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지강헌 사건’은 3개 영화사(다인픽처스의 <무전유죄>, 씨네터의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진시네마의 <홀리데이>)가 추진, 또 한명의 영화감독(김영빈의 <휴일>)이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프로젝트다. 따라서 대체로 공통적인 내용을 제외한 예외 부분에만 영화사 및 감독명을 표기하였음을 밝혀둔다.
"지강헌 사건"
이런 사건 l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 한동안 이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돈이 없으면 죄가 되고, 돈만 있으면 죄도 가벼워지는 어두운 시대의 모순을 향해 던진 한 탈옥수의 울분이었다. 이른바 ‘지강헌 사건’. 1988년, 온 나라가 올림픽 성공의 흥에 취해 있을 무렵 주동자 지강헌을 포함한 12명의 죄수가 이송 중 탈옥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9일 동안 이들 일행은 수차례 인질을 바꿔가며 도주를 시도했지만,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했으며 가해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결국 지강헌을 포함하여 최후에 남은 4인은 경찰과 대치하며 마지막 인질극을 벌였고, 지강헌은 깨진 유리로 목을 그어 자해를 시도했고, 그때 투입된 특공대는 지강헌 외 1명을 사살했다. 지강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이 70억원을 횡령 탈세하고도 고작 7년형을 선고받은 것에 비해, 잡범인 자신은 556만원 절도에 7년 언도, 보호감호 10년까지 포함하여 총 17년을 선고받은 것에 불만을 품고 탈주를 시도했다고 한다.
이런 계기 l ‘지강헌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의 기획은 오래전부터 충무로를 전설처럼 떠돌던 것이었다. 외양적으로는 발전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썩을 대로 썩었던 시대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사건이었기 때문이고, 또한 지강헌이란 인물 자체가 주는 흥미로움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지강헌은 시인이 꿈이었고, 설득력 있는 말솜씨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동료 탈주범에게 자수를 권고한 것, 마지막 인질 고선숙씨가 오히려 지강헌을 보호하려 든 것, 경찰과 대치하던 지강헌이 팝그룹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틀어달라고 요구하여 하루종일 들은 것 등이 세간의 화제가 됐었다. 당시 이 사건은 사회의 밝은 면만 강조할 것을 강요했던 정부의 행태에 영향받아 그 진상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았다. 탈주를 시도한 한 잡범의 입에서 사회의 환부를 건드리는 일갈이 튀어나왔다는 것이 두고두고 제작자와 감독의 흥미를 끌었다. 이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시나리오 작업 중이거나 곧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런 영화 l <무전유죄>는 아직까지 정확한 내용을 설명할 단계는 아니다. 무거운 톤으로 갈 것은 아니지만, 현장 증인들을 비롯한 인터뷰 및 자료들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의미를 짚을 수 있는 방향을 염두에 두고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지강헌이 악인이 아니며, 은연중에 권력과 부패에 항거한 인물이라는 측면을 부각한다. 9일간의 행적 속에서 최후 4인이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극적으로 배치하면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엔딩으로 끌고 간다. <홀리데이> 역시 인간 지강헌을 쫓아가본다. 따라서 논픽션의 분위기나 다큐멘터리의 분위기보다는 휴먼드라마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영화 속의 엔딩을 스톡홀름 증후군- 인질과 인질범이 도리어 사랑에 빠지는 현상- 으로 맺는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염두에 두고 있다. <휴일>은 픽션을 강화한다. 지강헌과 대결구도를 갖는 경찰이 등장하고 어느 지점에서는 서로 스쳐지나가기도 하면서 대결 구도를 그려간다. 동시에 러브스토리도 픽션의 일부로 들어갈 것이고, 장르적으로는 누아르적 요소도 배제하지 않는다(이상은 각 제작사 대표 및 감독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독도 수비대>
