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사랑에 관한 이미지들의 재구성, <리컨스트럭션>
2005-02-16
글 : 심영섭 (평론가)
<리컨스트럭션>의 사랑을 읽는 3가지 키워드

“여기 사랑에 의해 취소된 그 사람이 있다. 이 취소로부터 나는 하나의 확실한 이득을 취하기도 한다. 어떤 우발적인 상처가 나를 위협하면, 이내 나는 그 상처를 사랑의 감정이라는 현란한 추상성 안으로 흡수하여, 부재하기 때문에 더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을 욕망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킨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매혹은 과거의 시련이다. 매혹은 과거의 포옹이라는 표현이 더 낫다.”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장 르누아르 감독의 <암캐>는 세명의 허수아비 인형이 연극무대 위에 나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며, 영화를 시작하고 있다. 첫 번째 허수아비 인형이 말한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부터 우리는 악은 항상 처벌받는다는 메시지를 담은 일련의 사회드라마를 보실 겁니다.” 그러자 두 번째 허수아비 인형이 말한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부터 우리는 대단히 윤리적인 코미디 한편을 보실 겁니다.” 그러자 세 번째 인형이 말한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들의 말에 주목하지 마세요. 이제부터 펼쳐질 영화는 코미디도 드라마도 아닙니다. 주인공들도 영웅이나 악당이 아닙니다. 당신과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세명의 주요한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그, 그녀, 그리고 다른 남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이죠.”

<암캐>의 첫 장면을 연상케하는 크리스토퍼 보에 감독의 <리컨스트럭션>의 시작은 실상 신기하지 않다. 허공에 둥둥 뜬 담배꽁초와 함께 “이건 영화다. 모두 허구다”라고 말하는 이 장면은 무수한 감독이 시도했던 지적인 방식의 영화 만들기에 대한 동참선언과 그 자리를 함께한다. 자의식의 날을 세우고 관객과의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무수한 영화사의 전통 한가운데 서서, 그러나 크리스토퍼 보에는 장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아프다.” <리컨스트럭션>의 관람 형태에서 열쇠는 후자에 있다. 당신은 이 영화에 대해 가슴이 아팠는가? 사랑에 대해서라면. 적어도. 그건 <리컨스트럭션>의 가장 말랑말랑한 부분에 속한다.

키워드 1. 사랑은, 의심하면 떠난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 아메에게 매혹된 알렉스는 그녀와 꿈같은 첫날밤을 보낸다. 그녀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라이터를 호텔에 두고 온다. 그러나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알렉스는 여자친구도 아버지도 가장 친했던 친구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기이한 현실에 부딪힌다(크리스토퍼 보에는 이러한 설정에 대한 영감을 자크 앙리 라르티크의 사진에서 얻었다고 한다. 알렉스가 아메를 놓치게 되는 지하철 벽에 걸려 있던 거대한 사진). 사랑을 하면 세상이 뒤바뀐다. 인생이 재구성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더 생생한 콧날을 지녔고, 더 창조적인 머리를 지녔으며, 더 정서적인 가슴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머리를 잘랐을 때처럼, 승진을 했을 때처럼, 사랑을 시작하면 자아 변용이 시작된다.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을 다짐하고 새로운 선택을 한다. 사랑의 확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어깨에 내려앉았을 때, 사람들은 대개 지금 이 자리의 과거를 떠나고 싶어한다.

분명 알렉스가 당하고 있는 정체성 상실과 과거와의 단절은 감독 크리스토퍼 보에가 전달하고 싶은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은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은 사랑이 떠나가는 반대의 과정, 사랑의 상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알렉스는 의심했기 때문에 아메를 잃었다. 오르페우스 신화를 변주한 것이 분명한 이 장면에서 알렉스가 지하철에서 뒤를 돌아본 순간 아메는 사라진다. 아메의 남편이자, 작가이며, 영화의 내레이션을 맡고 있는 오거스트는 영화 속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자에게 사랑이란 필수품이다. 사랑없인 살 수 없다. 그 사랑은 결심하고 행한 의식적 선택이다. 그러나 남자는 사랑이 불시에 찾아오길 원한다. 사랑을 계획하길 원하지 않는다. 사랑은 떠맡게 된 것이다.” 알렉스가 사랑을 떠맡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메 대신 여자인구인 시몬느와 키스한 순간, 그녀가 날 사랑할까라고 의심하는 순간, 에우리디체는 사라져버린다. 이제 아메는 알렉스를 알지 못한다.

가슴이 아팠는가? <봄날은 간다>를 보았을 때처럼 가슴이 아팠는가?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이 말랑말랑한 솜사탕 같은 사랑의 아포리즘을 떠나야 한다. 오르페우스가 걸었던 더 어둡고 침침한 길을 따라 영화를 한번 더 뒤집어봐야 한다. 이제 또다시 리컨스트럭션을 리컨스트럭션해야 한다.

키워드 2. 사랑은, 무의미한 기억의 뭉치다

알렉스는 사실은 오거스트가 쓰고 있는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일지 모른다. 오거스트의 펜 끝에서 알렉스와 아메의 기억은 지워졌다 나타났다 다시 지워졌다를 반복한다. 아메와 알렉스는 서로를 만났다는 사실을 한 차례씩 번갈아가면서 까먹었는데도 서로에게 다시 끌린다. 영화 전체가 오거스트가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한 구절의 글귀라고 생각하면 <리컨스트럭션>의 해독은 의외로 싱겁게도 쉬워진다. 그리하여 오거스트의 존재는 영화 속에서 일종의 전지자의 목소리와 신의 시선으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 영화의 부감숏은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부감숏처럼 일종의 신의 눈길과 일치하는 지점에서 영화를 내려다본다. 그는 지도의 한 지점처럼 가까이 있지만 자꾸 엇나가는 사랑의 궤도를 달리는 아메와 알렉스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한다. 크리스토퍼 보에는 아메와 알렉스의 극단의 클로즈업 숏에 교환되는 시선, 사랑의 시작을 점화하는 인간의 마음 길을 박아놓고는 그것을 다시 관조하는 메타적인 시선, 잔인한 신의 눈길을 심어놓았다.

