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영화의 두번째 특징: 시대 자체가 또 하나의 주인공
여기서 실화영화 텍스트들의 두 번째 특징을 말할 수 있다. 역사의 의인화, 캐릭터화된 인물들이 살고 있는 그 시대 자체가 또 하나의 주인공인 것이다. 그것을 바로 ‘한국 근대사의 블랙홀’이라고 부르고 싶다. 실화영화의 소재에 대한 매력을 묻는 질문에 많은 제작자와 감독들은 ‘아이러니한 상황, 드라마틱한 면모, 영화 같은 사건’이 흥미로웠다고 동어반복적으로 대답하는데, 이 표현들은 진지하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왜 아이러니하고, 드라마틱하고, 영화 같아 보이는가? 즉, 자기 이미지의 탐사는 명확한 음과 양을 결론지을 수 없는 한 인간의 숨겨진 양면성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그 자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 추론 불가능한 한국 근대사의 어느 지점으로 이끌리기도 하는 것이다. 일본의 독도 침략을 막기 위해 국가도 모르는 사이에 의용대를 조직해 거창한 나무 대포를 깎아놓고 3년간을 가짜로 버텨낸 <독도 수비대>, 군사정권의 봉쇄정책 일환으로 언론통합되면서 겪었던 〈TBC 사람들>의 말 못할 속내, 수십년을 알려지지 않고 묻혀져왔던 미군 양민학살 사건의 피비린내 나는 현장 <노근리 다리>, 대한민국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사가 울려퍼지고, 70억원을 횡령 탈세한 독재자의 동생이 7년형을 선고받을 때, 돈 556만원 절도에 도합 17년을 언도받고 탈옥한 어느 잡범의 격렬한 외침과 자살로 끝맺은 ‘지강헌 사건’. 이 실화들이 흥미로운 이유는 도대체 처음과 끝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인도적으로 설명해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식민적 수탈과 민족주의적 방어가 해프닝에 가까운 결의로 표면화된 시대, 법과 정의 사이에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극이 버티고 있던 시대, 기술발달과 인성주의가 대치하고 있던 시대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또는 아직까지도 그렇게 ‘미궁’에 빠져 있고, ‘미제’로 남아 있을 만큼 혼탁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이러니하다는 그 영화적 매력의 발산은 기형적 한국 역사성에 본을 둔 것이며, 그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거나 해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살인의 추억>의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고, <실미도>의 전모에 관한 해석은 아직도 분분하다.
<바람의 파이터><살인의 추억>(위부터)
<살인의 추억>을 감독한 봉준호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이 소재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덤빌 때는 그 시대에 포커스를 맞추겠다는 의도가 없었는데,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첫 6개월간 자료조사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사건이 실렸던 신문을 찾아 한면 전체를 복사해서 보면 항상 한쪽에 화성살인사건 소식이 있고 다른 한쪽엔 ‘아시안게임 드디어 개막!’이나 ‘문귀동 고문사건’처럼 당시에 벌어진 다른 소식들이 같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사건을 시대적인 맥락 속에서 읽게 되더라. 이렇게 사건을 접하는 과정에 개인적인 경험도 흡수됐다. 그 시대에 대한 나의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기억들 말이다. 사건이 일어났던 그때 난 난생처음 미팅이란 걸 하고 있었구나, 하는 식으로.”(<씨네21> 400호, ‘<살인의 추억>의 감독, 비판자, 지지자가 가진 3각 대담 중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이 벤야민의 용어를 빌려와 신문과 소설로 묶여지는 “동질적이면서 공허한 시간”(homogeneous empty time)- 갑과 을은 같은 시각 어디에서도 마주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들은 신문의 뉴스를 읽으면서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라 부른 그 근대의 시간성을 봉준호는 고스란히 대한민국의 어느 신문을 읽으며 경험해낸 셈이다. 지금 실화영화 제작 붐의 실체가 이것이다. 이 경험이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실미도>의 작가 김희재는 이 영화가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 영화적 결과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결국 그 ‘왜곡된 뉴스의 시간’을 살아온 우리끼리의 근대적 시간에 모든 것이 닿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남한(또는 한반도)에서는 그 신문지상에서 밝혀진 내용과 진짜로 벌어진 사실이 수두룩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덮여 있거나, 왜곡되어 있는 것들이 산적해 있다. 때문에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미스터리의 상상력으로 엮여 있는 실화들이 스크린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때문에 그 과거와 현재는 결코 텍스트 내에서 만나지 못하고 지금 그 바깥에서 만난다. 예컨대 <실미도> 개봉 이후 사실관계를 둘러싼 빈번한 시시비비와 <살인의 추억>을 본뜬 것이 아니냐고 떠들어대는 요즘의 살인사건들. “역사적 의식 수준이 공고해져야 한다. 그 인식의 수준이 담보되어야 한다. SF도 할 수 있고, 공포도 할 수 있지만, 한국의 과거를 스크린으로 불러낼 때는 책임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재고된다면 다양한 목소리의 다양한 영화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명필름 대표, 심재명) 이 상식적 태도가 필요하다.
충무로는 지금 한반도의 역사를 다시 쓰는 중
누군가의 말처럼 어차피 “역사는 불구의 지식”일 수 있다. 그렇게 공백을 다시 메워 쓰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너무 크다. 그렇다면 좌절할 것인가? 여기서 지금 충무로의 실화영화 제작 붐을 긍정적으로 예견하기 위해 한 가지 관점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지금 이 영화들은 ‘남한(한반도)의 서사학’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자기 이미지를 찾아 헤매고, 한국 근대의 블랙홀에 의문을 던지는 것은 그 일환이다. 어찌됐든 이것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있다. 거칠게 말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거를 다룬 한국영화는 역사를 미메시스- 모방적 재현- 로만 파악하려 들었다. 꼬리를 물고늘어졌던 노스탤지어 영화들! 사소한 소품과 복식과 운치로 당시의 정경을 어떻게 똑같이 다시 재현할 수 있는가에 매달렸다. 그런데 여기 실화가 끼어들면서 역사를 디제시스- 사건을 중심으로 한 서사쓰기- 로 풀어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좀처럼 단언하긴 힘들지만, 스펙터클의 역사를 다시 스크린 안에서까지 함몰시키지 않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희망을 껴안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