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역도산> 미리 보기 [4] - 주요 장면 코멘터리 ②
2004-12-09
글 : 이영진
송해성 감독과 김형구 촬영감독이 말하는 <역도산>의 아홉 장면

# 5 미 레슬러 샤프 형제를 쓰러뜨리는 역도산

찍다보니 케이블 프로레슬링 경기네

송해성 l 드디어 레슬링 장면이군요. 고통의 연속이었죠. 이 시합은 1954년에 열렸던 역도산 대 기무라 전하고 똑같이 찍으려고 했는데 실제보다는 리얼하진 않더라고요. (웃음) 당시 자료화면을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인데 상대에 대한 배려로서의 룰은 전혀 없어요. 워낙 살벌해서 관중이 소리를 내지도 못할 정도니까.

김형구 l 일본 관중이 거구의 미국 레슬러인 샤프 형제를 쓰러뜨리는 역도산을 보고 ‘만사이’를 부르는 첫 번째 경기장면에는 풍부한 컬러를 썼고, 이후 경기들로 가면서 서서히 탈색됩니다. 나중 경기들은 점점 콘트라스트가 강하고 어두워요.

송해성 l 경기장면은 CG를 전제로 촬영을 해야 했는데.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제가 CG 노이로제가 있습니다.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파이란>에서 CG 쓴 건 제목 뜨는 부분에서 물안개 심은 거 딱 한 장면이거든요. 근데 이번에는 938컷 중 354컷이 CG니. 제가 불안해하니까 모팩의 장성호 실장이 저보고 비빌 언덕만 마련해주면 CG가 다 해줄 거다라고 안심시키더라고요.

김형구 l 당시 레슬링 경기를 보면 카메라도 몇대 안 되니까 역동감이 없어요. 그래서 테스트 촬영 때 정두홍 무술감독의 제안으로 링 안으로 들어가 핸드헬드로 찍어봤지요. 그랬더니 힘은 있어 보이는데 어디서 많이 본 앵글이에요.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요즘 케이블에서 하는 프로레슬링 경기 같더라고. 그래서 결국 보수적으로 카메라를 가져가자. 픽스된 숏으로 찍고 팬 정도만 썼습니다.

송해성 l 예를 들어 권투는 숏 바이 숏이 돼요. 주먹으로 치면 맞은 상대의 얼굴에선 땀이 튀고, 피가 튀기고. 그런데 레슬링은 그게 안 돼요. 장면을 분절하는 순간 가짜가 돼버리고 흥미가 반감되죠. 또 우리가 열광하면서 봤던 프로레슬링의 기억이 대부분 TV 숏으로 봤던 것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멀찍이 떨어져서 관람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은 의도도 있었죠.

김형구 l 당시는 프로레슬링 초창기라 기술이 별로 없었죠. 영화 속 테크닉 중 몇 가지는 그때는 쓰이지 않았던 기술인데, 앵글이 다소 밍밍하다 보니 몇 가지를 더 넣는 방식으로 경기장면에 재미를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 6 침실에 다른 여자를 끌어들이는 역도산

감독 변덕, 일본 스탭들은 이해를 못하데

송해성 l 이 장면은 떠올리면 괴롭습니다. 역도산이 아야가 있는데도 침실로 다른 여자를 끌어들이고 이 와중에 역도산이 아야의 뺨을 때리고 폭언을 퍼붓고 홀로 남게 되는 장면입니다. 촬영하다 말고 제가 새벽 4시쯤에 오늘 그만 하자고 했습니다. 두 배우 모두 연기가 오버라고 느껴졌거든요. 치고받으면서 점점 감정이 상승하는 게 아니라 오늘 어떻게 하겠다고 미리 정해온 듯한 표정들이어서 중단했죠. 근데 생각해보니 이렇게 끝내면 또 안 되겠는 거예요. 일정도 있고. 그래서 30분 정도 뒤에 다시 촬영을 하자고 했죠. 그랬더니 일본 스탭들이 이해를 못해요. 한국 스탭들이야 감독의 변덕을 이해해주지만 말이죠. (웃음) 가장 미안했던 건 배우들이죠. 아무래도 감정이 끊기니까. 스탭하고 배우들하고 설득시켜서 우여곡절 끝에 찍었습니다. 나카타니 미키한테는 속죄하는 심정으로 나중에 역도산을 간호하는 장면 촬영 때 원하는 대로 연기해라, 그대로 찍겠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필름 한통 다 썼죠.

김형구 l 저도 괴로웠습니다. 밤을 꼬박 샜거든요. (웃음) 다만 전 이 장면의 시작이 좀 이해가 안 갔어요. 역도산이 아야가 아래층에 있는데 다른 여자를 침실로 불러들일 수 있나. 그런 인간인가, 하고.

