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체 게바라의 젊은 날,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미리보기 [3]
2004-10-13
글 : 박혜명

1952년 6월8∼22일 산 파블로, 페루

“이런 숭고한 대의를 대변하기엔 하찮은 존재들이지만 나와 그라나도는, 특히 이번 여행을 통해, 불안정하고 가공된 남미대륙의 분열이 완벽하게 허구임을 다시 한번 강하게 믿게 됐습니다. 우리는 단일한 메스티소 민족으로 합쳐져야 합니다. 멕시코에서부터 마젤란 해협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분명히 인종적 유사성을 지닌 단일민족입니다. 이제 이 편협한 지역주의를 걷어내자는 뜻으로 페루와 하나된 라틴아메리카를 위해 건배를 올리고 싶습니다.”

게바라와 그라나도가 3주 동안 머무른 페루의 나환자촌은, 손으로 만져서는 절대 옮지 않는 나병에 걸린 남미 각지의 사람들이 가족들로부터 버림받고 고립된 공간이었다. 로케이션 헌팅차 그곳을 방문한 살레스 일행은 한때 그곳에서 지냈던 사람들로부터 “우리에 대한 영화를 찍을 거라면 우리가 직접 출연하고 싶다”는 희망사항을 접수했다. 나환자촌 거주자 100여명 가운데 90여명이 현지인으로 구성됐다. 리얼리즘의 포획을 위해 비전문배우들과의 작업을 환영하면서도, 살레스는 그들을 전문배우들과 조화시키는 일에 늘 그렇듯 어려움을 겪었다. “이럴 땐 우리끼리 공유되는 무언가가 먼저 있어야만 한다. 우린 나환자촌에 도착해 바로 촬영에 들어가지 않고, 즉석 음악공연과 축구를 먼저 했다.” 현재의 남미대륙에다 어떤 시대적 분위기도 가공해 넣지 않은 살레스의 공간 안에서 백인에 가까운 두 배우들이 살갗 짙은 남미인들과 어울리는 모습. 역시 백인에 가까웠다는 게바라와 그라나도를 베낀 이 나환자촌의 이미지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이루는 다른 어떤 모사들보다도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진실과 가장 가까운 힘을 발휘한다.

6월14일, 게바라의 생일. 월터 살레스는 내내 아껴두었던 극적 순간을 이 부분에 할애한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정상인들(의사들, 간호사들, 수녀들) 앞에서 게바라는 쑥스러워하면서도 곧 당당한 눈빛으로 자신이 꿈꾸는 남미대륙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카메라는 살레스 자신이 게바라 혹은 게바라를 연기한 베르날에게 깊이 감동받은 시선 그대로 움직인다. 연설을 끝낸 뒤 게바라는 아마존 강에 뛰어들었다. 게바라는 그 강이, 이 고립된 공간 안에서 또다시 나환자들과 정상인을 가르는 이중 차별의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는 천식으로 가쁘게 넘어가는 숨을 챙기며 나환자들이 있는 강 건너 땅으로 헤엄쳐갔다. 마지막 촬영에 해당하는 이 장면은 사흘 만에 완성됐고, 마침내 “컷” 사인을 받은 베르날이 육지로 채 나오기도 전에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촬영팀이 한 사람씩 차례로, 약속이나 한 듯 아마존 강에 몸을 던졌다. 살레스는 말했다. “이 작은 여행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하나의 대륙, 하나의 민족’이라는 게바라의 생각은 유토피아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우린 모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은 아르헨티나에서, 일부는 페루나 칠레 그리고 브라질에서 왔다. 우린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의식하고 있었고 늘 합의에 도달한 것도 아니었다. 여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게바라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고, 우리 사이에 놓인 국경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허물기 쉬운 것임을 깨달았다. 이 영화를 찍기 전까지 나는 브라질 감독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라틴아메리카의 감독이다.”

“이것은 놀라운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냉소적인 한 사람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적어도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다. 이것은 서로 닮은 희망과 꿈을 가진 두개의 삶이 같은 방향으로 달려갔던 한때를 어렴풋이 엿본 것이다.” -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즈-남미 여행에 관한 기록>(The Motorcycle Diaries-Notes On A Latin American Journey) 중에서

영화 중반쯤부터 애타게 궁금해졌던 두 젊은이의 애초 여행 목적은, 그들이 책으로만 알고 있었던 미지의 대륙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배낭여행에 다름 아닌 목표였다. 그들은 최종 목적지가 될 베네수엘라에서 여자들에 둘러싸여 맥주와 와인을 즐길 꿈을 꿨었다. 게바라는 그라나도에게, “여행이 지겨워지면 이 호수에 돌아와 병원을 세우고 여기 오가는 모든 사람들을 치료해주자”고,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 사이를 지나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9개월의 긴 여정이 끝났을 때 그들은 베네수엘라에서 샴페인을 터뜨리지도 않았고, 호숫가에 병원을 차리지도 않았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총 없는 혁명? 절대 성공 못해”라고 말했던 한 청년이 7년 뒤 쿠바혁명을 성공시키게 된 먼 근원을, “진정한 혁명은 사랑이라는 커다란 감정으로부터 이끌어진다”고 했던 그의 말의 뜻을, 그 자신이 진정한 혁명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까닭을, <필름메이커>의 말대로 “논쟁이나 당파적인 대화나 유머 빠진 역사적 재현을 통하지 않고도” 이해시킨다. 그런 점들을 우리보다 먼저 깨닫고 영화를 만든 월터 살레스 감독은 “하나의 대륙, 하나의 민족”이라는 게바라의 말이 바로 이 순간 남미와 남미인들에게까지 유효한 믿음이라고, 현재인지 과거인지가 불분명한 시제를 통해 말한다. 자신의 사적 신념이 되어버린 꿈을 주장함에도 살레스의 태도는 강압적이지 않다. 오직 여행 안에서 인간의 변화를 끌어내오느라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순진해지긴 했지만,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지금도 이상에 목말라 있는 이들에게나 그것이 굳이 필요치 않은 부유한 행인들에게나, 오염되지 않은 깨끗하고 깊은 우물로 받아들여질 여행임에 분명하다.