이런 사건 l 이게 어찌된 일인가. 다케시마(竹島)라니. 1953년 4월1일. 미역을 따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에 놀라 굴 속으로 도망친 해녀들은 대형 선박이 물러간 다음 탕건봉쪽 암초에 꽂혀 있는 ‘일본국 시네마현 죽도’(日本國島根懸竹島)라는 팻말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울릉군의 장정들은 며칠 뒤 같은 자리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1번지’라는 표식을 꽂았다. 하지만 소리없는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일본 순시선의 침범은 계속됐고, 독도는 그때마다 ‘다케시마’가 됐다. 결국, 4월26일 울릉도 도동 선창에선 7인으로 구성된 독도 수비대가 발대식을 갖는다. 개머리판 없는 카빈총을 들고, 철모 대신 양재기와 짚모자를 쓰고, 식량 대용으로 허리에 된장과 고추장 단지를 차고 있었던 그들은 볼품없는 패잔병의 모습이었지만, 독도를 지키겠다는 결의만큼은 어느 용맹한 부대 못지않았다. 싸우다 급성맹장염에 걸리면 안 된다며 보건소에서 전원이 맹장제거 수술을 받고 독도로 떠난 이들은 1956년 3월 “대한민국 경찰 소속 독도 경비대에 수비권을 넘기기 전까지 50여회의 전투를 치르며 독도를 사수했다”. (<독도> 중 ‘독도를 지킨 사람들’ 장 참조, 글 박인식/ 사진 김정명/ 대원사 펴냄/ 1996년)
이런 계기 l <독도 수비대>의 구상은 이미 오래전 시작되었다. 당시 중학생이던 김원국(영화사 감자 대표)씨는 1984년 MBC에서 상영한 추석 특집 단막극을 보면서 이 이야기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그는 현재 독도 수호대 회원으로 활동할 만큼 독도 지키기 사랑에 열심이다. 무엇보다 흥미를 느낀 것은 독도를 둘러싼 민감한 사안 그 자체였다. 조선시대 안용복의 독도 지키기 일례에서도 알 수 있듯 독도는 끊임없이 일본과의 분쟁을 낳고 있는 뜨거운 감자이다. 그런데도 이 문제는 민간 차원에서만 다뤄질 뿐이다. 당시 홍순칠이라는 독도 수비대 대장은 영장을 위조하면서까지 의용군을 모집할 정도로 독도 사랑에 앞장섰다. 그는 이 비현실적인 캐릭터의 독도 사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독도를 지키려 했지만, 지금은 잊혀진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더불어 우리 민족사에 대한 교훈을 던져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전부터 여러 사람과 의견을 나누었지만, 사실상 올 1월 청년필름 김광수 대표에게 말을 건네면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고, 다음달 초고 시나리오가 나올 예정이다.
이런 영화 l 청년필름과 감자가 공동제작하는 <독도 수비대>는 라디오 방송작가로 잘 알려진 김교식씨의 <다큐멘터리 독도 수비대>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처음에는 당시 독도 수비대로 활동했던 34명의 인물 중 10명 정도가 생존해 있음을 알게 되어 인터뷰를 시도하려 했지만, 당시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대신 <다큐멘터리 독도 수비대>는 독도 수비대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를 넘어 영화의 중심인물의 모델인 홍순칠 독도 수비대장 등에 대한 묘사가 꼼꼼했고, 저자가 책을 쓰기 위해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홍순칠 독도 수비대장을 수차례 인터뷰했으며 이후에도 홍 대장의 딸의 결혼 때 주례를 맡을 정도로 친분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책에 대한 신뢰를 더욱 높여줬다고. 현재 시나리오 초고가 나온 상황으로, 각색작업은 <실미도>의 각색자이기도 한 김희재씨가 만든 시나리오 창작집단 베네딕투스가 맡고 있다. 독도 수비대가 결성되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과정이 주된 스토리. 여기에 무법자로 지목되어 미군에 연행된 홍 대장 이야기 등이 곁들여져 있다. 제작진은 1962년 한-일 정치회담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독도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쪽의 주장을 의제에 포함시킨 것이 지금까지도 일본이 ‘독도를 죽도라 부르며, 죽도는 우리땅’이라고 주장하게 된 정치적 사건이었다고 판단, 이때의 비화를 스토리에 버무려넣을 계획이다.
