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아시아 3국 최초의 합작 영화 <쓰리>(감독 김지운, 진가신, 논지 니미부트르)가 ‘옴니버스호러’로 선을 보였다. 홍콩과 타이에선 흥행에 성공했으나 한국에선 빛을 보지 못했다. “1편 때는 캐치프레이즈 때문에 시작한 거고, 나도 자신이 없었다. 개봉해보니 국내에 시장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비록 실패했지만. 요즘 관객은 새로운 것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좀더 열려 있구나라고.” 그래서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는 같은 해 도쿄영화제에서 <쓰리>의 발의자인 홍콩의 진가신을 만나 한번 더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하나의 컨셉으로 이어간 단편 시리즈 <어메이징 스토리>처럼 <쓰리>를 아시아 대표 호러 브랜드로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홍콩이나 타이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제작비는 상대적으로 낮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성공하지 못한 한국에서 의욕을 보이니 뜻밖으로 받아들였다.
2편 <쓰리, 몬스터>의 제작은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었다. 아시아의 세 감독이 뭉쳤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간섭할 수 없는 자율적인 시스템, 공포라는 것 말고는 영화 내적으로 기획 포인트를 잡기가 힘들다는 점, 한번에 세편에 대한 정보를 동시에 알려야 한다는 난점이 언어와 비즈니스 방식의 차이에 더해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가시밭길을 만들었다. <쓰리>의 연속 기획이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개별 영화사의 명운과 직접 관계를 맺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단순한 자본의 교류를 기반으로 하는 보통의 합작물과는 차이가 있는 접근이기 때문이다. <쓰리>는 공통의 경험, 공통의 개발을 토대로 ‘아시아 네트워크’를 실천할 수 있는 적절한 제작 사례다. 아직은 가능성뿐이지만, 호러의 원초적 운명이 ‘억압된 것으로부터의 귀환’이라는 점에서 <쓰리>는 한 나라의 테두리를 넘어선 공통의 억압 모티브를 다루는 콘텐츠로 발전할 수 있다. <쓰리, 몬스터>의 ‘3개국 비하인드 스토리’를 엮어본 건 이런 맥락이다. 아시아 3국의 영화인들이 어떻게 소통하고 있고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즐겁게 지켜보자는 것. 오정완 대표, 안수현 프로듀서, 박찬욱 감독 인터뷰를 토대로 재구성한 탓에 시점을 한국으로 국한할 수밖에 없었다.
철두철미한 원칙주의, 일본편이 만들어지기까지
‘봄’은 진가신에게 타이보다 일본이 좋겠다고 말을 꺼냈다. <쓰리>의 브랜드화가 성공하려면 한국에서 2편의 흥행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 구색으로나 마케팅으로나 일본 감독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고맙게도 1편의 파트너였던 타이이 흔쾌히 양해했다. 출발은 순조로워 보였고, 한국과 홍콩은 감독을 일찌감치 정할 수 있었다. 흥행과 작품성을 동시에 거머쥐기에 박찬욱과 유위강은 적절한 카드였다. 의외로 일본에서 이런 선택이 쉽지 않았다. 너무 나이가 많거나 컬트적이거나. 감독의 색깔로 맞춰보기로 했다. <주온> 1, 2편의 시미즈 다카시는 할리우드에서 만들 리메이크 일정 때문에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구로사와 기요시는 스스로 사양했다. 미이케 다카시와 <착신아리>를 만든 제작사 가도가와가 의욕을 보였고, 이들과 의기투합했다.
1편과 마찬가지로 감독을 제약하는 컨셉은 없었다. ‘귀신 없는 호러’를 만들자는 출발점만 정했을 뿐. 또 옴니버스에 대한 관객의 편이와 해외 판매를 쉽게 하기 위해 러닝타임을 30분에 끊기로 했다. 미이케 다카시의 시나리오가 제일 먼저 나왔다. 한국과 홍콩이 다 흡족해했다. 박찬욱과 유위강의 시놉시스가 나오자 홍콩만 다른 길을 가려 한다는 게 드러났다. 미이케 다카시와 박찬욱의 구상에서 ‘듀얼 혹은 두 사람(의 대립)’이라는 컨셉이 도출됐고 홍콩쪽에 이 컨셉에 맞춰줄 수 없는지 물었다. 홍콩 스타일이 그렇지만 유위강은 더 시원시원하다. “노 플라블럼!”
