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동상이몽>의 새로운 도전 [1] - 6개의 에피소드
2005-01-25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정진환
봉만대의 에로는 전진한다

케이블 TV채널 OCN이 제작한 <동상이몽>이 성인물로서는 이례적으로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해 11월26일 방영을 시작한 6부작 <동상이몽>은 네이버 유료 VOD 서비스 1위에 오른 적이 있고 조만간 DVD로도 발매될 예정이다. 에로영화라고 소개됐지만, 캐치온 플러스와 스파이스TV가 보여주는 섹스의 강도에는 훨씬 못 미치는, 다소 낯선 형식의 영화. 무엇이 음지와 양지의 시청자들을 <동상이몽>으로 끌어들였을까? 이 시리즈를 연출한 봉만대 감독은 <이천년> <아파바> 등으로 에로비디오 업계의 스타가 되었지만 극장용 장편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으로 실패를 맛본 뒤 잠시 사라졌던 인물이다. 오래간만에 나타난 그를 만나 <동상이몽>에 녹아 있는 어느 에로감독의 좌절과 희망, 다양한 실험의 근원을 들어보았다. 편집자

같은 잠자리에 누워 다른 꿈을 꾼다. 뼈있는 제목을 가진 케이블 TV영화 <동상이몽>(同床異夢)은 그 제목처럼 에로영화이되 에로영화가 아니다. 11월26일 첫 방송을 시작한, 다섯개의 에피소드와 그것들을 편집한 한개의 ‘디렉터스 컷’으로 이루어진 영화. 그 앞에 붙은 봉만대라는 이름만으로는 질척한 에로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에로비디오 업계의 스타였고 장편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을 연출했던 봉만대 감독은 1년 동안의 칩거 뒤에 만든 이 영화들이 “에로가 아니라 에로틱한 영화, 멜로를 떼어낼 수 없는 영화가 되기를” 소망했다고 말한다. 하나의 이야기이면서 서로 다른 이야기이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라고도. 그리고 화끈하게 벗어주리라는 기대를 배반하는 여섯개 <동상이몽> 조각들은 “알바를 푼 게 아니냐”는 의혹을 살 정도로 호평을 받으며 방영을 마치고 네이버, 다음 사이트에서 유료 VOD 서비스를 하고 있다(1월 셋쨋주에 VOD 서비스가 끝나면 2월에는 DVD가 출시될 예정이다). 네명의 여자와 두명의 남자가 엮는 이 에로틱한 사랑과 너저분한 일상, 전투 같은 영화촬영 이야기는 성인을 위한 대부분의 콘텐츠와는 달리 순식간에 양지로 발돋움했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을 찍고 1년 가까이 쉬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6개월 정도 후유증에 허덕였다. 멍했고, 시나리오를 쓰다 정신을 차려보면, <맛있는 섹스…>의 한 장면을 다시 쓰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냐고 물어보면 그것도 모르겠고. 그래서 완전히 일을 놓았다. 친구가 찍는 광고를 촬영해주면서 남아프리카와 앙골라, 그리스에 갔고, 그 친구 사무실 한편에서 가끔 시나리오도 썼다. 뭘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이야기가 안 풀렸는데 쉬다보니 하고 싶은 이야기도 생겼다. 신기하게도 그즈음 케이블 방송국 네 군데서 한꺼번에 연출 제의가 들어와서 <동상이몽>을 만들게 됐다.

