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의 세계에 떨어진 이상한 나라의 강혜정. 카드의 여왕 따위가 ‘참수!’를 외친다면 그냥 다가가 여왕 따위 ‘갈아’버릴 테세다. 피아노 줄에 묶이고 손가락을 잘린 채 독하게 눈을 부릅뜨고 “죽여! 죽여버리란 말이야!”를 제대로 외칠 줄 아는 여배우가 그리 흔하던가. 그런데. 솔직히 말할까.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인간 강혜정의 첫인상은 그냥 ‘소녀’였다. 입을 삐죽 내밀고 예쁘게 웃는데, 영화 속에서 보이던 아우라가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정말로 실망할 뻔했다!” 그런데 그것도 다 오해였다. 이 무서운 여자/소녀/여인/아이는 또 한번 자신을 뒤집어엎는다. 선량한 눈으로 웃고는 있지만 이거 왠지 좀 내숭 같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뷰를 해가면서 슬슬 그 당돌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제야 영화 속에서 강혜정이라는 배우가 독하게 부릅뜨고 있던 그 눈빛이 보이고 있었다.
-<쓰리, 몬스터>의 피아노 줄에 묶여 있는 연기. 얼마나 오래 묶여 있었나.
=대강 한 15일쯤 촬영을 했는데. 그 기간 동안은 계속 묶여 있었다.
-15일을 계속.
=아니지. 밥은 먹어야 하지 않겠나. 한번 묶이면 보통 6시간 정도는 그러고 있어야 했다. 대한민국에서 영화 만드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웃음) 나중에는 묶여 있는 거 자체가 익숙해지더라. 촬영이 끝나고 그게 풀리는 순간 너무 상쾌했다. 얼음에 손대고 있다가 뗀 것처럼.
-아무리 그래도 감독이 원망스러웠겠다.
=투덜투덜댔다. “감독님! 이영애 언니였대도 이러실 거예요?”라면서. (웃음) 하지만 감독님에게 원망하는 맘은 전혀 없다. 감독님이야 치밀하신 분이긴 한데 계산적이라고 할 순 없고. 배우를 다루는 것도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는 항상 정확하게 요구하고. 배우가 피폐할 때 유들유들하게 잘해주시니까.
-당신의 역할들을 보면 정상적인 남녀관계를 저 멀리 벗어나 있다.
=그건 곧 평범하지 않다라는 말이겠지.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게 그 사람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냄새 때문이었던 경험도 있다. 사람 냄새 말이다. (흐흐흐)
-처음에도 말했지만, 박찬욱의 세계에 떨어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느낌이 있다. 여자이나 아직은 소녀 같은 느낌. 그러나 잔혹한 본능 같은 게 보이는.
=<부부 클리닉>이라는 프로를 어제 봤는데. 손자와 할아버지가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오더라.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뺨을 때리는 게임이었다. 할아버지가 “아이구 이겼네” 그랬더니 갑자기 아이가 할아버지 뺨을 짝! 때리는 거다. 할아버지는 그저 “아이구 이녀석 할애비를 때리면 되나”이러면서 애를 예뻐하고. 그거 보면서 아차 싶더라. 너무 순수하면 역으로 굉장히 잔혹해진다. 아무것도 안 입고 날개 달린 꼬마 천사 이미지를 생각해봐라. 항상 웃고 있으나, 어느 순간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뜨린다고 생각하면. 아우. 소름이 쫘악 끼친다. 악이 악의 상징으로 보여지는 건 당연한데. 선이 악의 상징으로 보여지는 건 섬뜩한 것 같다.
-차기작인 <남극일기>는 어떻게 선택했나.
=여기서의 역할은, 탐험대를 멀리서 보조해주는 베이스 캠프 대원 중 한명이다. 얼마 나오지는 않는다. <남극일기>를 하게 된 건 시나리오가 너무 재미있어서. 읽고나니 팔에 소름이 좌악! 스산한 기운이 화악! 올라오더라.
-자신에게 딱 맞는 역할들을 해왔으니 더없이 좋은 선택들이었다.
=그 딱 맞는다라는 것은, 음… 그러니까 사람들은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영화를 참고를 했고’ 그런 말들을 많이 한다. 뭐 그렇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마치 내가 거기에 끼워맞추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다. 그럼 내가 대체 어디에 있나. 내가 너무 바보 같고 천한 연기를 한다고 해도 나에게는 그런 방식이 맞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이렇게 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의 연기를 미리 보는 게 공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건 연기하는 데 더 큰 편견이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언제나 ‘강혜정’이라는 인간으로부터 연기에 시동을 거나.
=내 나이가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 연기는 모두 ‘나’로부터 출발한다. 역할이 주어지면 내 경험에 비추어서 생각하게 되니까. 그래서 역할에 나를 쏙 맞추려고 하는데. 그런 것 때문에 솔직히 영화 안에서 ‘강혜정’이라는 배우를 보기는 아직 좀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선배 여배우가 있나? 없을 것 같은데.
=어머. 많다. 특히 김호정 선배를 존경하고 닮고 싶다. 여배우는 여자 아닌가. 남성에게 자극을 줄 수 있어야 하고 아름다워 보여야 한다. 그게 여배우의 매력일 수 있다. 솔직히 그런 매력은 서른이 넘어야 보이지 않겠나. 그래서 서른 이상 활동하는 여배우들은 다 존경스럽다.
-강혜정은 연기를 안 해도 다른 것을 잘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 어쩜 그리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셨을까. 그냥 호기심이 많다. 궁금한 것도 많고, 하고 싶고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도 많고. 연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었을 거다. 사람 상대하고 만나는 게 너무 재미있거든.
-다시 <쓰리, 몬스터>로 돌아가서. 극중에서 피아니스트인 당신은 손가락을 잃었다. 하지만 만약 진짜로 당신이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면. 인간 강혜정 어떡하겠나.
=그러면… 갈아야지. 어떻게 살려두나. 그냥 갈아버려야지. (일동 폭소, 녹음기를 쳐다보며 땀흘리는 매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