미이케 다카시의 가공할 스피드는 한국과 홍콩을 경악시켰다. 1월에 촬영에 들어가더니 2월에 편집을 끝냈다며 ‘파이널’을 보내왔다. 편집본이 아니라 최종 믹싱까지 끝낸 말 그대로 ‘최종본’이었다. 합의했던 애초 완성 일정은 4월. 다른 2개국은 촬영 개시조차 못한 때였다. 미이케 다카시의 러닝타임은 40분. 세 나라 프로듀서가 모처럼 회동하게 된 아메리칸필름마켓(AFM), 각국의 심의 기준을 고려해 최종 단계에서 감독이 조금이나마 손볼 수 있는 여지를 두자는 말을 꺼냈으나 일본은 단호하게 “우린 모든 작업이 끝났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버텼다.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본과 미묘한 갈등은 사실 좀더 일찍 시작됐다.
감독이 정해지기 전, 3개국의 프로듀서가 2페이지짜리 ‘딜 메모’ 하나를 만드는 데 무려 두달을 보냈다. 일본의 철두철미한 원칙주의 때문이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까지 크레딧의 순서, 문구의 토씨 하나하나를 따졌다. 정체가 ‘불투명’한 신뢰를 바탕으로 비즈니스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사전에 모든 문제를 점검해 원칙을 만들고 이를 그대로 실행하자는 주의였다. 반면 한국과 홍콩은 1편을 같이 했던 관계이기도 해서 “어?” 하면 “아!” 하는 분위기였다. 일본이 한국과 홍콩을 한편으로 간주하며 소외감을 느끼는 동시에 어떤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닐까 하는 초조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반전은 스크린 속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예고없이 찾아오는 ‘손님’이다. 막판에 뒤통수를 후려친 건 일본이 아니라 홍콩이었다.
미이케 다카시의 <쓰리, 몬스터>
쌍둥이 언니를 향한 서늘한 ‘질투심’ 온통 하얗기만 한 벌판, 그 위로 외롭게 우뚝 선 나무 한 그루. 그 옆에서 한 사내가 삽을 들고 나무상자 하나를 묻고 있다.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흙더미 아래, 한 여자가 비닐에 싸여 가쁜숨을 내쉬고 있다.
<오디션> <착신아리>에서 기괴한 상상력으로 우리를 습격해온 미이케 다카시는 은은한 침묵 속에서 몽환적인 호러판타지를 펼쳐간다. 한 남자를 사랑한 어린 쌍둥이 자매의 질투가 불러내는 에로틱한 공포다. 쌍둥이 자매 교코와 쇼코는 의붓아버지와 함께 쇼를 벌이는 서커스 단원이다. 교코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의 사랑은 쇼코에게만 쏠려 있다. 질투에 사로잡힌 교코는 쇼코와 의붓아버지를 치명적인 위험에 몰아넣게 된다. 이제 쇼코는 열살의 소녀로 남아 있게 되지만 교코는 스물다섯살의 소설가로 성장했다. 그들의 삶은 동떨어진 듯 보이나 그들의 몸은 분리된 게 아니다. 미이케 다카시는 샴쌍둥이를 소재로 차분하고 감성적인 호러를 만들어냈다. 질주하던 미이케의 아나키즘은 여기서 잠시 쉬어가는 듯하다.
박찬욱 감독은 미이케의 이 작품을 보다가 기분이 몹시 서늘해졌다. 무섭기도 했지만 자신이 10년 전에 쓴 시나리오 <더블 유>의 이야기와 아주 흡사했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시스터즈>를 뒤늦게 보고 영화화를 포기했지만, 곡마단의 쌍둥이 자매와 살인극이 뒤얽힌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