<깊은 그림>

<동상이몽>은 네 번째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영화 속 영화 <깊은 그림>으로부터 가지를 쳐나가는 영화다. <깊은 그림>의 감독과 촬영감독, 두명의 주연배우, 녹음기사, 원작소설의 작가, 그의 옛 애인이자 <깊은 그림>의 단역배우가 서로 얽히면서도 또렷하게 혼자 선 다섯개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다. 봉만대 감독은 지난해 5월에 이 프로젝트를 제안받았다. 그는 케이블TV를 보지 않았지만, 영화도 TV도 가능하지 않을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싶었고, 너무 센 탓에 접어두었던 시나리오 <땀의 향기>를 꺼냈다. 가장 멜로영화에 가까운 <땀의 향기>는 원래 딸을 여자로 보게 된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봉만대 감독은 지인이 들려주었던 그 이야기를 작가와 단역배우의 사랑으로 바꾸고, 그들이 관계된 영화 <깊은 그림>을 떠올리고, 거기에서 나머지 에피소드 세개를 찢어낸 것이다. “방송국에선 섹스의 강도가 높은 TV 미니시리즈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공중파 방송을 쫓아가고 싶지 않았다. 처럼 인물은 같지만 사건은 달랐으면 싶었고, 단편과 장편의 경계에 있는 중편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그는 <깊은 그림>이라는 영화 한편의 여기저기에 박혀 있는 인물들을 창조했다.

방영일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봉만대 감독은 한달 반 사이에 시나리오를 모두 써야만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배우를 캐스팅하고 장소를 헌팅했으며 세트를 지었다. 크랭크인을 위해 밀양 위양지에 내려간 8월21일, 봉만대 감독은 주연 여섯명 중에서 두 여배우와 가장 중요한 다섯 번째 에피소드의 시나리오를 갖고 있지 못했다. 석달이 채 안 되는 짧은 제작기간, 에피소드 한편당 평균 촬영횟수는 7∼8회. 이런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봉만대 감독은 처음 찍은 1시간30분짜리 시대극 <깊은 그림>을 10회 만에 무사히 끝냈고 비어 있던 자리에 제법 잘 어울리는 여배우 두명을 채워넣었다. 때로는 카메라까지 직접 들어야 했던 비디오 업계에서의 학습이 없었다면, 그리고 김현태 촬영감독에서 음악을 맡은 현진영까지, 서로를 깊이 아는 친구 같은 스탭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하늘의 도움도 컸다. 마음에 썩 차지 않는 저수지로 <동상이몽> 제작진이 내려갔을 때, 그새 한여름 폭우로 나무 둥치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 말없는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정자가 둥실 떠 있는 듯하고 물속에서 돋아나온 듯한 나무들이 가지를 숙이고 있는 신비로운 풍경. 봉만대 감독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도 흔들리는 대나무 사이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천재지변을 동양화처럼 녹여냈다. 스탭들이 물어도, 배우가 궁금해해도, 봉만대 감독의 마음 안에는 그만의 그림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는 “정신없이, 공격적으로” 반년을 살았다고 했다.

<다음 여자>
<밀착>

-당신은 언제나 동세대의 솔직한 모습을 담곤 했다. 하지만 <깊은 그림>은 의외로 시대극이고 <취화선>과 비슷한 부분도 있다.

=화가가 주인공이어서 그런 느낌이 들었나본데 아직 <취화선>을 보지 못했다. 나는 전부터 시대극을 찍어보고 싶었다. 과거라는 시대적 배경이 섹스에 더해줄 수 있는 판타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깊은 그림>에는 현재의 세태를 풍자하는 면도 있다. 화가 미상은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모르고 사물을 정확하게 모사하는 카메라의 존재도 모르는 채 그림을 베껴 그리는 데만 골몰한다. 그건 창의력이 사라진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은 너무 빨리 변하고, 나 자신도 생산라인에 서 있는 느낌이다. 이곳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처럼 깊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동상이몽>은 분투하는 에로감독 봉만대의 그림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영화다. 두 번째 에피소드 <밀착>과 다섯 번째 에피소드 <벌거숭이>는 첫 번째 영화를 찍는 감독 나정은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다. 에로영화로 데뷔하는 나 감독은 나이 많은 촬영감독 박기사와 부딪치다가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드는 건지 흐름조차 잊어가고, <벌거숭이>에 이르러서는 “영화에 뿅점이 없다”(결정적으로 야한 장면이 부족하다)고 타박하는 제작자 때문에 재촬영까지 마음먹는다. 봉만대 감독은 왜 이런 소재를 택하게 됐는지 모르겠다면서도 “나 자신에 대한 공격이고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라고는 인정했다.

