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프랜차이즈 블록버스터의 7전8기 뒷이야기 [2]
2004-09-01
글 : 박혜명
<배트맨> 제작사 머리굴리기, 아이템도 여러 개 굴리기

요컨대 <배트맨> <배트맨 리턴즈> <배트맨 포에버> <배트맨 앤 로빈>에 이은 다섯 번째 프로젝트. 시퀄(후사·後史)을 내놓을 것이냐 프리퀄(전사·戰史)을 먼저 던질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슈퍼맨의 도움을 빌릴 것이냐. 여러 아이템을 동시에 굴리면서 하나를 밀어붙이지 못한 케이스.

<배트맨 앤 로빈>(1997)이 평단과 관객에게 모두 외면을 받은 것은 워너로서 치유하기 힘든 상처였다. 오죽했으면 <슈퍼맨 vs 배트맨> 프로젝트가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일부 짓궂은 팬들이 이렇게 수군댔다. "두 ‘맨’ 사이에 왜 ‘&’가 아니라 ‘vs’를 썼게. 사람들이 <배트맨 앤 로빈>의 악몽을 떠올릴까봐 워너가 겁먹은 거야." 이들의 수군거림은 진실일 수도 있었다. <배트맨 앤 로빈>이 끝난 시점부터 워너는, 시리즈가 갈수록 실망스럽다는 세간의 평을 만회해보고자 완전히 새로운 <배트맨> 영화를 고민하고 있었다. 2년 뒤인 99년, <배트맨>이 TV시리즈로 나온다는 루머와 <배트맨5>가 만들어진다는 소문이 동시에 돌기 시작했다. 개봉 목표는 2001년이라고 했다.

TV시리즈가 배트맨이 되기 전의 브루스 웨인만 다룰 것이라는 구체적인 루머가 이어질 무렵에 <배트맨5>는 두개의 형체로 갈렸다. 하나는 <배트맨> 4편의 내용을 이어가는 라이브액션영화 <배트맨 비욘드>, 다른 하나는 <배트맨: 원년>. 팬들이 헷갈려하는 것은 브루스 웨인/배트맨의 전사(前史)를 다룬다는 <배트맨: 원년>이었다. 같은 소재로 TV시리즈와 영화를 동시에 만든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고, ‘에인트 잇 쿨’의 사이트 운영자 해리 놀즈는 워너가 <…비욘드>와 <…원년>을 두고 저울질하는 거라고 촌평했다. 억측으로도 여겨졌던 놀즈의 말은 사실로 드러났다. 2000년 1월, 시리즈의 근사한 재기를 위해 무리수를 감행하기로 한 워너는 폴 디니와 앨런 버넷을 <…비욘드>의 작가로, 대런 애로노프스키를 <…원년>의 작가로 각각 접촉했다. 한달 뒤엔 Batman-YearOne.com과 BatmanBeyondTheMovie.com이 도메인으로 등록됐다. 심지어 BatmanFive.com도 등록됐다. <배트맨> 시리즈의 새로운 재기를 꿈꾸던 워너는, 스크립트가 완성된 <…비욘드>와 아직 시작도 안 된 <…원년>과 애로노프스키가 개인적인 관심을 표명한 <다크 나이트 리턴즈>를 모두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로 했다.

<배트맨><배트맨 앤 로빈>(위부터)

비슷한 시기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슈퍼맨>을 떠나면서 훨씬 일찍부터 추진되던 <슈퍼맨>이 <배트맨>과 함께 원점으로 돌아오자, 워너 프로덕션의 최고운영책임자 로렌조 디 보나벤추라는 “내가 워너에 있는 동안 <슈퍼맨>과 <배트맨>을 모두 되살려놓겠다”고 했다. 보아즈 야킨이 <…비욘드>의 감독으로, <…원년>의 시나리오 작업 파트너로 코믹북 <배트맨>의 작가인 프랭크 밀러가 각각 합류했다. 상대적으로 워너의 관심을 덜 받았던 <…비욘드>쪽은 자유롭고 빠르게 일을 진행해갔지만, 애로노프스키는 또 다른 차기작 준비에, 밀러는 <다크 나이트 리턴즈> 후속 시리즈 집필에 정신이 없었다. 2001년 <…비욘드>의 스크립트가 거의 완성돼갈 무렵에도 애로노프스키와 밀러는 여전히 “쓰는 중”이라는 말만 했다. 답답한 팬들 사이에서 <슈퍼맨>을 그만둔 니콜라스 케이지가 <…원년>의 배트맨을 한다더라, 자기가 <배트맨> 시리즈를 죽이고 말았다며 후속편 출연을 거부한 조지 클루니가 또 배트맨이라더라 등 웃지 못할 소문들이 둥둥 떠다녔다. 결국에는 브래드 피트와 접촉한 애로노프스키가 <라스트 맨>이라는 자신의 SF영화를 <…원년>보다 먼저 시작할 거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부지런한 <…비욘드>를 워너가 엎어버렸다는 얘기가 따라붙었다.

워너가 <…원년>에 더 관심을 기울였던 건 <배트맨 앤 로빈>의 후속편을 이어가는 것보다 전혀 다른 출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시리즈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에도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지만, 섣불리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저울질도 계속됐다. 볼프강 페터슨과 앤드루 케빈 워커의 <배트맨 vs 슈퍼맨>에 청신호가 켜지자, 팬들은 이제 주드 로, 조시 하트넷, 애시튼 커처 등이 <슈퍼맨> 주연이라는 건지 <배트맨> 주연이라는 건지 <슈퍼맨 vs 배트맨>의 주연이라는 건지조차 헷갈려하기 시작했다. 이토록 어지러운 상황에서 12년간 워너에 헌신했던 보나벤추라가 2002년 9월3일 사임을 표한다. <뉴욕 타임스>는 이것이 <배트맨> 프로젝트와 <슈퍼맨> 프로젝트를 둘러싸고 워너 프로덕션의 대표 앨런 혼과 최고운영책임자 보나벤추라가 첨예한 갈등을 빚은 결과라고 분석했다. McG가 <슈퍼맨> 연출을 못하게 됐으니 <슈퍼맨 vs 배트맨>을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보나벤추라가 떠나자, 할 일이 없어진 페터슨도 애로노프스키의 <라스트 맨>에 출연하기로 했던 브래드 피트와 함께 <트로이> 촬영에 들어갔다.

2003년 초, 워너는 애로노프스키의 <…원년>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히면서도 <배트맨> 프로젝트의 또 다른 감독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을 데려왔다. <블레이드>의 작가 데이비드 고이어가 파트너로 연결됐다. 9개월간 젊은 배트맨, 무명의 배트맨을 번갈아 찾아 헤매던 놀란은 <메멘토> <인썸니아>의 프로듀서 에마 토머스를 영입하면서 한달 만에 주연을 결정지었다. 워너의 오랜 희망사항인 애시튼 커처를 제친 배우는 크리스천 베일이다. 스캐어크로 역에 실리언 머피, 알프레드 경에 마이클 케인, 레이첼 캐스피언 역에 케이티 홈즈, 저드슨 캐스피언 역에 비고 모르텐슨 등 주요 캐스팅을 마친 올해 3월5일, <…비욘드>도 <…원년>도 <슈퍼맨 vs 배트맨>도 아닌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는 시리즈의 명예 회복을 기원하는 워너의 지지 속에 촬영의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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