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 단 몇장의 비주얼, 까짓것 얼마 들겠어?
마케팅팀과 포스터 디자이너, 사진작가가 수십번의 회의를 거쳐 만든 포스터 컨셉과 시안대로 모두가 하나되어 움직이는 이날을 위해, 배우들은 스케줄을 비우고 영화사들은 적지 않은 예산을 배정한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인건비다. 영화사가 포스터 촬영을 위해 사진작가 섭외비로 들이는 돈은 보통 1500만원에서 2천만원선. 디자인 회사쪽에는 당연히 그보다 높은 비용을 지불해 파트너십을 맺는다. 여기에 포스터 촬영만을 위해 세트와 소품을 구비하다보면 예산은 아주 쉽게 기천만원에 이른다. 영화 <주홍글씨>는 ‘고급스러움’이라는 티저 포스터의 비주얼 컨셉을 위해 한석규, 이은주, 성현아, 엄지원 등 네 배우에게 시가 1억원어치에 달하는 의상과 액세서리를 끼얹은 사례다. 고수가 한손에는 권총을 든 채 피투성이로 쓰러질 듯 처참히 서 있는 영화 <썸>의 포스터는 자동차 사고 현장을 연출하려고 진짜 자동차를 부수고 뒤집어서 갖다놓고, 강렬한 분위기를 덧입히고자 살수차를 동원해 비를 뿌렸다. <장화, 홍련>에서 피투성이 두 소녀가 앉아 있던 의자는 시가 800만원짜리다. 이런 비싼 포스터를 심지어 티저와 메인으로 구분해 제작하는 경향은 이미 굳어진 것이다. 관객의 시선과 호감만 잡을 수 있다면, 궁색하게 굴어 무엇하랴.
촬영 - 장소·의상 협찬받고, 그럼 찍기만 하면 되지?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거나 근사한 카페 정도를 섭외해 촬영한다면 상대적으로 무난한 축에 속할 수 있다. <주홍글씨>의 경우처럼 기천만원씩 하는 의상을 협찬받아오는 일도 패션쪽과 작업할 기회가 많은 사진작가의 인맥을 활용하면 해결할 수 있고, 실제로 <주홍글씨>의 마케팅팀은 그렇게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공공 기물을 사용한다든지 정부 관련 조직을 상대하게 되면 사정은 종종 예상을 뛰어넘는다. <라이터를 켜라>가 그런 사례다. 영화 속 상황이 기차 안에서 벌어진다는 연결고리를 찾아 포스터 비주얼에도 기차를 쓰려고 했던 이 제작팀은, 촬영 허가를 받으려고 온갖 관계자들을 만나다 결국 PD가 철도청장까지 접촉하고 나서야 기차를 ‘배경’으로 삼을 수 있었다. 신은경, 신현준, 김영호가 출연했던 <블루>도 포스터 제작 길목에서 상상 못한 장애를 만난 케이스다. 세 배우에게 깔끔한 해군제복을 입히고 나란히 세워 촬영하고 봤더니, 제복이라 그런지 무슨 공익광고 포스터 같았다. 마케팅 컨셉으로 잡은 ‘해양액션블록버스터’에 맞지 않게 정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반항기라도 보여주자는 심산으로 단추도 몇개 풀고, 모자도 삐딱하게 씌워 사진을 찍고 나니까 해군쪽에서 난리를 부렸다. 제복은 이렇게 입는 게 아니다. 이렇게 입으면 큰일난다. 이런 사진 절대 나가면 안 된다. 영화촬영 자체가 해군쪽의 상당한 자문과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던 터라 포스터 컷도 그쪽이 OK를 내주지 않으면 쓸 수 없었다. <블루> 포스터의 세 배우가 ‘어 퓨 굿맨’들 처럼 단정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이다.
총 7회에 걸쳐 포스터를 찍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또 다른 경우다. 이 작업에 남다른 의욕을 품고 있었던 이재용 작가는, 배우 가운데 한명인 이영진을 물속에서 찍고 싶다고 의견을 냈다. 마술피리의 오기민 대표는 한사코 반대를 했지만 그는 그렇담 수조도 직접 만들겠다고 우겼다. 어렵사리 허락을 얻어낸 이재용 작가와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신인배우는 하루종일 물과 고된 작업을 했다. 이때 찍은 사진도 결과적으로 쓰이긴 했지만, 모두를 만족시킨 컷은 물 밖에서 찍은 7회차 촬영 때 나왔다. 칠판 앞에 선 세 소녀의 메인 포스터가 그날 얻어진 컷으로 만들어진 시안이다. <썸>의 포스터 촬영 땐 리얼리티를 위해 배우가 다리를 자청해 맞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한 마케팅 관계자는 “다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가는” 포스터 촬영현장의 고충을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배우 다리 맞고, 차 갖다가 엎어놓고, 비 뿌리고 피 뿌리고. 그런데도 현장에서 사진 안 나오면 사람 미치지. 진짜. 사람 죽어요. 그런 건 아마, 모든 포스터 사진 촬영이 다 그럴 거예요.”
