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아는 여자> 만들기 - 사랑을 묻는 감독, 사랑을 아는 배우
2004-06-22
글 : 장진 (영화감독)

영화 <아는 여자>는 사랑에 관한 영화다. 작가 겸 감독인 장진과 주연배우인 이나영과 정재영은 작품의 해석을 위해 촬영 전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장진 -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정재영 - 헤헤 왜 이래… 술 먹었어요?
이나영 - 감독님 술 잘하세요? 근데 우린 왜 회식 같은 걸 안 해요?
정재영- 장진 감독님 술 잘 못해… 두잔 먹고 뻗어.
장진 - 십년 동안 한 남자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여자는…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랑을 하는데 말이야… 자신의 사랑에 대해 어떤… 희망을…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나영 - 우리 밥 안 먹어요?
정재영 - 시켜먹자 그냥….
이나영 - 난 짬뽕… 오빠 짜장 시켜요… 갈라먹게….
장진 - 살면서 어느 순간엔가 누군가에게 ‘아, 이게 바로 사랑이구나’라는 확신을 느낀다면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그 사랑을 잡을 수 있을까?
정재영 - 헤헤, 왜 그래 자꾸? … 나 결혼했어….
이나영 - 오빠 애가 몇살이랬죠?
정재영 - 네, 네살이던가? …가만, 전화해서 물어봐야겠다.
장진 - 영화 속에서 사랑은 이런 게 아닐까라고 관객에게 들려주었을 때 관객이 그 사랑에 공감을 한다면 그게 과연 성공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나영 - 에?… 다시요… 잘 못 들었어요….
정재영 - (전화끊으며) 우리 아들 네살 맞대.
이나영 - 우리 강아지는 열두살인데….

현명한 우리 두 배우들은 내게 사랑이란 것은 어떤 말이나 작위적인 문구로 설명할 수 없거니와 정의 내리려는 것 자체가 우매한 짓임을 가르쳐주었다. 그 이후에 <아는 여자>는 사랑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독특한 두 남녀의 유쾌한 로맨틱코미디라는 분명함이 생겼다.

몰랐던 이나영 제대로 알기

“리허설이 중요하다. 난 그렇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고 현장에 나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고 답답하고… 아무 대안이 없다. 적어도 한 장면당 다섯번 이상은 연습을 해야 한다. 그 연습을 통해서 배우의 다양한 캐릭터 창출력도 볼 수 있고 표현의 한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 배우가 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연출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그렇게 얘기했건만 우리의 여주인공 이나영은 아직도 그 리허설이 몸에 익숙하지 않은 듯이 낯설어 하더니만 결국 촬영에 들어가자 리허설 때와는 전혀 다른 자신의 순간적인 느낌을 카메라 앞에서 선보였다.

여기서 돌발 퀴즈, ‘이나영이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에서 리허설 때는 해보지도 않았던 충동적인 느낌을 연기했다. 순간, 가장 당황한 사람은 누구일까? 순서대로 나열하시오’.

1. 그녀의 스타일을 가장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이나영 매니저.

2. 그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정밀하게 보고 있던 촬영감독.

3. 바로 앞에서 그녀의 연기에 반응해야 할 정재영.

4. 지금 이 순간 오케이(OK)냐 엔지(NG)냐를 외쳐야 할 감독.

정답은…

맞다. 머릿속에 생각하고 계신 순서가….

영화 <아는 여자>에서 이나영은 두번 운다. 한데 이 두번 모두가 리허설 때 약속되어지지 않았던 배우의 현장 느낌이었다. 리허설 때, 영화에선 단 한번도 여주인공이 울지 않았고 울 필요가 없다고 우린 생각했다. 촬영이 들어가고 우린 그녀의 연기에 바라보는 시선으로 몰입해 있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데… 그 순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녀가 내가 쓴 문구를 작가인 나조차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느낌으로 보여주었을 때 나의 상상력은 깨지고 내 머릿속에 자리잡은 낡은 관습은 무참히 짓밟혔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또 다른 기쁨을 만나게 해주었다. 이제 적어도 난 리허설은 믿지 않는다. 연기에 있어서 계산되어진 약속이 중요할 순 있을지 모르지만 연기는 계산 따위로 이루어지는 약속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가르쳐주었다. 똑바로 오는 배우는 다시 똑바로 갈 것이라는 안도는 있을지 모르지만 흔들리며 오는 배우는 어느 길로 나아갈지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있다는 것을 그녀가 보여주었다.

알았던 정재영, 진짜로 알기

내가 정재영을 본 것은 1989년이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시절… 무대에 오른 모습을 본 것이 처음이었으니 15년이 되었나보다. 그리고 우린 연극과 영화를 포함해 열대여섯편의 작품을 함께했다. 서로 알 만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만나는 시간엔 언제나 작은 설렘이 자리하게 된다. 그리고 이번 <아는 여자>에서 정재영은 그 설렘의 기대에 보란 듯이 다가왔다. 그것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소시민적인 심약함과 시한부 인생의 안타까운 절망감을 연기해냈다. 그리고 어찌보면 한없이 통속적인 남자 캐릭터는 정재영이란 배우의 성격 구축력과 그만의 호흡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쉴새없이 웃게 만드는 그만의 유쾌한 역할이 되어버린다. 그의 코미디는 옥타브가 없다. 나의 짐작이 여지없이 깨지듯이 관객의 예상도 그는 훌쩍 뛰어넘는다. 여기에서 내가 굳이 연기라고 말하지 않고 코미디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관심을 두고 봐달라는 얘기다. 정재영의 코미디는 절실함과 품위에서 출발한다. 그는 모두가 공감하는 진실 위에서의 절실함이 어떤 좋은 웃음을 만들어내는지 알고 있는 배우이고 코미디의 진경은 (장르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훌륭한 품위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배우이다. … 그 몇이 몇명이나 되냐? 라고 누군가 또 물어본다면… 음… (생각해보니 꽤 많다) 여하튼 이 글은 일단 배우를 칭찬하는 성격으로 쓰고 있으니 더이상 난감하게 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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