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비주얼 롤러코스터 <스파이더 맨2> [1] - LA시사기
2004-06-29
글 : 옥혜령 (LA 통신원)
스파이더 맨 책임감을 고민하다

파워에는 반드시 책임감이 따른다.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 미디어에서 흘러나올 법한 선전용 광고나 마이클 무어식 다큐멘터리의 캐치프레이즈가 아니다. 빨강, 파랑의 유니폼과 거미줄 몇 가닥만으로 2002년 전세계 관객을 손아귀에 넣은 사나이, 스파이더 맨이 올여름 풀어야 할 숙제다. 거미줄에 매달려 아찔한 뉴욕 마천루 사이를 활강하는 재미만으로도 쏠쏠할 스파이더 맨에게 ‘책임감’이니 하는 단어가 너무 무겁다고 느낀다면, 그건 스파이더 맨이 우리와 다르지 않게 고층빌딩 숲 아래 북적대는 거리 출신이라는 걸 잠시 잊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생이 외계인이라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슈퍼맨과 달리 평범한 도시인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 맨이 되기까지의 여정은 중력의 무게만큼이나 지난할 수밖에. 덤으로, 올여름 돌아온 스파이더 맨은 제작비 2억달러와 1편의 대성공이라는 이중의 짐까지 지고 있다.

6월13일 저녁, 개봉을 2주 남짓 앞둔 <스파이더 맨2>의 해외 기자 시사회가 열리던 날, 전례없이 시사회장인 LA 할리우드의 아크라이트 극장에 예정 시간보다 한참이나 일찍 도착하고야 말았다. 지난해 여름부터 이미 감질나게 선보인 티저 광고나 1차 기자 시사회에서 소개한 홍보용 클립 때문에 조급증이 생긴 것도 사실이지만 와이드 스크린으로 촬영되었다는 소문에 최적의 좌석을 선점하리라는 욕심도 한 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극장에서 봐야 제맛이 나는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스파이더 맨> 시리즈야말로 현기증나는 이미지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만드는 스펙터클의 매력이 장르의 존재 이유가 아니던가.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스파이더 맨2>는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다양한 스타일이 흥미롭게 어우러진 만화경이었다.

외적 파워도, 내적 고통도 깊어진 스파이더 맨

시사회 다음날, 소니 스튜디오에서 이어진 인터뷰에서 영화홍보의 막바지에 이르러 지친 기색을 보이는 감독, 배우들과 완성본을 앞에 두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잇었다. 해외 기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스펙터클과 스토리 등 모든 면에서 <스파이더 맨2>가 전편보다 한 걸음 나아갔다는 것. 빌딩 숲을 날고, 기어오르는 것 이외에도 위험을 직감적으로 파악하는 예지 능력 등 스파이더 맨의 파워도 업그레이드됐을 뿐더러 내적 고통도 한껏 깊어졌고, 새로운 악당 닥터 옥토퍼스의 기계 문어발의 파괴력도 감당하기 힘들어 보인다. 3년새 몰라보게 발달한 특수효과 기술에 힘입어 스펙터클도 한층 다양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스파이더 맨> 시리즈를 고만고만한 블록버스터들과 차별짓는 것은 아무래도 컬트영화의 고전이 된 <이블 데드> 시리즈 등에서 보여준 샘 레이미 감독 특유의 유머와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인 듯하다. 스파이더 맨으로서의 삶을 선택하고 메리 제인을 떠난 피터 파커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궁금증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뉴욕의 거리에서 좌충우돌하는 피터/스파이더 맨(토비 맥과이어)의 모습으로 충분히 답해질듯하다. 스파이더 맨으로서의 파워 말고는 가진 것도 별로 없는데, 포기해야 할 것은 많은 청년 피터의 ‘균형잡기’는 곳곳에서, 때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예를 들면 세탁소에서마저) 장애물을 만난다. 살다보면 그렇듯이, 스파이더 맨도 (빌딩에서) 떨어질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옳은 일을 하는 것도 쉽지 않고, 마음대로 살기도 쉽지 않고, 사랑은 더더욱 어려운 뉴요커, 피터 파커를 토비 맥과이어는 예의 어리숙하면서도 수줍은 모습으로 그려냈다. 1차 시사회에서 예민한 반응으로 기자들을 당황하게 하던 토비 맥과이어는 이번에는 한층 여유로워진 태도로 “분석적 태도로 영화 준비하기”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며, “사회적 책임감과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올바른 삶을 선택하기”라는 주제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사실 좀더 개인주의적이던 원작 코믹스의 <스파이더 맨>에 비해 영화 버전 <스파이더 맨>은 도덕심이 한층 강조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정작 토비 맥과이어 본인이라면, 영화배우로서의 사명과 사랑을 포함한 개인적 삶 중에 양자택일을 해야만 한다면 주저없이 평범한 삶을 선택하겠단다. 피터 파커의 선택은 어떠할지, 커스틴 던스틴의 말처럼, “피터가 결정을 내리길 기다리며 아픈 곳을 찔러대는” 메리 제인의 적극적인 역할에 단서가 있지 않을까.

