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역도산> 미리 보기 [1] - 송해성 감독이 말하는 배우 설경구 ①
2004-12-09
글 : 김도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설경구가 역도산이 되기까지, 송해성 감독이 말하는 배우 설경구
지하에 묻혔던 역도산이 드디어 입을 연다. 그의 기일인 12월15일에 개봉하는 <역도산>은 충무로 안팎에서 하반기 최대 화제작으로 꼽히는 영화. 일본에서 천황 다음 가는 영웅으로 꼽히는 전설의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사후 41년 만에 한국과 일본의 배우와 스탭들이 함께 스크린으로 불러들였다는 점에서 이 합작 프로젝트에 대한 궁금증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역도산을 연기한 설경구에 대한 관심이 가장 뜨거울 것이다. 뜨거웠던 8월, 촬영을 끝낸 뒤 링과 싸우며 분노를 내뿜고 증기 기관차처럼 뛰어야 했던 지난 시간에 대한 설경구의 토로(<씨네21> 466호)를 기억하는가. <공공의 적2> 촬영이 계속되어 이번엔 설경구에게 인터뷰를 제의하지 못했지만, 그를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야 했던 송해성 감독이 둘도 없는 배우에 대한 친절한 덧말을 줬고, 송해성 감독과 김형구 촬영감독이 주고받은 <역도산> 주요 장면 코멘터리를 뒤에 덧붙여 아쉬움을 대신하고자 한다.

"난 죽기 살기로 싸운다"

“내가 39년을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인생이란 온몸을 던지겠다는 각오와 투지가 없이는 결코 얻을 게 없다는 것이다. 인생은 승부다” -<역도산> 중-

아주 살갑게 친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학교 때부터 설경구와는 인연이 있었다. 내가 한양대 연극영화과 85학번이고 경구가 86학번이었으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는 설경구라는 친구가 지금처럼 한국 최고의 연기력을 가진 배우 중 한 사람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친구가 한 학기에 8편 이상씩은 꼭 단편영화 주연을 도맡는 거다. 속으로는 ‘얘한테 무슨 매력이 있냐. 맛도 없게 생긴 애를 데리고 무슨 영화를 만든다고들…’ 하고 혀를 차기도 했었지. 그런데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친구가 당시에도 좀 내성적인 데가 있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뭔가 니힐해 보이는 매력도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이 친구와 <역도산>을 찍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시절이었다.

“나 역도산. 내 운명쯤은 내 스스로 결. 정. 한. 다” -<역도산> 중-

처음 <역도산>을 같이 하자고 설경구에게 말하자 “형. 민식이 형이랑 해”라는 말이 돌아왔다. 어떻게든 피해가려는 심산이었다. “민식이 형 배 나온 거 모르냐. 그 배는 마흔이 넘은 배야. 운동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고. 너밖에 없어”라며 매달렸다. 역도산은 설경구가 아니면 못하는 거다. 가슴속의 울분을 표현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연기할 수 없는 인물이니까. 마지막으로 확답을 받았던 것은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 덕분이었다. 그때는 싸이더스가 (돈 까먹는) 명작들을 수없이 찍어가던, 재정적으로 참 힘든 시기였다. 차 대표와 내가 설경구를 만나 “너 아니면 안 된다. 한살이라도 더 먹으면 너 이거 못한다”며 들들 볶아댔다. 나중에 폭탄주를 서너잔 마신 차 대표가 자리에 쓰러져 자고 있는 걸 보고는, 노래 부르던 이 자가 갑자기 막 울기 시작하는 거다. “혀엉. 승재 형이 너무 불쌍해. 나 그냥 역도산 할래애….” 그렇게 어렵게 시작하면서 둘이서 정한 원칙이 하나 있었다. 그건 ‘<역도산>은 실재 인물의 역사를 담는 영화가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갔던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한번은 일본 연출부 한명이 스틸사진을 찍다가 설경구더러 실제 역도산과 똑같은 포즈를 취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경구가 열받은 얼굴로 윽박지르기를. “야이 씨발놈아! 내가 역도산이냐!”

“딱 한번 사는 인생. 착할 척할 시간이 어딨냐. 안 그래?” -<역도산> 중-

이 친구가 일본에서 인터넷을 하고 있는데 화면에 ‘설경구, 뚱보 되다’라는 제목이 딱 뜨는 거다. 모 스포츠 신문이었는데, 정말 내가 봐도 쪽팔리는 기사였다. 그 순간 이 친구가 완전 두껑이 열려서 별별 욕지거리를 다 하면서 하는 말이, “에이 씨발. 좋다. 나 뚱보 됐으니까. 이제 <역도산> 찍으면 쟁반 노래방에도 나갈 거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역도산이 자신의 옛집으로 아야를 만나러 가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 촬영을 앞두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부슬부슬 오기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감정이 좀 과잉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스탭 몇백명이 기다리고 있는데 비가 언제 그칠 줄 알고 그들을 기다리게 만드나. 그래서 그냥 촬영을 중단했더니 갑자기 이 자가 아무 말도 없이 숙소로 확 돌아가버리는 거다. 헐레벌떡 숙소로 찾아갔더니 완전히 삐쳐서는 문도 열어주지 않고. 내 참. 그래서 “미안하다”고 편지를 써서 방으로 넣어줬지.

“어떡하지. 돌아갈 데가 없는데” -<역도산> 중-

다른 언어로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배우로부터 많은 것을 빼앗아가는 일이다. 애드리브나 순간적인 판단을 거둬버리고 대사와 상황에만 의존해서 연기를 해야 하니까. 감독인 나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굉장히 쪽팔리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촬영 3~4일차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케이!”를 외치고 났더니, 얘가 나한테 살며시 다가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형. 아직 대사도 안 끝났어.” 이 사건은 한동안 촬영장의 가십거리였다. 감독이란 사람이 배우가 대사를 끝내기도 전에 오케이를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나중에는 그저 감정에 충실하게 찍기로 결심을 했다. 그런데 설경구가 욕심이 대단한 친구 아닌가. 감정에만 온전히 기대어서 연기하지 않으려고 엄청난 일본어 연습을 했다. 재일동포 극단인 신주쿠 양산박의 배우를 불러다가 시나리오 읽게 하고, 그걸 녹음해서 대사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배우들이 대사를 읽으면 아무래도 그 사람의 감정이 드러나게 마련이지 않나. 나중에는 NHK 아나운서를 섭외해서 대본을 뉴스 읽듯이 읽어달라고 하고, 그걸 바탕으로 연습을 했다. 경구가 처음으로 3분이 넘는 대사를 한번의 NG 없이 좌악 털어냈을 때는, 그땐 정말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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