# 7 칸노 회장과 역도산의 결별

엇, 후지상! 콧수염은 다시 길러주십시오

송해성 l 역도산의 후원자로 나오는 칸노 회장 역의 후지 다쓰야를 빼놓을 수 없죠. 설경구가 유독 자격지심을 가졌던 배우입니다. 이 장면은 칸노와 역도산이 결국 결별하는 장면인데, 멀리서 마스터 숏을 찍어놓고 보니까 이걸로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다른 걸 찍기가 싫더라고요. 역도산의 숙명을 이해하는 칸노라는 캐릭터를 후지상이 이 한 장면으로 보여주는데 반응 숏을 찍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랬더니 경구가 화를 내더라고. 숏 하나가 좋긴 한데 그래도 내 감정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웃음)

김형구 l 전 처음에 후지상이 적역이 아니라고 봤어요. 실제 모델의 경우 얼굴이 좀 둥실둥실한데 후지상은 인상이 좀 강해 보였거든요.

송해성 l 전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이 거슬렸죠. <감각의 제국>부터 <밝은 미래>까지 항상 달고 다녔지만 이번엔 젊은 시절의 칸노 회장 역을 연기해야 하니까. 그래서 의상 피팅하는 날에 만나서는 수염을 없애면 안 되겠느냐고 했더니 깎기 싫어서가 아니라 깎으면 얼굴이 달라진다고, 실망할지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선 수염을 밀고 와서 이 얼굴이 괜찮으면 이렇게 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랬죠. 죄송합니다. 수염을 길러주십시오. (웃음)

김형구 l 레슬링 경기 장면에선 안 나오셔도 됩니다, 했는데도 종일 꼿꼿이 앉아 있더군요. 휴식시간에만 잠깐 화장실 다녀오고는. 알고 봤더니 일본에서도 가장 먼저 촬영장에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 8 훈장을 받은 역도산, 그의 강박과 공포 p>

감독판에는 꼭 넣어야죠

송해성 l 너무나도 힘들게 촬영했는데 결국 시간 때문에 빼야 했던 장면입니다. 역도산이 적십자사로부터 훈장을 받고 손님들을 불러모으죠.

김형구 l 꼭 들어갔어야 한다고 봤어요. 역도산의 강박 혹은 공포가 후반부에 점점 고조되는데 훈장받았다는 뉴스가 나오지 않자 난장판을 만들잖아요. 이런 설정이 역도산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송해성 l 감독판을 내면 넣어야죠. 저도 걱정이 있는데 다 부수어버리고 나서 역도산이 혼자서 계단에 널브러진 장면만 남았어요. 근데 이 장면은 왜 찍은 거야, 다소 뜬금없다고 할지 몰라서 걱정입니다. 촬영 때 설경구에게 부탁한 건 <자이언트>의 제임스 딘 같은 느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쓸쓸한 정서를 담아달라. 그랬더니 경구가 한마디 하대요. 나, <자이언트> 못 봤어. 시간문제도 있었지만 역도산이라는 인물을 그리는 데 있어서 이 장면을 넣는 것이 좋은 건가, 나쁜 건가 하는 고민도 했습니다.

# 9 역도산의 마지막 경기

‘빨리 끝내’라는 설경구, 보는 것도 고통스럽네

김형구 l 마지막 경기 장면입니다. 역도산이 가라테촙을 날리지만 이제는 먹히지 않는데다 반칙 레슬러들에게 당하게 되죠.

송해성 l 제 표정이 좀 심각해보이죠. 사실 공격하는 건 쉽습니다. 받아주는 사람이 리액션을 잘하면 되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과연 이걸 설경구가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죠.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촬영 때 제가 좀 쉬다가 할까 그러면 설경구는 가쁜숨을 쉬며 ‘빨리 끝내, 빨리 끝내’라고만 했었죠. 오죽했으면 일본 분장 스탭이 설경구에게 가짜 피를 발라주면서 울었겠습니까.

김형구 l 테이크를 여러 번 가는 건 불가능했죠. 한번 하고 나면 완전히 녹초가 돼버리니까. 내팽개치고 나면 다음날 설경구가 못 일어나더라고. 근육통 때문에. 이 장면에서는 핸드헬드를 좀 썼는데 링 안을 찍을 때는 아니고. 링 바깥으로 나와서 역도산이 자신이 당했던 대로 상대를 의자로 때리는 반칙을 쓰는 장면에서 들고찍었습니다. 애초에는 망원렌즈로 당겨서 팬으로 효과를 주려고 했는데 그 장면에선 카메라를 움직여야 할 것 같았거든요. 두 버전으로 찍었는데 나중에 편집 때 보니 역시 핸드헬드가 효과적으로 보이더군요.

송해성 l 100억원 이상 들어간 대작이구나 하는 기대보다는 역도산으로 분한 설경구를 보며 그 감정을 따라가 줬으면 해요. 촬영감독님이 워낙 드라마를 잘 이해하시는 분이라 보는 데 큰 무리는 없을 테니까.

김형구 l 덕담 시간이네요. 저도 그럼. 감독의 능력 중 반은 스탭들을 얼마나 잘 운용하느냐인데 그게 없었으면 <역도산>도 없었던 게죠.

사진제공 싸이더스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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