인간적인 악당, 기계문어발의 닥터 옥토퍼스

마블 코믹스 팬들이 제1의 악당으로 꼽아왔다는 닥터 옥토퍼스도 영화의 전체 분위기에 맞게 좀더 인간적인 깊이가 더해졌다. 전편의 그린 고블린 역의 윌리엄 데포처럼 악당의 이미지로 굳어져 있지 않은 앨프리드 몰리나를 닥터 옥토퍼스로 캐스팅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 듯. <인디아나 존스>에서 최근작 <프리다>에 이르기까지 연극 무대를 오간 연기 경력 20년이 넘는 베테랑 연기자 몰리나는 블록버스터영화 속에 정통 연기파 배우의 아우라를 흥미롭게 끌어들이고 있다. 대규모 특수효과 촬영이 처음이라는 몰리나는 촬영 내내 4개의 거대한 기계 문어발에 해리, 래리, 플로어 등의 별명을 지어놓고 함께 움직이는 법을 연구했다는데, 기계 문어발과 호흡이 썩 잘 맞는다. 샘 레이미 감독을 본받아 양복 정장을 입고 인터뷰장에 나타난 친구 해리 오스번 역의 제임스 프랑코의 매력은 아직 2편에서는 제 빛을 충분히 발하지 못한 듯. TV시리즈 <제임스 딘>의 주인공답게 제임스 딘을 쏙 빼닮은 이 젊은 미남 배우는 피터 파커 역의 오디션에 떨어진 것이 아무래도 아쉬운 듯 히어로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밝혔지만 아무래도 3편에서는 악한 역할의 진수를 보게 될 듯하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스파이더 맨의 매력은 그 유연한 활강이다. 거침없는 활강의 무대가 되는 도시, 뉴욕은 <스파이더 맨> 시리즈의 말없는 또 다른 주인공. 2억달러라는 제작비가 무색하지 않게 전편보다 현장 로케이션 촬영 규모가 커졌다. 언제나 좁은 거리를 가득 메운 옐로 캡, 컬럼비아대학, 차이나타운, 자연사박물관, 앤솔로지필름아카이브 등 익숙한 뉴욕의 아이콘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사실 뉴욕은 단순히 범죄 배경으로서뿐 아니라 슈퍼히어로 장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영화사에서 특수효과와 스펙터클의 의미에 대한 연구의 선구자격인 스콧 부캣만은 저서 <중력의 문제들>에서 미국 슈퍼히어로 만화·영화 장르는 현대적 도시의 모더티니를 스펙터클을 통해 역설적으로 ‘숭고’한 경험으로 극복하는 유토피안적인 열망의 산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가로, 세로 격자로 짜여진 뉴욕의 거리가 합리성으로 대표되는 사회질서를 반영한다면, 수직으로 상승하는 슈퍼히어로의 비상은 현기증나는 움직임을 통한 해방의 대리만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지붕에서 내려다보는 뉴욕 마천루의 아름다움은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법(대개는 백인 남성 영웅이기는 하지만). 마천루의 지붕에서 내려다보는 스파이더 맨의 시점숏으로 잡아낸 까마득한 거리의 풍경은 중력의 법칙을 조건부나마(거미줄에 매달려) 넘어서는 자의 희열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너무나 비싼 촬영과 후반작업 비용 때문에 1편에서 한 장면에서밖에 사용하지 못햇던 스파이더캠(Spydercam)은 이번 속편에서 본격적으로 그 진가를 발휘한다. 빌딩 옥상에 크레인을 설치하고, 와이어에 카메라를 매달아 빌딩 숲 사이를 가로질러 찍어낸 활강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잠시 아이맥스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도 든다.

현기증 나는 활강, 속도감 있는 액션

한편, 수직을 축으로 한 전통적인 스파이더 맨의 활강장면에 비견해 시카고에서 촬영한 클라이맥스의 닥터 옥토퍼스와의 기차대결 장면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이미지를 참신하게 활용한 액션신으로 주저없이 꼽을 만하다. 사실, 빽빽이 들어찬 빌딩 숲 사이에서 폭파 이외의 새로운 속도감 있는 액션 스펙터클을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수직의 빌딩 숲 사이를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기차 위에서의 한판 승부는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청사진을 그려낸 숨은 실력자들, 제작자들의 면모는 이후 <스파이더 맨> 시리즈가 걸어갈 길을 제시하는 듯하다. 특히 마블 코믹사의 원작자 스탠 리, <파이트 클럽> <씬 레드 라인> 등을 제작한 로라 지스킨과 함께 제작에 참여한 마블엔터테인먼크의 아비 아라드의 경력은 최근 할리우드 대형 블록버스터의 유행과도 무관하지 않아 흥미롭다. <헐크> <엑스맨> <스파이더 맨> 그리고 이후 <판타스틱4>까지 마블 코믹스 원작의 영화화를 모두 지휘한 아비 아라드는 20년 동안 비디오 게임과 장난감 업계에서 활약한 숨은 실력자. 인터뷰에서 게임과 영화는 사실 같은 것이라고 본다는 비즈니스 철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만화, 게임, 영화가 장르 혼합되어가는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계의 추세에 발맞추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스파이더 맨2>가 전편의 흥행성적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피터의 숙제에 동참하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팬들에게는 즐거운 여름 방학 과제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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