<깊은 그림>을 찍는 현장은 아수라장이다. 저수지를 망쳐놓은 유명감독 때문에(이것은 실제로 헌팅과정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다) 점찍어둔 촬영장소를 포기한 나 감독은 촬영 시작 전부터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박기사와 신경전을 벌인다. 긴장이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을 무렵, 박기사는 주연배우의 유두를 분홍색으로 칠하게 하고, 나 감독은 그를 변태라고 비난한다. “남자들은 분홍색 유두가 처녀의 그것처럼 보인다고들 한다. 깨끗한 느낌을 준다는 거고 백인 같기도 하다면서. 하지만 유두는 사람마다 색이 다르다. 나 감독은 남자들의 일방적인 기준을 용납하지 못하는 거다”는 것이 상황파악 못하는 여기자에게 들려준 봉만대 감독의 설명이다.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 그 갈등은 <벌거숭이>에 이르러 좀더 절박한 형태로 폭발한다. 주연배우에게도 정사신을 줄 것을 요구하는 제작자, 흥행 앞에 고집을 꺾은 감독, 그런 그녀를 비난하는 주연배우 연실. 어두운 회의실 안에서 숨막히도록 조여가던 다툼은 마주선 나 감독과 연실의 싸움으로 좁혀지고, 두 여자는 여자로, 감독과 배우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봉만대 감독 또한 남자다.

<벌거숭이>
<디렉터스 컷>

-<벌거숭이>에서 원작의 작가는 나 감독에게 <깊은 그림>이 어설픈 페미니스트의 실패작이라고 핀잔을 준다. 나 감독이 찍은 <깊은 그림>은 사실은 당신의 영화가 아닌가.

=맞다. 나는 여자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도 아닌데 그들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서 나는 어설프다. 내겐 <벌거숭이>가 가장 힘든 에피소드였다. <벌거숭이>는 <밀착>에서 함께 영화를 찍은 네 여자가 쫑파티를 한다는 느낌이었다. 이들을 바닷가로 보낼까, 나이트클럽에서 싸움을 벌이게 할까, 생각이 많았고, 인물도 다섯편 중에서 가장 많이 등장했다. 여자들에게 깊이 들어가고 싶었는데 밖으로 돌출된 부분만 다루었다는 느낌이 들어 두고두고 아쉽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여자들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내가 남자니까 남자영화는 재미없나보다. (웃음) 여자는 정말 남자와는 다른 인간인 것 같다.

누군가 <동상이몽>에서 ‘뿅점’을 찾고 싶다면 <다음 여자>의 주인공인 녹음기사 상희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청각에 집착하는 그녀는 벗은 몸이 부딪치는 소리를 녹음하고 오직 소리 때문에 <깊은 그림>의 배우 미상에게 이끌린다. 미상이 소파에 엎드린 상희의 엉덩이를 쓰다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매우 긴 장면은, 보기 드물게 남녀 모두 에로틱한 감정을 느낄 만하다. 상희를 연기한 김윤희는 촬영 도중 캐스팅된 두명 중 하나였다. 노출과 섹스신의 강도가 가장 높은데도 영화를 이해할 만한 시간은 가장 적었다. “진짜 촬영감독 아니냐”는 의혹을 샀던 박기사 역의 김성일과 진솔한 연기를 보여준 나 감독 역의 임정은이 미리 현장에 내려와 분위기를 익혔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감독은 단호했다. “촬영하기 전에는 항상 ‘감독님∼’ 이랬다. 강도를 낮추고 싶었던 거지. 하지만 나는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배우가 이 영화의 에로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벗고 안 벗고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면서도 봉만대 감독은 노골적인 이 에피소드가 붕 뜬 느낌이 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고, 존경하는 틴토 브라스처럼, 매우 에로틱한 엉덩이를 거북하지 않게 보여주었다.

