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스파이더 맨>은 코믹북의 영화 버전은 이런 것이다, 라는 모범 답안을 내놓았다. 샘 레이미와 그의 스탭들은 원작의 본령을 놓지 않으면서도, 과감하고 창의적인 시도들로 스파이더 맨과 그의 악당과 연인에게 3차원의 무대와 그만큼 입체적이고 활력적인 삶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무대는 똑같이 뉴욕이지만, 적수는 더 막강해졌고, 사랑과 우정엔 바람 잘 날이 없다. 전작의 성취를 넘어 그들은 무엇을 또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전세계에서 8억2천만달러라는 경이적인 흥행을 기록한 <스파이더 맨> 팀은 속편 제작에 전편의 2배에 달하는 2억1천만달러의 예산을 받아들었다. 토비 맥과이어의 허리 부상으로 주연배우 교체 위기를 겪었던 것을 제외하면, <스파이더 맨2>의 제작 과정은 순탄한 편이었다. 지난해 4월에서 8월 말까지 진행된 촬영의 결과물에 대해선 몇 가지 예측이 나돈다. 프린트에 윤기와 광채가 넘쳐흐르리라는 당연한 예상과 샘 레이미가 초심으로 돌아갔을 거라는 조심스런 예상. 닥터 옥토퍼스가 핵 실험 사고로 괴물로 돌변하는 과정의 그로테스크한 비주얼을 “<이블 데드> 모멘트”라고 소개한 한 열성팬의 눈썰미를 믿어본다면, 샘 레이미의 초기작에서 빛나던 개성과 장기가 다시금 발휘된 것으로 기대해봐도 좋을 것이다. <매트릭스> 시리즈로 특급 스탭이 되기 이전에 <다크맨> <이블 데드3> 등에서 샘 레이미와 호흡을 맞췄던 촬영감독 빌 포프를 2편에 새로 ‘영입’했다는 사실이 이 가설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스파이더 맨2>의 예고편과 현지시사기를 접하고, 더욱 그 ‘실체’가 궁금해진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프로덕션 과정을 기록한 귀한 자료 사진들과 메인 스탭들의 증언을 토대로, <스파이더 맨2>의 비주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보았다. 닥터 옥토퍼스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스파이더 맨은 어떻게 해서 더 잘 날게 됐을까? 무대는 얼마나 늘고 또 바뀌었을까? ‘결과’만큼이나 ‘과정’이 흥미로울 때가 있다. <스파이더 맨2>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렇다.
닥터 옥토퍼스는 어떻게 탄생했나?
그린 고블린이 떠나간 뒤에 뉴욕은 평화를 찾았을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악당이 떠나가면 더 강력한 악당이 나타나게 마련. 그것이 속편 블록버스터의 법칙이고 도심에 사는 슈퍼히어로의 운명이다. 무려 40년간 이어져온 <어메이징 스파이더 맨> 등의 코믹북에는 샌드맨, 블랙 캣, 미스티리오, 일렉트로 등의 개성있는 악당들로 넘쳐났지만 1편이 낙점한 그린 고블린만큼 강력하고 악독한 캐릭터는 드물었다. “그린 고블린 다음으로 인기있는 캐릭터는 옥토퍼스였다. 아마 아이들은 옥토퍼스를 보고 싶어할 거다.” 제작자 아비 아라드의 제언을 따라 마음을 굳힌 샘 레이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등에 달린 거대한 무쇠 촉수들로 걷고 서고 부수는 옥토퍼스만큼 위협적인 악당이 또 있겠는가. “벽을 타고 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옥토퍼스는 또 한 마리의 거미다. 거대한 거미와 싸우는 또 한 마리의 거미라는 대결 구도가 마음에 들었다.” 이제 문제는 그 무시무시한 악당의 ‘실물’을 어떻게 만들어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샘 레이미는 먼저 그 악당에게 ‘사연’이 있길 바랐다. “삶의 균형을 맞추려 애쓰던 피터는 옥타비우스 박사를 모델로 삼지만, 그를 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현실에 번민하게 된다.” 대체에너지 개발 실험에 열중하고,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는 ‘변신 전’의 지적이고 성실한 모습과 ‘변신 뒤’의 사악하고 위압적인 카리스마를 아우를 수 있는 배우로 에드 해리스, 크리스 쿠퍼, 크리스토퍼 워컨 등이 물망에 올랐고, 최종적으로 <프리다>에서 열연했던 앨프리드 몰리나가 선택됐다. 핵 처리 작업을 위해 개발한 기계 촉수가 등에 달라붙는 사고로 괴물이 되는 옥토퍼스를 연기하기 위해 몰리나는 캐릭터디자이너는 물론 애니매트로닉스 기술자들과 동고동락해야 했다. 기계 촉수를 ‘내 몸처럼’ 익숙하게 느끼고 다룰 수 있어야 했기 때문. 원작에서 이 촉수는 빠르고 힘이 세서 사람을 들어올리거나 날려버리는 건 기본이고 바위나 콘트리트를 한방에 부술 수도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미술팀은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감독의 소신대로 기계 촉수 활약상의 절반은 모형과 기계로, 나머지 절반은 CG로 그려냈다. 때문에 무려 50kg에 이르는 네개의 기계 촉수와 몸에 붙는 쇠 코르셋을 착용하고 지내야 했던 몰리나는 “나는 연체동물이다”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 채로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닥터 옥토퍼스의 뒷면 스케치. 핵처리 실험을 위해 개발한 기계 촉수가 등에 붙어버린 모습이 영화 속에서 이렇게 형상화됐다(맨 위). 앨프리드 몰리나가 촉수를 붙인 의상을 입어보고 있다. 개별 움직임이 가능한 76개의 마디로 이뤄진 촉수는 따로 만들어져 착색, 크롬 도금을 한 뒤에 다시 색을 입혀 조립한 것이다. 촉수 무게만 50kg에 달한다(가운데). 해리를 찾아가 협박하는 옥토퍼스의 모습을, 해리의 베란다 세트에서 대형 블루스크린을 배경으로 촬영하고 있다(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