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충무로 실화영화 붐 [1]
2004-06-30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지금 한국 영화계에 실화영화 제작 붐이 일어나는 이유

충무로는 지금 ‘실화영화’ 제작 신드롬으로 들썩거리고 있다. 들썩거린다는 표현이 지나치다면, 서서히 그 일각이 드러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왜일까? 이 현상을 단순히 트렌드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다. 그러기에는 물적 규모가 너무 크고, 그 소재지가 너무 다양하며, 너무 많은 제작사에서 동시적으로 관심을 쏟고, 그 진행 속도조차 너무 빠르다. 사후약방문이란 말이 있다. 한국영화에 대한 저널리즘의 판단이 사후적인 선에서의 시체 의약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 흐름의 중도에 끼어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마주해야 하는 화두가 지금의 실화영화 제작 신드롬이다. 작품 외적인 추적과 작품 내적인 분석을 결합하면서 물어보자. 왜 과거의 실화는 지금 한국영화를 찾아왔는가? / 편집자

실화가 허구를 거느리는 이 현상이 그저 잠정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지금 충무로에서는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제작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 작품들은 이미 촬영 중이고, 구체적인 선에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간 작품들도 상당수다. <살인의 추억>과 <실미도>가 쓸고 지나간 일종의 흥행 후폭풍으로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리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고, 실제로 과연 어떤 소재와 인물이 영화화 될 것인지가 회자되었다. 그런데 현재 이 현상은 단순히 일별하고 지나갈 만한 정도가 아닌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왜 한국영화계는 가장 가까운 거리의 역사 속을 이토록 맹렬히 뒤지는가? 다만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를 함께 거론하려는 이 작업에는 일정한 제약이 존재한다. 영화 관계자들은 앞으로 만드러질 영화에 관해 되도록 침묵하려 한다. 진행 중인 작업 특유의 불확정성 외에도 실제 사건과 실존 인물이 연루된 데서 오는 조심스러움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개 속에서 앞을 짚고 그것을 과거와 현재로 연결하려는 투자에 의지해보려 한다.

역사적 소재에 대한 제작 ‘무의식’, 실화영화 붐을 일으키다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실화영화 제작이 그 연쇄작용을 거듭하고 있으며, 동시적인 현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부정적으로 본다면 문화산업으로서 영화가 갖는 상업적 흥행의 목표치가 은연중의 결탁을 통해 표면화되고 있는 것이고, 긍정적으로 본다면 역사 환기 기능이 가능한 소재를 영화화할 시기가 왔다는 것을 직감한 건전한 제작 무의식이 집단적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부정적, 긍정적 경향 둘 모두가 실화영화의 붐을 촉발시키는 전제라고 일단 추상적으로 말할 수 있다(때마침 마련된 2004년 상반기 <씨네21> 편집위원 좌담에서는 여기에 대한 몇 가지 연계점을 찾을 수 있는 화두들이 나왔다. 비록 그들이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에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세명의 편집위원이 각자의 화두로 쏟아놓은 것들 중, 한국 근대성의 트라우마에 대한 시선(김소영)과 왜 지금 한국영화는 과거에 매몰되어 현재와 마주하지 않는가에 대한 시간성 고민(정성일)과 한국영화는 지금 애타게 자기 이미지를 찾고 있다는 현재형 관찰(허문영), 이 점 모두에 ‘실화영화’ 제작 현상이 이어져 있다고 확신한다. 이런 용어를 사용할 때마다 생기는 번거로움은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라는 정확함을 위해 매번 문장을 낭비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짧게 실화영화라고 부르기로 하자).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인 실화영화들

<청연><슈퍼스타 감사용>(위부터)

그렇다면 먼저 이런 점이 궁금하지 않겠는가? 대체 어떤 실화들이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는가? 기초적인 이해를 위해서라도 그 영화들을 줄줄이 나열해야 하는 불편함을 피할 수가 없다. 파악 가능한 수준에서 대략 4편의 영화가 촬영 중이고, 8편 정도가 시놉시스 및 시나리오 작업 단계에 들어서 있다. <청연>(제작 씨네라인2, 감독 윤종찬)은 일본 강점기에 하늘을 날아오른 최초의 한국 여류비행사 박경원의 일대기를 그리는 영화다. <역도산>(제작 싸이더스, 감독 송해성)은 한국인으로 태어나 일본 스모계에 입문했지만, 재일 한국인이라는 멸시와 모욕 끝에 프로레슬러로 전향하여 수많은 인기와 비사를 남긴 본명 김신락에 관한 이야기이다. <바람의 파이터>(제작 아이비젼엔터테인먼트, 감독 양윤호)는 일본의 전통 무예 가라테를 근거로 극진 가라테를 창시하여 세계의 무술 고수들과 격전을 벌이며 한 시대를 풍미한 무도인 최배달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슈퍼스타 감사용>(제작 싸이더스, 감독 김종현)은 한국 프로야구 창단 이후 꼴찌를 면치 못했던 삼미 슈퍼스타즈, 그곳에서도 패전처리 투수로 불렸던 투수 감사용의 야구인생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들이 현재 촬영 중이다.

그뒤를 이어 시나리오 작업 중인 영화들. 〈TBC 사람들>(제작 마술피리, 감독 미정)은 12·12 사태 이후 무력으로 권좌에 오른 전두환 군사정권이 언론통제를 위한 통폐합 조치를 취하면서 다음해 1980년 12월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인 TBC(일명 동양방송)를 공영방송의 한 채널로 통합시킨 사건을 다룰 예정이다. <독도 수비대>(제작 감자·청년필름, 감독 미정)는 1953년에서 1956년까지 일본의 독도 침략을 막기 위해 자의적으로 독도 수비대를 결성하여 활동했던 홍씨 문중을 비롯한 울릉도 주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노근리 다리>(제작 명필름, 감독 황규덕)는 1950년 7월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자행된 수백명의 무고한 양민 학살사건을 동명원작에 기초하여 만들어낼 예정이다(그리고 지금 명필름에서는 한국 정치사의 중대한 실화 중 하나를 이미 감독 중심의 시나리오로 준비 중이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까지 포함한다면 명필름에서만 2편의 실화영화가 진행 중이다).

그리고 ‘지강헌 사건’이 있다. 여기에서 영화의 제목을 말하지 않고 지강헌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1988년 이송 중 탈옥하여 사회에 대한 불공평을 일갈하며 도피행각을 벌이다가,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외치고 끝내는 자살한 탈주범 지강헌 사건을 두고 <무전유죄>(가제)(제작 다인픽처스, 감독 김의석), <유전무죄 무전유죄>(제작 씨네터, 감독 미정), <홀리데이>(제작 현진시네마, 감독 미정?), 이렇게 3개의 영화사가 동시에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김영빈 감독(<김의 전쟁> <테러리스트> 등) 역시 개인적으로 이미 시나리오를 써놓은 상태였다. 한국 영화사에서 닮은꼴 소재의 영화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다발적인 지형을 보인 것은 처음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지강헌 사건 영화화를 둘러싼 제작사들의 동시적이며 갑작스런 경합은 실화영화에 대한 ‘제작 무의식’이 현재 어느 정도인지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잣대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구체적인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왜 지금 충무로는 과거의 사건들을 소환하는가? 어떤 열망이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실화가 들어서도록 부추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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