그러나 사랑의 운명성에 대해 통탄하기 이전에 이 점을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사진작가인 알렉스는 카메라를 지녔다. 그러나 작가인 오거스트는 펜을 지녔다. 기실 <리컨스트럭션>은 감독이 자청해서 기존의 ‘사랑 이야기’에 두손과 두발을 다 묶인 채, 영화라는 매체가 이야기에 포박당하고 포위되었을 때도 무엇이 남겠느냐는 혹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거대한 의문부호와 같은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굳이 덴마크 출신으로 ‘포스트 도그마’ 세대인 크리스토퍼 보에와 라스 폰 트리에가 이끄는 도그마 운동과의 사소한 연관성이라도 찾는다면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리컨스트럭션>에는 흔들리는 카메라도 없고, 반드시라는 제약이 붙은 조명이나 촬영, 사운드에 대한 도그마의 금기도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감독의 두손과 두발을 묶을 후 영화라는 매체에 성찰하자는 어떤 방법론적인 아이디어만큼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알렉스의 아메에 대한 끊임없는 추적과 소유의 욕망은 이미지를 잡으려 허공에다 손짓하는 영화감독들의 어떤 노력과 매우 흡사하다.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오거스트는 상징계의 그물망을 형성하는 대타자, 담지자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바로 그 촘촘한 상징계의 그물망을 미끄러져 빠져나간다. 남편의 시선을 피해 다른 남자의 품으로 달겨가는 아메처럼.

크리스토퍼 보에는 사랑 안에서 이미지를 사고한다. 고속으로 달리는 전철과 코펜하겐이라는 도시의 길거리 촬영과 자크 앙리 라르티크의 사진과 반복되는 그러나 조금씩 달라지는 이미지의 구성 방식 안에서 기억과 이미지와 사랑의 문제를 연결시킨다. 그리하여 그는 사랑이 꿈이라면, 과거가 소환하는 기억의 시련 혹은 축제라면 영화 안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 또한 그러하리라고 믿는 것 같다. 언어는 무의식처럼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사랑을 구성하는 기억과 이미지 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끊임없이 현재로 되돌아오는 의미없는 기표들의 부메랑이며 기어이 고통의 중추를 통과하여 피질에 도착하는 엉켜진 실 뭉치들이다.

키워드 3. 사랑은,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대체 사랑과 사랑의 기억에 대해 사고하는 영화들은 왜 이다지도 비슷한 결론에 이르는 것일까. 사랑과 기억의 문제를 다룬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는 피할 수 없는 ‘사랑의 현재성’, 끊임없이 의식의 표피로 귀환하는 사랑과 기억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손을 심장보다 높이 들라는 유지태의 말을 의식의 수준에서 기억해낸 이영애는 기어이 헤어진 애인과 재연장전에 돌입하려 든다. 역시 우연의 일치인지 이 영화의 주인공들과 똑같은 직업을 지닌 사진작가와 작가가 등장하는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클로저>에서 불륜에 빠진 주인공들은 의식의 통제를 넘어 진실의 미로를 따라 우왕좌왕 헤맨다. <클로저>라는 제목, ‘더 가깝게’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사랑은 점근선을 향해 치닫지만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수취인 불명의 편지와 같다. 또한 <리컨스트럭션>이 제기하고 있는 사랑의 문제, 특히 기억의 미로 속에서 다시 떠오르는 고통스런 사랑의 기억을 지워내고 싶어하는 의식과 이를 영혼 가장 깊숙한 곳에 저장하려는 무의식과의 불협화음은 짐 캐리가 주연한 <이터널 선샤인>에서도 반복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짐 캐리의 기억을 지워내는 외과의사는 <리컨스트럭션>에서 펜 하나로 아메와 알렉스의 기억을 지워내는 오거스트와 정확히 일치하는 위치에 서 있다.

크리스토퍼 보에는 한 인터뷰에서 ‘영화는 유혹이다!’라고 말했다. ‘영화는 비밀을 드러내는 마술사 같다. 그러나 같은 동작에 새로운 트릭을 쓰면 우리는 또 속고 만다.’ 그는 영화광이고 장 뤽 고다르와 데이비드 린치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레오스 카락스를 사랑한다. 크리스토퍼 보에는 “최고의 클로즈업은 전에 만들어졌고,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리컨스트럭션>은 이런 영화광 크리스토퍼 보에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랑의 이미지들에 대한 재구성일지도 모른다. 새롭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재미있는 퍼즐놀이에 또 속고 마는. 그러니 ‘당신은 그리 재능있어 보이지 않네요’라며 크리스토퍼 보에를 처음 본 순간 라스 폰 트리에가 던졌던 이 멘트는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이 시선에 앞서는 시선이라면, 영혼에 기댄 영혼이라면, <리컨스트럭션>은 기억에 앞서는 기억의 돌림노래이다. 처음처럼 그러나 여전히 똑같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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