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슈퍼스타 감사용> 제작기 [1]
2004-09-15
글 : 이영진
김종현 감독이 말하는 <슈퍼스타 감사용> 제작의 여섯 고개

앞만 보고 달리기 바쁜 세상. 꼴찌에게 갈채를 보내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라. 스스로 “난 꼴찌”라고 인정하는 이가 있는지. 그러니 쉽게 잊는다. 꼴찌 또한 엄연한 경쟁자 중 한명이라는 것을. <슈퍼스타 감사용>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연전연패 각종 희귀기록을 남기며 한국 프로야구사에 오점으로 남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패전 전문투수 감사용. 5년 동안 1승15패라는 보잘것없는 성적표만을 남기고 마운드를 떠나간 사나이를 스크린으로 불러오기 위해 김종현 감독은 10년을 쏟아부었다. 그렇다고 그가 감사용의 인생역전을 그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저주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내버리지 않았던 한 젊은이의 순간을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다. 2월4일 크랭크인, 81회 촬영 끝에 9월 추석 시즌 개봉을 앞두고 있는 <슈퍼스타 감사용>. 바쁜 후반작업 일정을 벅차게 소화하고 있는 감독의 시간을 빼앗아 구술을 받고 또 그걸 재구성한 터라 세세한 촬영일지라고 하긴 힘들지만, “나는 또 다른 감사용”이라고 커밍아웃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운 배우와 스탭들에 대한 감독의 애정과 온기만큼은 전해질 것이다. / 편집자

#12

인천구장 앞

(실외/오후)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 공개 모집’이라고 써 있는 벽보 위로 드러나는 인천구장의 모습. 구장 앞 광장 한쪽, 응모하는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CUT TO. 데스크 앞에 서서 떨리는 손으로 지원서 건네는 사용. 지원서 힐끗 보더니 안경알 너머로 사용의 위아래 훑어보는 데스크 여.

데스크 여 (뒷줄을 쳐다보며) 거기 줄 좀 똑바로 서세요! (다시 지원서 보며) 직장인 야구대회 최우수 선수상? 직장야구도 야군가?

감사용 (화나지만 참는다) ….

“너 감사용처럼 할래? 스토리의 시작은 죄책감”

미리 말하지만 난 천재가 아니다. 단적으로 대학 입시에 두번이나 낙방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주간엔 극장 방문, 야간엔 비디오 가게 출입으로 일관했으나 허사였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는 인정사정없었다. 내 나이 스무살 때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 물었다. 두번이나 미역국을 먹고서 죽고 싶지 않았느냐고. 미안하지만 그런 맘은 조금도 없었다. 다른 길을 택하라는 조언도 들리지 않았다. 영화감독 말곤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세 번째 물을 먹었다면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상황이 그 지경인데 한강을 한번쯤 내려다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먹고살지 고민 한번 안 했다면 기본적인 양심조차 없는 놈 아닌가.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면 된다’는 경구를 되새겼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세상엔 그러나 죽어라 해도 안 되는 것도 있다. 군대에서 축구하면서 알았다. 1993년 입대한 난 운좋게도 자대에서 의무병 노릇을 했고, 어찌나 무료했던지 책 보는 버릇까지 생겼다. 문제는 짬만 나면 연병장에서 축구하자는 군의관들. 당시 우리 의무중대는 축구하면 ‘봉’이었고 ‘밥’이었다. 5 대 0 패배는 양호한 편에 속했다. 그런데도 군의관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상처를 꿰매는 데 익숙한 그들은 연전연패의 수치심 또한 마취시켜 봉합해버린 것만 같았다. “종현이, 니가 좀 뛰어야겠다.” 전반전이 끝나고야 지친 장교들은 출전 기회를 부여했다. 초등학교 시절, 난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였다. 달리는 것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축구는 혼자 뛴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패배가 당연한 스코어를 상기시키며, 누군가는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종현이가 완전히 감사용이네.”

