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6개 키워드로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 [1]
2004-12-28
글 : 김도훈
날아라! 마법의 모험담, <하울의 움직이는 성>

미야자키 하야오의 9번째 장편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18살 소녀 소피가 황무지 마녀의 저주로 90살 노파로 변하고, 젊은 마법사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청소부로 취직하면서 시작된다. 소피, 마법사 견습생 마르클과 저주에 걸린 허수아비, 불의 악마 캘시퍼로 구성된 대안가족은 괴조(怪鳥)로 변신해 전쟁터에 뛰어들어야 하는 ‘집주인’ 하울의 운명에 얽혀들고, 그 운명론적 모험 속에서 소피는 90살의 지혜를 익히며 성숙해간다. 이것은 언뜻 익숙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험담이다. 하지만 그 모험담은 예전과는 조금 다른 듯도 하다. 주인공들은 이제 종종 변덕을 부리거나 우울해하고, 마법의 힘으로 외모를 바꾸거나 세상을 움직이려 들며, 그들을 품고 가는 이야기는 가끔 엉뚱한 곳으로 새어나가버린 다음 느긋하게 한참을 머물다가 본궤도로 돌아온다.

미야자키는 이제 “살아라!”(<모노노케 히메>)라고 부르짖지도 않고 “네 이름을 소중히 여기며 살라”(<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며 교훈을 던져주지도 않는다. 대신에 “이제는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라고 간접적으로, 혹은 “사랑한다”며 상대를 향해 돌진하기도 하고, “나이가 드니 영악해진다”며 슬그머니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거나 “마음은 원래 무거운 것”이라고 말해놓고도 잠시 뒤에 “원래 사람 마음은 언제나 변하니까”라며 변덕을 부린다. 미야자키의 영화들에서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는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으며, 주제의식은 조금씩 무게를 덜어가는 듯하다. <하울의…>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영감님의 베갯머리 동화처럼 편안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모든 것을 온전히 지녔으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창문 역시 조심스레 열어 보이는 <하울의…>에 담긴, A부터 Z까지 26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의 흔적들을 되살펴본다.

Alice in Wonderland(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마찬가지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한 소녀가 마법에 걸려 낯선 장소로 떨어져 내린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식 플롯 구조를 지니고 있다. 권선징악의 결말이 없이 소녀의 꿈을 꾸는 듯한 모험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루이스 캐럴의 은유로 가득 찬 세계의 영향력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주변 캐릭터들에서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를 읽어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전작 <센과 치히로…>의 캐릭터들은 ‘하트의 여왕=유바바, 공작부인의 돼지로 변한 아들=돼지로 변한 유바바의 아들’로서 대구를 이루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빠져나온 듯한 개구리 시종이 등장하기도 한다.

Beldame(노파, 못된 노파, 마귀할멈, 할머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는 아버지의 존재가 없다. <천공의 성 라퓨타>와 <하울의…>에서는 아버지가 이미 죽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고, 나우시카의 아버지는 도중에 군대에 목숨을 잃게 되며, 그외의 작품들에서도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거론되지 않거나 있더라도 주인공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를 대체하는 것은 어머니상이거나 그보다도 더 빈번하게 등장하는 할머니상이다. <하울의…>에서 90살 노파로 변해버린 소피는 꼬마 견습생 마르클과 하울의 대체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고, <천공의…>의 해적대장 도라나 <센과 치히로…>의 마녀 자매는 주인공을 강하게 성장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것은 페미니즘적인 의도라기보다는 미야자키가 그려내는 세계관(자연이 모성이며 여성의 근원적 힘이 세계와 남성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Castle(성)

<하울의…>에서 가장 압도적인 스펙터클은 ‘움직이는 성’ 그 자체다. 마치 군함을 해체해 재조립한 듯한 외양에 증기를 뿜어내며 네 다리로 걸어다니는 이 괴물은 다이애나 윈 존스가 글로 이미지화했던 미끈한 유럽식 성과는 다른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사실 미야자키의 필모그래피에서 성(城)이라는 제목이 직접적으로 인용된 영화만도 본작을 포함해 <루팡 3세-카리오스트로성의 비밀> <천공의 성 라퓨타>까지 세 번째이며, 성체가 등장하는 영화들(<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 혹은 <센과 치히로…>에서 유바바의 온천여관 ‘아부라야’)을 포함한다면 전체 필모그래피의 절반을 넘어선다.


Disney(디즈니)

<모노노케 히메>부터 지브리는 미국 배급권을 디즈니에 이양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계약일 뿐 지브리는 여전히 ‘독립성’을 지니고 있는 상태이며 합작 애니메이션 제작의 계획은 전무하다. “디즈니는 부모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고, 미야자키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든다.”(뫼비우스, 프랑스 만화가)


Ecologism(생태주의)

“나는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서는 영화를 만들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울의…>에서도 자연은 전쟁의 화염으로 가득한 문명에 대비되는 메타포를 지니지만, 생태주의라 일컬을 만한 미야자키의 목소리가 가장 두드러졌던 작품은 아마도 <모노노케 히메>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죽어버렸으면’을 외치며 파멸로 치닫는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신세기 에반게리온> <최종병기 그녀>)의 급진적 생태주의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혁명이나 문화적 패러다임 교체만이 파멸로부터 지구를 구한다고 믿는 급진적 생태주의와 달리 미야자키의 생태주의는 문명과 자연 사이에서 투쟁하는 인간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라’(生きる)는 조언을 던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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