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슈퍼스타 감사용> 제작기 [2]
2004-09-15
글 : 이영진

#51

인천구장

(실외/오후)

INSERT (F.I) 원경으로 보이는, 곳곳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인천 공업단지.

침울한 삼미 덕아웃. 선수들 풀이 죽어 있다. 화가 난 양승관, 분을 못 참았는지 앞에 있는 물통을 차버린다. 오문현, 감사용 등 투수들 앞으로 쏟아지는 물.

양승관 짜증나서 못해먹겠네. 지는 것두 이젠 지겹다. 씨발… 무슨 매 게임마다 10점씩 줘. 이런데 어떻게 우리가 따라가냐구.오문현 너 나 들으라고 그러는 거야? 난 뭐 맞구 싶어 맞는 줄 알아? 상대팀 타자들이 잘 치는 거지. 나도 너네 같은 타자들이었으면 이러지두 않아. (중략)해설자 (O.S) 아… 삼미 경기를 포기하는군요. 감사용 선수. 첫 등판인데요. 패전처리로 나가는군요.

“감독이 말로 못하면 누가 설명해줘”, 완벽주의자 이범수와의 촬영 시작

△ <퇴마록>에서 매니저 없이 의상을 직접 들고 다니던 단역배우와 감독의 호통을 무작정 견뎌야 했던 연출부 막내가, <슈퍼스타 감사용>에선 주연배우와 감독으로 만났다.

시나리오 완고를 내기까지 1년 반. 서운한 게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처음부터 든든한 지지자 역할을 해줬던 상오 형은 <싱글즈> 제작에만 몰두했고 난 질투심으로 불타올랐다. 신경을 너무 안 쓰는 것 아니냐고 따지면 질책으로 응수했다. 몇번이고 고쳐 쓴 소중한 장면들에 대해 상오 형은 에피소드 묘사에 지나치게 빠져들었다며 감사용 스토리에 좀더 집중하라고 했다. 난 매번 그래, 그래, 납득을 하면서도 돌아서면 속이 쓰려왔다. 막상 촬영에 들어가자 신인감독에게 부담주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준비기간의 그는 까다로운 시어머니였고 혹독한 조련사였다. 시나리오 수정본을 내놓고 나면 가슴은 콩닥콩닥. 그때마다 난 채점을 기다리는 수험생이 되었다.

2004년 2월4일. 첫 촬영을 떨지 않고 무난히 치를 수 있었던 것은 무수한 단련 때문인지도 모른다. 크랭크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린 곧바로 부산 구덕야구장으로 내려갔다. 스케줄상 야구장면을 먼저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감사용 역의 (이)범수 형은 <안녕! 유에프오> 촬영을 끝내고 나서 휴식 겸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였다. 잠깐 본 왼손 투구 폼은 만족스러웠으나, 리딩을 얼마 하지 못한 채 촬영을 진행해야 한다는 게 찜찜했다. 범수 형이 촬영현장에서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풍문을 들어왔던 나로선, 1년 전 “딱 나한테 맞는 역이네”라는 의욕을 일구었던 그를 상기하며 일방적으로 끌려가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 뭣보다 그에게 감독으로 보이고 싶었다. 이유없이 때려도 대들지 못할 대학 3년 후배이자 <퇴마록> 때 형의 중요 부위에 베드신용 공사를 해주던 연출부 막내라는 과거는 잊어야 했다.

그러나 팽팽한 기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옹고집이 아니라 준비가 철저한 것뿐이었다. 촬영날 자신의 대사는 물론이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설정해오는 형에게 난 보기 좋게 한방 먹었다. 피하지 못할 스트레이트였다. 여기서 리와인드. “이 장면에서는 웃음기를 빼주세요.” “난 살짝 웃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왜 그래?” “그냥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이유를 말해줘야지.” “그건 말로 하긴 좀 그런데요.” “감독이 말로 못하면 누가 설명해줘?” 토씨 하나를 바꾸더라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형 앞에서 여지없이 쪼그라들었다. 그날 이후 범수 형 촬영분량은 2배의 예습을 해가야 했다. “형, 단역배우 할 때 힘들었잖아요. 그 감정으로 가보죠.” 하고 싶은 말은 돌려서 말하지 않고 속시원히 털어놨다.

#62

구단버스 안

(실내/낮)

행복한 표정으로 달리는 버스 밖을 내다보는 사용. (신문 INSERT) 박철순 쾌조의 19연승 달성… 20연승 제물은 꼴찌 삼미가 될 듯.

김경남 (신문을 보며) 박철순… 아주 승승장구네.이철성 시팔, 당연히 박철순이 이길 것처럼 써놨잖아. 아직 경기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한데.이 코치 야… 문현아, 니가 박철순 경기 선발 나갈래?

이 코치의 “박철순”이란 말에 표정 바뀌는 선수들….

“거길 아무나 앉는 줄 알아?” 냉기 도는 주연 남녀

△ “내가 그때는 너무 지나쳤다.” 이범수는 불호령을 내린 얼마 뒤에 후배 윤진서에게 먼저 다가가 ‘미안하다’는 사과를 건넸다고.

야구도 팀워크이고 영화도 팀워크이다. 극중 감사용과 인천구장 매표원인 박은아의 데이트 장면 촬영은 그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줬다. 범수 형과 윤진서는 극중에서 연인 사이로 나온다. 사전 리허설이 부족해서였는지 배우들끼리는 서먹했다. 10년 이상이나 되는 경력 차이도 그렇고 둘 다 낯을 가리는 스타일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첫 데이트 장면에서 원하는 느낌이 나오지 않는 건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어색하지만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하는데 그저 어색하기만 했다. 사고 발발은 몇번의 테이크 끝에 진서에게 모니터 확인하라고 한 얼마 뒤였다. “거길 아무나 앉는 줄 알아?” 진서가 감독 의자에 앉은 걸 본 범수 형은 말릴 틈도 없이 새까만 후배를 꾸짖었고, 난 눈앞이 캄캄해졌다. 막 연애를 시작해야 할 두 사람, 이제 어떡하나. 냉기가 걷히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던 듯싶다.

그러고보니 진서를 다독이진 못하고 못할 짓 많이 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야구공을 집어들고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이야 테이크를 많이 갈 수밖에 없었다. 후반부에 은아가 폭죽이 터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을, 관객이 보면서 이 장면을 떠올려줬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배우의 표정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야 해서 똑같은 걸 여러 번 주문했었다. 진서도 알 것이다. 고작 2초 정도 나오는 공중전화 박스 인서트 컷을 스무번 넘게 찍었던 날 진서는 내가 드디어 미쳤나보다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다들 왜 계속 가느냐고 물었지만, 난 설명없이 ‘다시’만 반복했다.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 진서로선 고문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촬영감독에겐 나중에 털어놓긴 했지만, 제 궤도에 오른 뒤에 현장은 시작보다 긴장이 떨어져 있었고, 난 나대로 심통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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