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일본에서 만난 한국 독립영화 [2]
2005-03-22
글·사진 : 오정연

“독립영화는 사회를 지킨다”-황철민

상영작 <프락치> 필모그래피 <퍽햄릿> <팔등신으로 고치라굽쇼?> <옥천전투>

“저렇게 때깔나는 실험영화가 있다니!” 황철민 감독이 이미지포럼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1985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이다. 독일 유학 무렵 그가 일했던 독립·실험영화 상영관 ‘라거할레’가, 이미지포럼에서 만들어진 일본 실험영화를 상영했던 것. 그러나 “일본의 독립영화는 최대한 유예시켜야 하는 우리의 미래”라고 말하는 그는, 더이상 일본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70년대 이후 슬럼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신변잡기 일색으로 흐르게 된 일본의 독립영화”는 그저 사회의 노후함을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독립영화가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거의 없지만, 사회의 바로미터가 될 수는 있다”. 황철민 감독은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역동성을 예술의 유정(油井)에 비유한다. 네오리얼리즘이나 누벨바그 등의 새로운 영화적 흐름은 그 유정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 그는 문화적 생산보다 소비에만 신경을 쓰는 오늘날의 암울한 영화현실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것은 “독립영화라는 영혼”이라고 역설한다.

그에게 있어 세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하나다. 독일에서 남매간첩단 사건의 프락치를 양심선언시켰던 본인의 직접 경험이 모티브가 된 <프락치>는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독재의 이데올로기적 잔재를 근심하고, 매체의 가능성을 고민한다.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 극영화를 오가던 그의 모든 작업은, 다른 이들은 시효가 지났다고 치부했던 거대 담론을 향하고 있었다. “독립영화의 정신을 지키는 것은 물리적 나이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청년정신이 살해된 이 시대에 후배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오랫동안 살아남아야 한다.”

<프락치>

황철민 감독은 최근, 기러기 아빠를 소재로 한 “진짜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더이상 관객을 상대로 한 실험을 하지 않겠다”며 구상한 상업영화라니 짐짓 비장미가 느껴진다. 일종의 전향처럼 들리는 그의 계획은 그러나 철저히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한 전략적 선택이다. 조금 큰 규모로, 좀더 일반적인 영화언어를 사용하여, 대중에게 익숙한 스타를 기용하더라도 한국사회와 역사에 대해 발언하려는 진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결심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상업영화를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독립영화인”이라는 그의 말은, 흔한 변명처럼 들리지 않는다. 기러기 아빠의 애틋한 사랑과 외국인노동자의 상황을 나란히 제시하며 한국사회의 현재와 과거를 대비시킬 것이라는 그는, 이 작품이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 만한 멜로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파스빈더가 보여줬던 멜로영화의 사회성을 회복하고 싶다는 것이 황철민 감독의 조심스런 고백이다.

“발언의 의지가 독립영화의 매력”-이송희일

상영작 <동백꽃 프로젝트-보길도에서 일어난 세 가지 퀴어 이야기> 중 <동백아가씨> 필모그래피 <슈가힐> <굿 로맨스>

황철민 감독에게 멜로가 현실적인 방법론이라면, 이송희일 감독에게 멜로는 극진한 자기반영이다. 총 여섯개의 필모그래피 중 퀴어멜로가 3편, 이성애 멜로가 1편. 그는 이와 같은 장르적 편중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벌어진 우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단순한 자기반영성으로 그의 영화적 취향을 말하는 것은 다소 성급한 일. <슈가힐>과 <동백아가씨>는 결혼을 선택한 게이와 그의 감춰진 연인, 그리고 게이의 아내를 삼각구도로 내세운다. 토니 레인즈는 “일반적으로 게이 감독들은 커밍아웃과 이에서 비롯된 폭력을 개인적 입장에서 반영하는 단계를 거친다”고 말하며 곧바로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이송희일 감독의 남다름을 지적한다. 그의 영화 속에서 이성애자들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결혼으로 인해 동성애자 못지않은 피해자의 입장이 되곤 한다. 제도, 그리고 강요된 사회적 관계란 그처럼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픔과 슬픔이 신파의 힘인 것 같다고 말하는 그는 현재, 자신의 대표작 <굿 로맨스>를 장편상업영화로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다. 30대 중반의 여자와 10대 소년의 사랑과 갈등을 그린 <굿 로맨스>는, 국내외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수작임에도 단 한번도 TV에서 방영된 적이 없다. <굿 로맨스>가 만일 중년 남자와 젊은 여자의 사랑을 다룬 것이었다면 얘기가 다르지 않았을까. <굿 로맨스>는 그저 평범한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송희일 감독은, 대중이 가진 윤리적 편견을 무력화하려는 날선 무기로서 통속적인 장르를 기꺼이 껴안는다. “이제서야 파스빈더와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를 다시 보면서, 여태껏 왜 그렇게 생각없이 멜로를 찍었는지 후회하고 있다”는 고백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편견을 체화한 감독이 지닌 본능이 얼마나 예리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한다.

