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6개 키워드로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 [2]
2004-12-28
글 : 김도훈

20세기 초 SF 화가들의 일러스트레이션. 지브리는 19~20세기 초에 서구인들이 상상했던 비행도구들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는다.

Flight(비행)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 대한 글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표현은 ‘비행의 쾌감’이다.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날아다니는 날틀과 추락에 대한 두려움 없이 비상하고 하강하는 역동감을 즐기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하야오의 작품들을 대변하는 이미지다. 다만 <센과 치히로…>에서는 <바람계곡의…>나 <천공의…>의 날틀이나 <마녀배달부 키키>의 빗자루 등 인간을 태울 만한 도구없이 용(하쿠)에 의해 비행이 행해지는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변모했고, <하울의…>에서 괴조(怪鳥)로 변신해 날아다니는 하울의 모습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다만 <하울의…>에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않아 매너리즘에 빠진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천공의…>나 <바람계곡의…>에 등장했던 것과 비슷한 비행함선들이나 2인용 날틀이 익숙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지브리는 19세기와 20세기 초의 SF나 판타지 작가들이 상상했던 비행도구들의 모습을 수집해서 그것으로부터 수많은 비행도구들의 디자인을 창조하고 모아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Girl(소녀)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의 주인공은 언제나 소녀다. 강하고 정의로운 소년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소녀가 쥐고 있는 열쇠를 푸는 데 필요한 조연에 머무른다. <하울의…>의 주인공 소피는 독립적이고 인기있는 여동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고, 삶에 대한 도전적인 의지가 없는 소녀로서 첫 등장한다. 하지만 90살 노파로 변하는 저주를 받고나서는 오히려 삶에 대한 의지와 감정의 표현방식에서 점점 대범해진다. <천공의…>의 시타, <미래소년 코난>의 나나, <바람계곡의…>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의 산, <센과 치히로…>의 치히로는 모두 소년(남자)들의 철없는 생명력을 다스리며 그들의 성장을 진두지휘하는 독립적인 캐릭터로서의 힘을 얻는다. 특히 남자들을 구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런 능력은 극대화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녀배달부 키키>에서도 키키는 사춘기의 정체성 혼란에 빠져 날아다니는 법을 잊어버리지만 남자친구인 톰보가 위기에 처하자 비행능력을 되찾는다. “나는 내가 날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어. 이제 내 자신을 돌아보고나니까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를 알겠어.” Hisaishi Joe(히사이시 조)

히사이시 조는 <바람계곡의…>부터 <하울의…>까지 미야자키 영화들의 스코어를 모두 담당한, 미야자키 세계를 이야기할 때 떼어놓을 수 없는 음악가. <하울의…>에서 그는 상당수의 메인 테마를 영화의 주무대가 되는 유럽풍 도시들에 걸맞은 왈츠풍으로 작곡해냈다. 전작들만큼 귀에 강렬한 진운을 남기는 맛은 없지만, 영화에 알맞은 ‘동화적’인 스코어로서 미야자키 세계를 적절하게 그려낸다.

Inanimate matter(무생물)

<하울의…>에서 2개의 주요 캐릭터인 캘시퍼(불)과 무대가리(허수아비)는 무생물이다. 미야자키의 전작들에서 <이웃집 토토로>와 <센과 치히로…>에 공히 등장하는 스스와타리(숯검댕이 정령)을 제외한다면, 무생물의 의인화되어 등장했던 예는 없었다. 다이애나 윈 존스의 원작에 있던 캐릭터들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하울의…>는 미야자키의 이전 작들과 조금 달라졌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만물에 혼이 깃들어 있다’는 토착 신앙의 믿음을 품고 있는 미야자키의 전반적인 작품세계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Japan(일본)

“나는 일본인만을 위해 영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한국만이 아니라 해외 어느 나라에서 공개된다 하더라도 영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미야자키 하야오)

Kimura Takuya(기무라 다쿠야)

일본 최고의 스타 기무라 다쿠야가 <하울의…>의 남자주인공 ‘하울’의 목소리를 담당했다. 그는 처음으로 지브리가 고용한 ‘스타’ 배우 출신의 아마추어 성우다.

Love Story(사랑)

홍보문구처럼 <하울의…>가 ‘러브스토리’에 방점을 찍을 수 있을 만한 작품은 아니다. 여전히 미야자키는 조금이라도 섹슈얼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울이 소피에게 “이제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희생하려고 들거나, 소피가 “사랑한다”라고 고백하며 하울에게 키스를 보내는 것은, 분명히 이전 미야자키 작품들에서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이다.

Move away, Move out(이사: 移徙)

미야자키 작품에서 ‘이사’라는 것은 일상에서 판타지로 이동하는 계기가 된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사쓰키와 메이는 어머니의 요양을 위해 시골로 이사하고, <센과 치히로…>의 치히로는 이사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소녀다. <마녀배달부 키키>에서 키키는 마녀실습을 위해 인간세계로 이사한다. <하울의…>에서 소피가 직접적인 판타지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은, 저주를 받은 순간부터가 아니라 ‘하울의 성’으로 들어가서 살게 되면서부터다. 새로운 장소와 세계 속으로 몸을 옮기는 것에서 미야자키의 세계는 문을 여는 것이다. 이사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공간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장소로 심리적인 보금자리를 옮긴다는 막중한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하울의…>에서는 ‘마법’이라는 도구가 있으므로 그 의미가 옅어지기는 하지만)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처럼 일상적인 세계로 시작하는 작품들에서는, 일상적인 인간활동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벌어지는 일은 아닌 ‘이사’라는 것이 일상세계와 판타지 세계를 연결해주는 설득력 있는 도구로 보여진다.

Naturalism(자연주의)

“살다보면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장소와 시간, 그리고 빛에 주목하게 된다. 또한 이것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다보면 어느새 자연주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내 작업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 점은 <바람계곡의…>로부터 계속해서 내 작업 흐름의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미야자키 하야오)

Original Work(원작)

<하울의…>는 <마녀배달부 키키> 이후 15년 만에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미야자키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다. 물론 미야자키는 다이애나 윈 존스의 원작으로부터 움직이는 성과 캐릭터들만 가져와 완전히 재창조했다. 영국식의 드라이한 유머감각을 대신한 것은 미야자키 특유의 캐릭터들(특히 원작에서 자멸하는 황야의 마녀를 미야자키는 보통의 ‘할머니’로 만들어서 또 다른 성격을 부여했고, 대마법사인 설리만은 여자로 재창조되었다)과 좀더 직접적인 반전의 메시지 등이다. “나는 오랫동안 미야자키의 팬이었어요. 그는 이야기의 리듬과 힘을 잃지 않고서도 세심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거든요. 그런 사람의 영화에 간섭하거나 조바심을 내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지요.”(다이애나 윈 존스)

Pet(애완동물)

다른 미야자키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하울의…>에도 늙은 개 ‘힌’을 비롯해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작은 애완동물들이 등장한다. 소소한 유머를 던져주는 극적 장치이지만 미야자키 작품들에서 특이한 점이라면, 작은 동물 캐릭터들이 처음부터 그리 귀엽게 굴거나 주인공에게 친근한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람계곡의…>에서 작은 여우다람쥐는 나우시카의 손가락을 깨물고 나서야 가까워지며, <센과 치히로…>의 작은 돼지는 원래 유바바의 아들로서 치히로의 생명을 위협하던 존재였다. <하울의…>의 ‘힌’ 역시 비슷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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