월터 살레스 감독 현지 인터뷰

“이 영화는 마치 재즈처럼 각본을 바탕으로 즉흥 연출되었다”

기대했던 대로, 월터 살레스 감독은 온몸에 선한 인상을 풍기며 토론토 파크하야트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섰다. 시종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밝은 태도를 천성으로 타고났는지, 작고 갸름한 얼굴에 보기 좋게 잡힌 주름 자리가 아주 오래돼 보였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나는 브라질(Brasil)이란 단어에 결코 s 대신 z를 쓰고 싶지 않다”고 단호히 말했던 살레스는, 기본적으로 모든 질문에 성실히 응하면서도, 영화 자체보다는 남미 문화에 관련된 질문에 더 많은 열성을 보인 남미 감독이었다.

-영화는 어느 정도 원작에 충실했으며, 어떤 부분에서 극적인 변형을 가했는가.

=우선 각본은 세 가지 원작에 충실하게 쓰여졌다.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쓴 <나의 첫 대 여행>(Mi Primer Gran Viaje)과 <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즈-남미여행에 관한 기록>, 알베르토 그라나도의 여행일지인 <체와 함께한 남미여행> 등이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책은 정말 다르다. 에르네스토의 책은 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 쓰여졌기 때문에 더 다듬어져 있고, 젊은 이상주의자로서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남미대륙을 실제로 발견해가는 과정에 변하는 자신을 보여준다. 반면 알베르토의 책은 바로 그 자리에서 쓰여진 것이다. 훨씬 생동감이 있고 당시에 일어났던 일을 훨씬 섬세하게 묘사한다. 예를 들어 에르네스토가 아마존 강을 건너는 대목에 대해 에르네스토 자신은 한 단락으로 쓰고 있지만 알베르토는 아주 길게 그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 속에 가미된 극적인 설정들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알아차리기 어렵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 세권의 책에 충실하게 만들어졌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과 로드리고 드 라 세르나는 부분적으로 이 영화가 즉흥 연출로 만들어질 거라는 점을 알고 있었나.

=몰랐다.

-왜 말해주지 않았나.

=기대하게 만들려고 그랬다. (웃음) 일단 그들은 준비가 잘돼 있었다. 시나리오 리허설뿐 아니라 영화에 필요한 남미 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준비를 거쳤다. 50년대의 아르헨티나 역사와 영화, 히트곡들에 대해, 50년대의 칠레와 페루에 대해, 그리고 잉카 제국에 대해 미리 세미나도 거쳤다. 자신들의 캐릭터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륙에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들은 상황에 더 잘 맞춰갔다. 그렇게 길을 따라 즉흥성을 발휘하려면 기본적으로 각본이 아주 좋아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 각본의 구조가 기본적으로 탄탄해야 그것을 바탕으로 영화를 확대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재즈와 비슷하다. 재즈는 기본적으로 핵심이 되는 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주제의 주위를 돌면서 얼마든지 변형을 가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마지막엔 항상 핵심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각본과 영화의 즉흥성과의 관계다.

-영화는 두 사람이 무작정 짐을 싸서 떠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주인공들에 대해 사전 설명을 덧붙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바로 보통 전기를 다룰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방식이다. 이 영화는 그런 식의 의도를 담고 있지 않다. 단순히 한 인물의 어떤 과거를 제시함으로써 그가 나중에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가를 이해시키려는 게 목적이다. 인물에 대한 설명은 주어진 디테일을 갖고 알아가야 하는 게 이 영화가 제시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에르네스토가 사는 집이나 그의 부모님이 입고 있는 옷을 살펴보면 에르네스토가 그럴듯한 중산층 가정을 배경으로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그런 사회적 지위를 넘어서고 싶어하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 방식이 사람들에게 익숙하지는 않겠지만 나에겐 흥미롭다.

-음악이 정말 아름답다.

=아르헨티나 영화음악가 구스타보 산토라차가 만들었다. 그는 지난 몇년 동안 직접 남미를 두루 다니면서 음악을 조사하고 수집, 보관해온 사람이다. 그는 남미 악기의 거의 대부분을 연주할 줄 안다. 이 영화음악에 쓰인 악기도 80%는 그가 직접 연주한 것이다. 다 비슷하게 들려도 남미 음악은 국경 하나만 넘으면 악기가 달라진다. 따라서 영화음악도 여정을 따라 악기를 달리한다. 산토라차는 정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음악가다.

-로버트 레드퍼드가 이 프로젝트를 제안했다고 알고 있다. 게바라의 일생 중에서도 하필 이 여행기를 그가 제안한 건가.

=우선 레드퍼드는 굉장히 정치적인 사람이다. 남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선댄스 인스티튜트를 통해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쿠바 등 남미 국가들에 관한 세미나도 열었을 만큼 몇년간 그 분야에 깊이 관여해왔다. 레드퍼드는 남미대륙에 관해 우리 남미인들만큼 열정을 갖고 있다. 그는 이 다이어리가 영화화될 거라고 생각한 동시에 영화화돼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 영화가 남미 스페인어와 남미 출신 배우들로 만들어진다는 점에도 처음부터 동의했다. 이 영화를 할리우드 배우들이 찍는다고 상상해보라. (웃음) 우린 모두 낙담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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