< TBC 사람들 >
이런 사건 l 1980년 11월12일 건전언론육성종합방안보고서가 통과됐다. 12·12 쿠데타와 5·17 비상계엄확대조치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언론통제를 목적으로 현존하는 방송·신문사를 통폐합하기 위해 만들어낸 강제조치문서. 10·26 이후 자유언론실천을 위해 태어난 한국기자협회의 간부들을 연행하고, 5·18 광주항쟁 보도와 관련해 ‘악성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일부 언론인을 구속하고, 곧이어 전국적으로 717명의 언론인을 해직시킨 뒤 벌어진 일이었다. 이틀 뒤, 신문협회와 방송협회는 전날 전해 받은 문공부 장관의 지시에 따라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건전언론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를 채택, 정부의 언론통폐합조치에 동의했다. 전국 총 64개의 신문·방송·통신사 가운데 신문사 11개, 방송사 27개, 통신사 6개 등 44개의 언론매체가 통폐합됐다. 이 가운데 동양방송(TBC)이 있었다. 한·일합작 애니메이션 <황금박쥐>, 똑순이 김민희를 아역스타로 만든 드라마 <달동네>, ‘한국 최초의 버라이어티 쇼’ <쇼쇼쇼> 등 당대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메이저 민영방송사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불길을 피해갈 수 없었다. 11월30일 TBC는 동아방송, 전일방송, 서해방송, 대구FM 등과 함께 한국방송공사(KBS)에 흡수·통합됐다.
이런 계기 l 그날 TBC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오늘 이것이 마지막 방송”임을 시청자와 청취자에게 알려야 했다. “이제 5분 남았습니다. 10분만이라도 더 있었으면…”이라면서 울먹이는 황인용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렀다. TBC에서의 내일이 없는 기상캐스터도 태연하게 일기예보를 전할 수가 없었다. TBC 사람들이 함께 모여 만든 고별방송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에 출연해 노래를 부르던 가수 이은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 마지막 고별방송은 허참이 진행했다.
조금만 감상을 보태 상상하더라도 당시 상황은 슬프고도 극적이다. 영화 〈TBC 사람들>의 제작사 마술피리는 이 마지막 순간을 촘촘히 메우고 있던 TBC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에 매력을 느꼈다. 그 얼굴들의 주인을, 지금도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유명한 연예인의 것들보다는 그들 뒤에 서 있던 조·단역 탤런트들과 스탭들, 그리고 군부의 압력을 누구보다 강하게 접했을 보도국 기자들의 것으로 상상해보는 데서 이 기획이 시작됐다고 윤경환 PD는 말한다. “TBC는 당대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최초의 민영·상업 방송사였다. TBC 사람들은 그 회사의 자랑스런 직원들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고된 하루를 끝내고 행복한 가정에 몸을 뉘이고 싶어하는 소시민들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80년 언론통폐합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생각했다.”
이런 영화 l 현재 한창 시나리오 작업 중인 영화 〈TBC 사람들>가 어떤 방향의 모양새로 빚어질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사건 자체가 재미있고 황당하다. 그 큰 방송사가 국가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도 그렇고, 그때 있었던 여러 사람들 중에 누구는 나중에 국회의원 되고, 누구는 대통령 닮았다고 출연금지 당했던 것도 그렇고. 상황 자체가 보여주는 아이러니가 매력적이다”라는 오기민 대표의 말에서 이 영화가 다른 한편으로 어떤 무게추를 늘여뜨릴지 짐작할 수 있지만 역시 단정하긴 어렵다. “영화 만든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중앙일보>에서 시놉시스라도 보여달라고 엄청 관심을 보이더라”며 “역사적 의의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는 절대 아니”라고 오기민 대표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TBC 사람들>이 보여줄 시대의 아이러니함은, ‘TBC’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 곁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섬세한 시선 주변에 존재할 것이라는 뜻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