그랬다. 10년 전에도 감사용은 패배의 대명사였다. 어린 시절 앞집 친구는 삼미 슈퍼스타즈 임호균의 조카였다. OB베어즈의 팬이었던 난 그 친구와 짬이 나면 공터에서 야구 시합을 벌였다. 어이없는 플레이를 펼칠 때면 “너 감사용처럼 할래?”라며 서로 놀려댔다. 나이 먹고 조금은 철이 들어서였을까. 군대에서 ‘감사용’이라는 놀림을 듣는 순간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공연히 미안해졌다. 그 사람이 야구를 그렇게 못했던가. 놀림감이 되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형편없는 선수였나. 그렇다 해도 그럴 수 있나.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감사용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1997년의 어느 날도 그랬다. 동료와 길 가던 도중에 감사용 이야기가 또 튀어나왔고, 이번엔 그냥 넘기지 말자 싶었다. 감사용 스토리의 시작은 죄책감이었다.

#25

철강소 작업장

(실내/오전)

INSERT (F.I) 원경으로 보이는, 곳곳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인천 공업단지.

오 과장 … (전략) 삼미 특수강의 귀염둥이 감사용군이… 당분간 우리와 함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략)… 하지만 슬픈 일이 있으면 기쁜 일도 있는 법! 우리의 재간둥이 감사용군이 삼미 슈퍼스타즈 프로야구팀에 파견근무를 나가게 됐습니다. 모두들 축하해 주십시오.

수소문 끝에 찾은 실제 감사용, 본격적인 프로젝트 돌입

1981년의 스포츠 신문을 샅샅이 뒤진 끝에 감사용 관련 기사를 달랑 하나 발견했다. ‘직장야구인, 프로야구 선수 되다.’ 감사용 선수가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난 뒤 난 더욱 흥분하고 떠들었다. 마침 윤상오 프로듀서가 <로드무비> 끝나면 같이 준비해보자며 시나리오를 써보라고 했다. 이제 본인을 만나 허락을 받기만 하면 되는구나. 다 된 밥인 줄 알았으나 오산이었다. 가짜 협조 공문을 만들어 KBO를 방문했으나 감사용 선수의 현주소는 없었다. KBO에서 건네받은 삼미 슈퍼스타즈 연락망을 통해 그의 행적을 물었지만 다들 갸우뚱이었다. 삽 들고 별 따기였다. 허탕을 만회라도 하듯 밤엔 시나리오를 끼적였으나 온갖 잡념이 끼어들어 방해를 놓았다. 불행히도 감옥에 가 계시면 어떡하지. 영화는 그럼 덮어야 하는 건가.

△ 배우의 몸에 장착해서 역동적인 액션을 잡아내는 도기캠 바디마운트(doggie cam bodymount)를 다루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촬영스탭 도노반.

어떤 범죄든 저지른 자에겐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제서야 털어놓는다. 연락처를 알지 못해 낙담해 있던 차에 <로드무비> 연출부의 한 동료가 자신이 알고 지내는 해병대 출신 후배를 통하면 그의 거처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불법 신원조회라. 이왕 고백한 거 솔직해져야겠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혹의 미끼를 받아 물었음을. 결국 감사용 선수가 창원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됐다. 방방곡곡, 팔도 추적의 수고를 덜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그의 이름이었다. 감사용, 그 이름은 전국에 딱 한명이었다. 당시 감사용 선수는 창원의 은아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내 시나리오 여자주인공의 이름도 은아. 누가 보면 별것도 아닌 것 갖고서 호들갑 떠네 하겠지만, 정말이지 그땐 운명이다 싶었다.

첫 대면에서부터 본심을 내보일 순 없었다. 누군들 서울에서 갑자기 내려와 당신 이야길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하면 믿겠는가. 친해지는 게 필요했다. 첫 만남에서도 그냥 영화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삼미 슈퍼스타즈에 관한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말을 슬쩍 흘리긴 했다. 감사용에 관한 영화라곤 안 했다. “내가 뭐 한 게 있냐”며 거부반응을 보일 게 분명했다. 그때부터 경상남도로 헌팅가는 일이 있으면 꼭 안부를 전했다. 행선지가 창원과 가까운 부산일 때는 가끔씩 들러 프로야구 초창기 에피소드를 듣곤 했다. 이실직고했던 건 <로드무비> 조감독을 끝내고 난 뒤였다. 돌아온 답은 “나를 꼭 그렇게 해야 하나?” 흔쾌한 긍정은 아니었지만, 결사반대 부정도 아니었다. 2001년 12월. 그제야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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