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말해두는데, 난 죽기 살기로 싸운다” -<역도산> 중-
레슬링 장면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첫날 팔 하나가 내 허벅지만한 놈들이 촬영장으로 들어오는데, 내 옆에 있던 정두홍 무술감독의 입이 쩌억 벌어지고…. 그걸 본 경구가 “형 내가 저 새끼들 들어올리고 말 거다”라고 다짐을 하더니 곧장 집에다가 바벨 가져다놓고 열심히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악바리 같은 게 결국엔 본촬영에서 그놈들을 번쩍 들어올려버렸다. 그걸 찍고나서는 나한테 다가와서 그러더라. “형. 남들이 이 장면 보고나서 와이어 쓴 거 아니냐고 물어보면 그 새끼들 다 죽여버릴 거야!” 레슬링 장면은 경구가 너무 고통스러워 하니까 어떻게든 빨리 찍으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보니 롱테이크로 갈 수밖에 없는 게, 컷을 나누어서 찍으면 들고 던지는 장면들을 여러 번 다시 찍어야 하지 않나. 나중에는 잔머리를 썼다. 화난 표정으로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경구가 먼저 ‘이게 잘 안 찍혔나보구나’ 싶은지 묵묵히 다시 촬영해주기도 하고. 한번은 촬영하기 전에 밥을 재빨리 먹고 경구한테 갔다. 얘가 “형. 밥은 안 먹어?” 하고 물어보면 시침 뚝 떼고 “밥? 니가 이렇게 아픈데 내가 밥이 목으로 넘어가냐”라며 능청스럽게 달래서 굴리려고….
“신뢰다. 너희가 나를 신뢰하고, 내가 너희를 신뢰하는 거. 그게 돈보다 우선이다. 난 너희를 믿는다” -<역도산> 중-
제작비는 오버했는데도 필름은 남아버렸다. 아무래도 설경구가 연기를 잘하니까 그랬겠지. 경구는 첫 테이크가 제일 좋은 배우다. 여러 번 찍어서 나중에 오케이해놓고도 처음 찍었던 장면을 쓸 때가 많았다. 설경구는 자기가 먼저 재촬영을 요구하는 배우는 아니다. 내가 “이것 좀 봐봐” 그러면 충청도 사투리로 “아유, 내가 뭘 알어. 난 몰러”라는 식이다. 현장에서는 모니터에 가까이도 안 오려고 한다. 한번은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배우가 모니터 봐서 뭘 해. 자기 것만 잘하면 되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감독으로서는 이게 좀 답답할 때도 있다. 배우가 조언도 좀 해주고 그러면 감독으로서는 편한 일인데도 이 친구는 그저 “아유, 난 몰러”니까. 그래도 그 묵묵함 뒤에는 감독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 있다. 설경구가 어떤 신인감독과 영화를 만들더라도 그런 믿음에는 변함이 없을 거다.
“역도산은 울지 않습니다. 다만,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역도산> 중-
“영웅에게 무슨 은퇴가 있습니까” -<역도산> 중-
역도산이 제자인 김일에게 “일본에서 가장 많이 웃는 사람이 되자”던 오랜 결심을 이야기해주는 마지막 장면은 몇 안 되는 한국어 장면 중 하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한국어 대사가 안 받아들여지는 거다. 일본어로 촬영할 때는 나도 경구도 너무 편안했는데, 얘 입에서 한국어가 나오니까 기분이 이상해지는 거다. 그 장면을 보시는 분들은 ‘이렇게 영화를 끝내려고 작정을 했구나’ 하고 어색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왜 꼭 그 장면에서 한국어를 고집해야만 했을까? 김일이 등장하기 때문에? 아마도 이 영화를 준비한 지난 3년6개월, 죽도록 고생하고 몸무게를 94kg까지 불리며 일본어를 마스터했던 설경구의 노력. 그 모든 것을 마지막 대사에 담아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 한마디 때문에 그렇게 긴 시간을 끌어왔다는 생각에 나도 슬펐고, 경구도 슬펐다. 촬영 종료하고 경구에게 “수고했다” 하고 툭 던지자 곧바로 “너무 홀가분해”라는 말이 날아오더라. 그걸로 끝이냐고? 훌훌 털어버렸냐고? 절대 아니지. 이 친구가 나중에 술먹고 전화해서는 이러더라니까. “형. <역도산>이 안 잊혀져. 그래서 미치겠어. <공공의 적2>도 촬영이 안 돼. 나 이제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