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애니메이션의 작가주의, 오시이 마모루의 <이노센스> 해부 [3]
2004-10-12
글 : 김도훈

동서양의 경구를 모조리 모은 개인적인 잠언집

관객과 비평가들의 가장 큰 불만은 “자막읽기에 급급해서 대체 스토리를 따라갈 여지가 없다”라는 사실이었다. <할리우드 리포터>가 “<이노센스>는 주인공들이 밀턴, 데카르트, 공자와 성경을 인용하며 이야기하는 매우 철학적인 영화다. 관객은 자막을 따라가기가 힘에 부칠 수도 있다. 드림웍스가 이 작품을 더빙한다면 영화를 이해하는 게 약간은 쉬워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던졌던 조언은 일리가 있다. “우리의 신과 희망이 과학적 현상이라면 사랑 또한 과학현상이라고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라는 빌리에 드 릴라당의 1886년 SF소설 <미래의 이브>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된 영화는, 오시이 마모루가 끌어온 온갖 경구로 가득 차 있다. “시저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저가 될 필요는 없다”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잠언, “자신의 얼굴이 비뚤어져 있는데 거울을 탓해서 뭐 하나”라는 고골리의 잠언이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원전을 밝히지 않은 채 툭툭 던져지며, 소설 <장 크리스토프>의 대사나 부처의 설법집, 공자의 잠언, 결국에는 데카르트에 대한 인용들까지 등장한다. “거의 모두가 인용된 것이다. 그러한 말들은 내가 이 작품을 한다고 결정한 뒤 내가 모아둔 말을 엄선한 것이다. 전부, 이 작품과 깊게 관련되어 있는 말이니까. 하지만 <이노센스>는 그런 대사 중 한두개를 공감한다고 전부를 이해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는 속도와 영화의 속도를 맞추는 것보단 캐릭터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오시이 마모루의 말처럼, <이노센스>의 대사는 오시이가 개인적으로 아끼는 동서양의 경구들을 모조리 끌어와 만들어낸 잠언집이다. 이런 개인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IG프로덕션과 드림웍스의 거대 자본을 끌어온 오시이 마모루의 시도는 모험이었던 것일까. “지금까지의 작품들 중에서 최고의 작품, 가장 폭이 넓은 작품으로 완성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는 오시이 마모루의 간결한 자부심은 풀기 힘든 퍼즐처럼 느껴진다.

오시이 마모루의 가장 순수한(Innocent) 작품 <이노센스>(Innocence)

다시 스토리를 살펴보자.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던 바트는 로봇 제조회사 로커스 솔루스로 침투해 들어간다. 그리고 (모두들 기대했듯이) 쿠사나기 소좌와의 랑데부가 짧으나마 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바트는 <공각기동대>에서와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쿠사나기 소좌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준다. 그런 그를 향해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이라고 무심하게 던지는 쿠사나기 소좌. 이 대사는 마치 오시이 마모루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잠언을 ‘나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존재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승화시켰던 <공각기동대>의 철학은 여기서도 여전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이 아니다. 인간. 그것은 한계에 왔다. 인간이 바닥까지 닿은 이 시대에 더 넓은 시야의 윤리적인 관념에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지금 이 세계를 습격하고 있는 불안,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봤으면 한다”라는 오시이 마모루의 이야기처럼, <이노센스>는 여전히 육체와 인간에 대해 명징한 화두를 어렵사리 던지는 영화다. “오시이 마모루는 문화로서의 애니메이션을 거부한 감독이다. 그는 현재 단순한 애니메이션 작가로부터의 일탈을 꾸미고 있다”는 <카이에 뒤 시네마>(일본판)의 오래전 이야기도 되감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평가는 <이노센스>에 와서야 처음으로 완벽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패트레이버> 극장판이 기실은 애니메이션 엘리트 집단인 ‘헤드기어’(Head Gear)의 공동작품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공각기동대>가 (오시이 마모루 스스로 일탈을 꿈꾸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작품이라면, 오시이 마모루가 처음으로 혼자 각본을 집필한 <이노센스>야말로 어떠한 도움없이 창조해낸 첫 번째 ‘순수한(Innocent)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이다. 그는 지난해 있었던 한 인터뷰에서 “영화란 것은 오리지널 스크립트에서부터 스스로 만드는 것을 보여줬을 때 최종적인 위력이 있는 것이다. 그걸 해낸 것이 고다르나 데이비드 린치 같은 특수한 인간이다. 나는 일본에서 이렇게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이지만, 그것에 가까운 뭐라도 만들어내고 싶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만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아마도 상업애니메이션 세계에 작가주의란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이노센스>야말로 그 단어를 순수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희귀한 사례가 될 것이다.

오시이 마모루의 음악적 동지, 가와이 겐지

전뇌공간을 구현하는 음악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히사이시 조라는 충실한 음악적 파트너가 존재하듯이 오시이 마모루에게도 가와이 겐지(川井憲次)라는 든든한 음악적 동지가 있다. <란마 1/2>의 음악감독이었던 가와이 겐지는 오시이 마모루의 87년작 <Twilight.Q2-미궁물건 FILE538>으로 첫 공동작업을 시작했고, 이후 극장판 <기동경찰 패트레이버1, 2>에서 세기말 도쿄의 스산한 분위기를 잘 살려낸 음악으로 찬사를 받았다. 그 이후 가와이 겐지와 오시이 마모루는 <아발론>과 <공각기동대>를 지나 <이노센스>까지 일괄적으로 함께 작업함으로써 궁합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감독-작곡가의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공각기동대>에서 가와이 겐지는 일본 전통민요의 보컬과 타악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거기에 현대적인 현악연주를 삽입하는 방식으로 무국적성의 전뇌공간을 완벽한 짜임새로 구현하고 있다(‘일본 전통음악과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의 조화’는 이전에도 게이노 야마시로구미가 오토모 가즈히로의 <아키라>에서 시도한 적이 있다). <이노센스>의 음악은 <공각기동대>와 큰 차이는 없으나 좀더 화려하고 규모가 큰 현악과 기계음이 반복적이고 다층적으로 시도되고 있는데, 이는 작품의 호사스런 비주얼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바트가 등장하는 장면에 수시로 흘러나오는 재즈음악과 극적인 대칭을 이룬다.

가와이 겐지는 일본 호러영화의 거장인 나카다 히데오와의 협력관계로도 유명하다. <링> 시리즈와 <유리의 뇌> <검은 물 밑에서>에서 그가 창조한 음악은 나카다 히데오의 괴담들에 소름끼치는 긴장감을 더한 일등공신 중 하나였다. 현재 그는 송강호, 유지태 주연의 한국영화 <남극일기>의 음악을 작곡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가 만들어낼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남극의 목소리”는 내년 초 <남극일기>의 개봉과 함께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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