조각조각을 헤집고 다시 붙여보아도 <동상이몽>은 모를 영화다. 에로영화라고 보면 실망하겠지만 에로틱하다는 걸 부인할 수 없고, 뒤엉킨 구조가 낯설지만 호응은 뜨겁다. 그 뿌리를 캐물어도 감독 또한 고개를 젓는다. 모든 건 그저 그냥 시작된 일이었다면서. 어쩌면 봉만대 감독 또한 다섯개 에피소드들과 더불어 변해온 것은 아닐까 싶다.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영화는 마지막 <디렉터스 컷>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모든 인물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그러니까, 이런 느낌이다. 영화를 DVD로 보면 본편을 보고 서플을 본다. <동상이몽>은 영화를 만들기까지의 서플을 전부 보고 진짜 영화를 보는 거다. 나는 그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때로는 주인공이지만 때로는 조연으로 밀려나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다섯 그리고 하나

<동상이몽> 시리즈, 6개의 에피소드

동상이몽 01. <땀의 향기> 배우지망생 지혜는 사랑의 상처를 안고 있다. 집 앞에서 우연히 만난 소설가 형수를 사랑하게 된 지혜는 그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연기연습을 하곤 한다. 형수는 천진하고 단순한 그녀를 보며 소설을 쓴다. 그러나 사랑은 순식간에 고통으로 뒤바뀐다. 현재와 과거, 현실과 오디션장을 오가는 <땀의 향기>는 봉만대 감독의 말에 따르면 “여덟 가지 색채를 가진 영화”다.

동상이몽 02. <밀착> 나정은은 형수의 소설을 각색한 <깊은 그림>을 찍고 있는 신인감독이다. 야한 장면 찍는 데 능숙하다는 이유로 고용된 촬영감독 박기사는 고집세고 자기주장 뚜렷한 나 감독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스탭들도 줏대를 잃어가는 감독에게 불만을 터뜨린다. 나 감독은 주연배우 연실과 강아지 몽실이를 향해 마음을 털어놓지만 촬영은 고되기만 하다. “전문분야를 다루다보니 지루할 것 같았다. 그래서 좀더 드라마틱한 여성감독과 남성 촬영감독의 갈등을 끌어들였다”고.

동상이몽 03. <다음 여자> 녹음기사 상희는 귀가 성기나 마찬가지인 여자다. 소리를 듣고 흥분하는 그녀는 친구 정은의 부탁으로 대타 녹음기사를 해주기 위해 <깊은 그림> 현장에 내려간다. 그곳에서 상희는 듣기 좋은 소리를 소유한 주연배우 미상에게 끌리게 된다. 가장 에로영화에 가까운 에피소드. 봉만대 감독은 오감에 집착하는 여인을 그리고 싶었지만 결국 청각으로 범위를 좁혔다.

동상이몽 04. <깊은 그림> 베낀 그림을 파는 화가 미상은 호수를 건너 정자로 찾아온 여인들의 나체도 그리곤 한다. 그 여인들이 탄 배를 젓는 소녀 사공 연실은 혼자 미상을 좋아하고 있다. 은밀하게 오고가던 두 남녀의 마음이 통하는 듯하던 무렵, 연실은 뜻밖의 사건에 휘말린다. 대사가 적고 롱테이크가 많은 영화. 대중의 호응이 가장 높았다.

동상이몽 05. <벌거숭이> 제작자는 나 감독에게 <깊은 그림>을 다시 찍으라고 요구한다. 나 감독은 고집스럽게 저항하지만 흥행이라는 부담 때문에 뜻을 꺾고 만다. 그러나 장애는 남아 있다. 연실은 몸으로 승부하는 배우가 되지 말라던 나 감독에게 대들면서 재촬영을 거부한다. “나도 나 감독처럼 현장에서 의미없는 변덕을 부리곤 했다. 그래서 배우의 입장에, 제작자와 매니저의 입장에 서보려 했다”고 말하는, 봉만대 감독의 개인적인 체험이 진하게 묻어나는 에피소드.

그리고 <디렉터스 컷>이다. 다섯개 에피소드를 편집한 <디렉터스 컷>은 나 감독과 형수와 지혜로부터 비롯된 이야기이고, 봉만대 감독이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영화라고 한다.

편집 권은주·디자인 김순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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