사진 디자인 - 고생한 사진, 오리지널리티 살려야지?!
포스터 제작에서 또 하나의 관건은 디자이너와 사진작가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요즘처럼 순수예술 작업을 병행하는 사진작가들을 섭외하는 것이 대세인 경우 특히 그렇다. 사진작가들도 자기가 찍은 컷이 100% 완벽하게 보존돼 포스터에 얹히리라곤 예상하지 않겠지만, 마케팅 관계자들과 디자이너들 모두 “안 만지는 구석이 없다”고 입을 모을 정도로 포스터 컷은 디자이너 본인이 아니면 알아채기 어려운 수준까지 세밀한 재작업이 이뤄진다. 배우들의 몸매를 다듬어주는 일은 기본에 속한다. 한 홍보 관계자는 이를 “컴퓨터로 경락한다”고 우스갯소리처럼 표현한다. 컨셉상의 수정작업 또한 전제한다.
<주홍글씨>의 메인 포스터 컷에 등장한 한석규와 이은주의 파란 눈도 디자인 작업을 거쳤고, 두 배우간의 거리도 오리지널 컷보다 훨씬 가깝게 조정됐다. 여러 컷에서 좋은 요소들만 조합하는 경우는 더 많다. 이 컷에서는 이 배우의 표정이, 저 컷에서는 저 배우의 표정이, 혹은 A컷의 몸통 부분과 B컷의 팔다리와 C컷의 얼굴을 오려 붙여 사진을 “프랑켄슈타인”으로 만들기도 한다고 한 디자이너는 웃으면서 설명했다. 사진작가의 입장으로선 결코 유쾌한 일이 못 되겠지만, 포스터 사진작업을 많이 한 작가들일수록 포스터 사진의 상업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때문에 작업에 큰 문제는 없다는 게 디자이너들 대부분의 다듬어진 의견이다. 한 디자이너는 “사진작가의 몫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포스터 작업은 서로서로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포토그래퍼 혼자 만족하려면 개인 작업을 해야 하는 게 맞다”고 솔직히 말하기도 했다.
로고 - 글씨체? 컴퓨터에서 고르면 되지?
포스터의 숙명이 그 영화를 다른 수많은 영화들과 차별되도록 만드는 도구라면 그 핵심은 로고, 즉 제목에도 있다. 이 부분에 관한 한 현재 한국영화 포스터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주요 포스터 디자이너들의 입장은 한결같다. “가능하면 내부에서, 본인이 직접 소화하려고 한다.” <챔피언>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등의 경우처럼 서예가에게 맡겨질 때도 물론 있고, 캘리그래퍼나 CI업체 등에 의뢰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가건, 일필휘지로 쓴 몇몇 시안들을 놓고 자모음까지도 좋은 것들로만 조합을 하건, 기존 서체에 변형을 가하건 포스터에 얹히는 영화 로고는 대부분 디자이너의 손에서 나온다. 디자이너가 영화사와 디자인 계약을 맺음과 동시에 가장 먼저 작업에 착수하는 로고는, 포스터와 함께 영화의 또 다른 얼굴이 된다. 무엇보다 로고는 그 영화가 가진 장르적 성격을 가장 잘 대변한다. 액션영화는 주로 굵직한 고딕체로, 드라마나 멜로영화는 서정적인 펜글씨체로, 아기자기한 코미디영화는 그 성격대로 로고가 표현된다. 때로 굵은 로고는 영화의 규모와 상관지어지기도 한다. 영화가 관객에게 작게 비쳐질까 고민이 많았다는 <싱글즈>의 마케팅팀은 포스터의 로고를, 포스터랑 안 어울린다는 디자이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주 굵게’ 써달라고 간청했다 한다. <범죄의 재구성> 포스터를 만족스러운 작업으로 기억하고 있는 스푸트닉의 김상만 실장은 포스터의 여러 요소 가운데서도 로고를 특히 맘에 들어한다. “감독이 영화를 60년대 B급 액션 스타일로 만든다고 해서 일부러 그 시대를 연상시키는 촌스러운 글씨체를 갖고 로고 작업을 했다. 처음엔 주위에서 촌스럽다고 불만이 많았는데, 나중에 포스터에 얹어놓고 보니 그게 제일 그럴듯했다. 속으로, 거봐, 내가 맞았지, 했다.”(웃음) 사진만큼이나 강렬했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포스터의 흘림체 로고도 ‘꽃피는 봄이 오면’의 김혜진 실장이 직접 썼다. “가독성이 떨어지는 글도 읽힐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 같다”는 것이 김 실장의 자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