은 30여명의 필리핀 여자들이 배에 매달려 알 수 없는 말로 떠들어대고 있는 게 아닌가. 사실 이날 촬영은 수십명의 해녀가 잠수하는 광경을 물 밑에서 잡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엑스트라를 데려올 수 없는 상황이라 필리핀 여인들에게 해녀복을 입혀 촬영을 하려던 찰나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필리핀 여인 중 몇명이 구명조끼를 달라고 하더니 모두가 구명조끼를 입고 배에 매달린다. 현장은 일순 공포에 휩싸였다. 그렇다. 수영을 잘하는 필리핀 여자들을 섭외해달라고 했건만 여기 모인 필리핀인들은 수영을 못하는 것이었다. 해외촬영을 하면 의사소통이 안 되어서 누구나 한번씩 이런 일을 겪는다지만 이번엔 좀 심했다. 박흥식 감독은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이다. 스쿠버팀이 아무리 이리로 와보라고 해도 수영을 잘 못하는 필리핀인들은 요지부동 구명조끼를 입고 물에 떠 있기만 한다. “야, 다들 나오라 그래.” 기가 막혀 멍하니 바라만 보던 감독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이 장면을 포기하고 수영을 잘하는 10여명만 데리고 내일 찍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우왕좌왕하던 필리핀 여인들은 배에 올랐고 현장을 떠났다. 바다는 이내 조용해졌고 전도연씨와 다른 해녀 2명이 등장하는 장면을 찍어갔다. 괜히 수십명을 동원하느라 아까운 돈과 시간만 낭비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 해가 지기 전까지 남은 시간이라도 잘 써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3월10일까지 촬영을 마칠 예정이던 제작진은 일정을 하루 늘리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4박5일간 수중촬영을 모두 끝낸다고 생각한 게 무리일지 모른다. 이날 촬영은 저녁 6시까지 계속됐다. 필리핀 기상청 발표에 따르면 오후 4시부터 풍랑이 거세져 촬영팀은 그 전에 철수해야 한다고 했지만 기상청 발표는 틀렸다. 오후 4시를 넘어서자 바다는 훨씬 고요해졌다.
:: <인어공주> 수중촬영 전문 박상훈(35) 촬영기사
수중촬영 전문 스튜디오 필요합니다
-어떻게 수중촬영 전문 촬영기사가 됐나.=4∼5년 전에 촬영기사 데뷔를 하자마자 부산예대 영화영상과 교수를 하게 됐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데다 물을 좋아했고 연구할 여유가 생기니까 뭔가 전문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싶었다. 해양도시라는 부산의 이미지와 맞는 것 같아 수중촬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현재는 스쿠버 다이빙팀과 촬영팀이 혼재된 아쿠아리스라는 회사에서 작업하고 있다. 국내에서 필름으로 수중촬영을 하는 팀이 4군데 있는데 우리는 수중촬영에서 배우 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편이다. 스쿠버팀을 따로 두고 있는 이유도 배우들에게 스쿠버 다이빙을 가르쳐야만 제대로 된 화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들에서 수중촬영을 했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플라스틱 트리> <아홉살 인생> <오! 해피데이> <페이스> 등이다. CF로는 “당신이 버린 생활하수, 당신이 마십니다”라는 카피를 썼던 수자원공사 CF를 많은 사람이 기억하더라.
-국내 수중촬영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수중촬영 전문 스튜디오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전문 스튜디오만 있으면 <인어공주>도 지금처럼 고생하지 않고 찍을 수 있을 거다. 2년 전에 LA에 갔다가 멕시코 국경 근처에 있는 폭스 바하 스튜디오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아무런 사전약속 없이 <타이타닉>을 찍은 장소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차를 몰고 6시간 달렸다. 스튜디오 경비가 희한한 놈이다, 라는 눈으로 보는데 한국에서 온 수중촬영기사라고 소개하고 이곳을 보는 게 내 꿈이라고 사정해서 안에 들어가봤다. 마침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를 찍고 있었는데 스튜디오가 어떻게 생겼나, 꼼꼼히 관찰하고 사진도 찍었다. 돌아와서 남도영상위원회와 부산영상위원회에 수중촬영 전문 스튜디오를 만들자고 건의했고 지금 논의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