<동백아가씨>

현재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청년필름 김광수 대표와 함께 작업 중인 이송희일 감독. 그는 이미 한 차례 제작자의 무리한 간섭을 못 이기고 상업영화 데뷔를 미룬 바 있다. 그러므로 충무로의 자본을 가지고 영화를 찍는다는 것만 다를 뿐, 영화제작을 앞둔 자신의 입장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세상에 발언하려는 거친 의지가 독립영화의 매력”이기에, 이번 영화를 무사히 찍고나면 또다시 직접 카메라를 들고 독립영화의 기치를 높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이미지포럼의 적극적인 관객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다소 냉정한 편이다. “관객의 반응이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큰 힘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독립영화의 모토가 발언임을 생각할 때 특정 게토 안에서만 열렬히 유통되는 문화는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건 틀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이 우선”-채기

상영작 <빛나는 거짓> 필모그래피 <애절한 운동> <빛 속의 휴식>

이송희일 감독과 함께 독립영화집단 젊은 영화에서 활동했던 채기 감독은, 영화적 방법론과 관련해 언제나 이송희일 감독과 첨예하게 논쟁해왔다. 형식의 실험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하려는 그의 영화적 방식이, 진부해 보이는 신파를 통해 대중의 윤리를 공격하는 이송희일 감독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일. 돌이켜보면 논쟁은 치열했지만 언제나 정답은 없었다. 채기 감독은 자신의 두 번째 영화 <애절한 운동>을 완성한 98년, 어떤 태도로 영화를 만들 것인지를 결정했다고 회고한다. 당시 그의 고민은 “마치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듯 보이지만 특정한 독해를 강요하는 것에 불과한 내러티브영화에 대한 거부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뒤로 그는, “설명을 뛰어넘는 이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영화가 존재할 것”이라는 결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꾸준히 달려왔다. 이런 자신의 입장을 주류영화에서 관철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작업을 계속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덕분에 비교적 일찍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일상적인 직·간접 경험 속에서 떠오르는 개인적인 이미지를 꾸준히 메모하여 재구성한 시나리오를, 촬영 당시의 우연과 필연의 힘으로 완성한다는 채기 감독의 최근작은 <빛나는 거짓>. 우주로 떠나는 남자와 강원도에 다녀오는 남자, 제주도로 혼자 여행을 간 여자의 이야기가 황량하게 이어진다. 한때 상식적인 영화언어를 거부한 그의 작품을 마주한 관객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런 질문쯤은 이제 즐기며 넘기게 되었다는 채기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실험영화가 아닌 그저 영화로, 독립영화 역시 그저 영화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해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의 대중영화가 좀더 다양한 영화들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마이 제너레이션> 같은 영화가 대중영화가 아니라 성공한 ‘독립영화’”로 여겨지는 것은 그리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다. 채기 감독은 그간, 편협된 한국 대중영화의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노력해왔다. 그가 시시콜콜한 논쟁들을 거듭해야 하는 인디포럼의 작가 프로그래머라는 위치를 받아들인 것은, “영화를 계속 만들기 위해서는 내 영화가 틀어질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는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빛나는 거짓>

“당신 영화의 정치적인 측면이 무엇인가”라는 토니 레인즈의 질문에, 채기 감독은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 바 있다. 그는 김곡·김선 감독이나 황철민 감독처럼 영화를 통해 정치적인 발언을 앞세우는 감독만을 조망하는 언론의 태도가, 독립영화 안에서 또 다른 의미의 선정성을 부추기는 것을 우려한다. 이는 개봉영화, 그리고 특이한 경력과 극단적인 정치성을 견지한 감독에게만 귀를 기울이는 영화언론을 향한 따끔한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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