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원정대의 여정도 추억담이 된 쓸쓸한 올 겨울, 픽사의 여섯 번째 장편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12월15일 국내 개봉)이 공개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금욕주의자라고 부를 자격이 있다. 1990년대 여름마다 디즈니 장편애니메이션이 모았던 주목과 기대는 이제 고스란히 픽사에 옮아간 것이다. 2시간에 육박하는 상영시간, 픽사 최초의 PG등급을 받은 현란한 액션으로 별안간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스타일에 성큼 다가선 슈퍼히어로 가족드라마 <인크레더블>에서 브래드 버드 감독이 업그레이드한 픽사의 미덕은 무엇이며, 새롭게 드러낸 야심은 무엇일까? 또, 그 야심은 픽사의 충실한 팬들에게 어떤 우려를 자아내는가? 픽사의 ‘미션 인크레더블’을 분석해본다.
사상 최초의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 <백설공주>를 만들겠다는 월트 디즈니에게 사람들은 말했다. “만화영화를 극장에서 1시간 넘게 보고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로부터 60년 뒤 최초의 장편 3D CG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만들겠다는 픽사의 존 래스터에게 사람들은 말했다. “컴퓨터그래픽(CG)을 극장에 앉아 2시간씩 쳐다볼 사람이 어디 있겠어?” 주지하다시피 이 일화들은 반전이 준비된 영웅 신화의 첫머리다. 월트 디즈니는 <백설공주>를 주춧돌 삼아 왕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토이 스토리> 이후 지금까지 픽사는 단 한번도 스텝이 엉키지 않고 위풍당당 행진을 계속했다. <토이 스토리> <벅’스 라이프> <토이 스토리2>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는 모두 합해 약 30억달러 수익을 남겼고, 애니메이션 뿐아니라 실사영화까지 통틀어 해당연도의 베스트영화 중 한편에 꼽혔다. 할리우드 주민들은 픽사 직원들이 무슨 약 탄 음료수를 마시는 게 아닐까 질투하고, 관객은 디즈니의 성곽 상표보다 픽사의 탁자 스탠드 로고를 믿고 티켓을 예매하게 되었다. 드디어 가면을 벗고 정체를 드러낸 픽사의 여섯 번째 장편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은 기술적으로 완벽하고 아름다우며 흥분과 폭소와 경탄을 자아낸다. 그게 놀랄 일이냐고? 물론 픽사 영화가 재미있다는 사실은 더이상 뉴스 축에 끼지 못한다. 그런데 <인크레더블>은 픽사의 전작들과 확실히 뭔가 다르다. 상영시간은 길고 드라마는 할리우드의 단골 메뉴인 ‘중년 가장과 가족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액션 시퀀스들은 <스타워즈>나 <스파이더 맨2>와 핸디캡 없이 겨루겠다는 야심을 감추지 않는다.
블록버스터에 가족드라마를 섞은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은 TV비율의 화면에 담긴 슈퍼히어로들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연예 뉴스에 공급되는 할리우드 스타의 정킷 인터뷰와 흡사한 이 서두에서, 슈퍼맨풍의 히어로 미스터 인크레더블(밥)과 사지가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엘라스티걸(헬렌), 아이스맨 프로존(루시어스)은 평화와 안전의 수호자로서 자부심과 스트레스를 거만한 말투로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들의 긍지와 보람은 오래가지 않는다. “누가 구해달랬냐고!”라고 항의하는 배은망덕한(?) 자살미수자의 소송을 시작으로 슈퍼히어로들의 배상을 요구하는 재판으로 여론은 비등한다. 결국 정부는 ‘슈퍼히어로 재적응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영웅들은 정체를 숨긴 채 민간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15년 뒤, 성냥갑 같은 주택이 늘어선 교외 중산층 주거지역. 미스터 인크레더블과 엘라스티걸은 밥과 헬렌이라는 이름으로 결혼해 삼남매의 부모가 됐다. 이제 밥이 맞서 싸워야 하는 적은 악당이 아니라 복부비만과 소시민적 무력감이다. 그러나 문제는 권태 이상이다. 밥의 직장인 보험회사 ‘인슈어케어’는 그의 지나간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생리를 지닌 조직이다. 곤경에 빠진 이를 돕겠다는 계약을 이리저리 피해야 먹고사는 보험사는, 슈퍼히어로의 대용품으로 고안한 범용한 인간들의 제도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웅변한다. 괴로운 건 밥만이 아니다. 스피드를 타고난 아들 대쉬는 능력을 발휘 못해 안달이고 투명인간 딸 바이올렛은 초능력을 혐오한다. 헬렌은 식구들의 불만을 그녀의 긴 팔로 끌어안고 가정을 지탱하느라 허리가 휜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에서 해고된 밥은 정체 모를 고용주의 제안을 받고, 가족 몰래 슈퍼히어로를 재개업하면서 근육과 활력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가 맺은 계약은 함정으로 드러나고 급기야 헬렌과 슈퍼 키드들은 위기의 가장을 구하기 위해 출동해 초능력을 총동원한 전투를 시작한다. 그들의 유니폼 가슴팍에는 ‘인크레더블’의 ‘i’자가 자랑스레 빛난다.
이상의 스토리에서 <트루 라이즈> <엑스맨> <스파이 키드>를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런 노릇이다. 눈으로 직접 보는 <인크레더블>의 시퀀스들은 더 많은 첩보물, 액션물의 제목을 나열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인크레더블>은 실사영화 같다. 이는 <인크레더블>이 <파이널 환타지>처럼 사람의 땀구멍까지 그려내는 하이퍼 리얼리즘에 도전했다는 뜻이 아니다. <인크레더블>이 접근한 ‘실사영화’는 꼭 집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다. 현대 블록버스터의 특성은 특수효과 액션 스펙터클과 다양한 장르의 잡종교배다. <인크레더블>은 눈이 핑핑 도는 전투와 더불어 가족드라마, 어드벤처, SF, 코미디를 고루 섞는다. 이러한 스타일의 ‘주모자’는 브래드 버드 감독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대부분 작품에서 내부자들의 공동 감독 체제를 유지해온 픽사가 예외적으로 영입한 외부자 출신 단독 연출자인 브래드 버드는 “자신이 영화에서 상상한 모든 재미”를 <인크레더블>에 집어넣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럼 여기서 잠깐, 완성도에 비해 ‘불의’에 가까울 만큼 흥행에 참패한 브래드 버드의 장편 데뷔작 <아이언 자이언트>를 되짚어보자. 우주에서 온 거인 로봇이 냉전기 미국 소년과 우정을 맺고 병기의 운명을 거부한다는 이야기를 담은 <아이언 자이언트>는 실사였더라면 더 효과적이었을 성싶은 장면이 많은 애니메이션이다. 과거의 어떤 만화영화보다 <E.T.>와 <가위손>을 닮은 <아이언 자이언트>의 스토리보드와 대사, 캐릭터는 카툰의 문법보다 할리우드 실사 가족 멜로드라마의 관습을 따르는 애니메이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