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일본에서 만난 한국 독립영화 [3]
2005-03-22
글·사진 : 오정연

“형식상의 급진성과 내용상의 프로파간다”-김선

상영작 <자본장 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 필모그래피 <반변증법> <시간의식> <빛과 계급>

“노골적인 프로파간다가 좋다.” 지난해 쌍둥이 형인 김곡 감독과 함께 <시간의식> <반변증법>을 들고 이미지포럼을 찾았던 김선 감독의 말이다. 독립영화가 정치적인 선언을 뒤로 감추고, 좀더 대중적인 화법을 구사하면서 충무로 제작자들에게 구애를 던지기 시작한 지도 오랜 일.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이른바 문화적 세례를 받아 탈정치화됐다는 90년대 후반 학번의 입에서 튀어나온 선언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착취는 반복되고, 욕망은 충족되지 못하며, 언제나 공급은 수요를 초과하여 공황을 부르는 악몽 같은 자본주의를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자본당선언>은 그 숨막히는 순환의 구조를, 엄격한 영화적 형식에 적용해 완성했다. 김선 감독에게 가장 큰 아쉬움은, 지루한 반복과 의미없는 차이라는 주제를 강조하려다보니 영화가 다소 지루해진 점. 실제로 <자본당 선언>의 러닝타임은 115분. 아마도 이중 3분의 1은 반복되는 순환을 표현하기 위해, 같은 장면을 약간의 차이를 두고 되풀이하는 데 사용됐을 것이다.

그동안 이들은 메를로 퐁티, 마르크스, 네그리 등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오는 사상가들의 이론을 영화적 화법으로 재해석하는 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런 이들의 작업이 관객에게 지적 무력감과 지루함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화 속에서 이들이 담아내려는 개념은 단단해져갔고, 이를 영화로 옮기는 비주얼과 내러티브는 점차 유연해졌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가장 마지막까지 남을 화두는 바로 “무엇이 영화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김선 감독은 이에 대한 자신들의 대답이, “형식상의 급진성과 내용상의 프로파간다”를 동시에 이뤄내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통해, “형식적 절대주의를 통해 독립영화의 외연을 확장시키려는 쪽과 액티비즘을 기반으로 영화 생산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쪽으로 나뉘는 오늘날의 독립영화의 두 가지 입장을 합일시킬 수 있을 것 같다”고.

<자본장 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

김곡·김선 형제는 현재, 장편영화 <뇌절개술>의 촬영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영화로 옮기려는 문자 텍스트가 선행하지 않는, 일반적인 극영화의 내러티브를 견지한 최초의 작업이 될 이 영화는,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정선 카지노를 배경으로 한다. 텍스트의 기계적 해석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의 노력은, 형식은 물론이고 내용 역시 철저히 영화적인 방식을 취하려는 것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과연 이들의 예상대로 관객과의 폭넓은 소통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 똘망똘망한 형제감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기 하나를 손에 넣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이미지로 사고하는 자유로운 ‘영화’를 만들 뿐”-손광주

상영작 <제3언어> <단속평형> 필모그래피 <삶은 계란>

<단속평형>을 본 김선 감독은 “무엇이 영화인지를 아는 사람이 만든 영화”라며 부러움에 치를 떨었다. “‘좋은 시나리오가 좋은 영화를 낳는다’는 말은 옳지 않다. 좋은 시나리오는 좋은 드라마를 낳을 뿐이다. 좋은 영화는 촬영과 편집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손광주 감독은, 영화적 사고가 철저히 몸에 밴 사람이다. 각종 사전제작지원에 응모하기 위해 시나리오가 필요했기에 부득이하게 완성할 수밖에 없었던 <단속평형>의 시나리오는, 현장에서 그를 옭매는 가장 큰 제약이었다. “영화란 이미지로 사고해야 하는데, 시나리오를 들고 현장에 가면 자꾸만 글을 그대로 영상에 옮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를 발견한다. 현장에서 이미지를 둘러싼 즐거운 고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괴로웠다.” 그런 면에서 장르를 불문한다면서도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를 필수적으로 제출할 것을 요구하는 숱한 독립영화 지원공모는, 그에겐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다. ‘모든 영화는 시나리오가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믿음이 그에겐 상당한 폭력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관객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도록 도움으로써 진정한 다양성을 즐기게 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형식적인 다양성이라는 독립영화의 마지막 목표를 정조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관객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스토리마저 배격하는 건 아니다. 그의 최근작 <단속평형>은 소개팅할 상대가 던질 만한 질문 ‘어떤 음악가를 좋아하세요?’에 대한 대답을 고민하는 젊은 여피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헨델에서 베베른에 이르는 근·현대 음악가들에 대한 재기발랄한 영화적 제시와 함께 한국 근대사가 병치되는 이 영화 최고의 장점은 유머. 내러티브와 영화적 형식을 다양하게 구사하면서 자연스럽게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그의 영화는 주류영화는 도저히 줄 수 없는 쾌감을 안겨준다. 그래서인지 “<제3언어>가 부산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자본당선언> 같은 영화도 영화제에서 일반 관객을 만나는 것을 보고 희망을 얻었다. 당분간 쉬지 않고 비디오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는 그의 말은 유난히 반갑다.

<자본평형>

미국에서 영화학교를 졸업한 그는, 독립영화에 대한 별다른 자의식 없이 작업을 진행해왔다. 그런 그가 “주류란 결국, 충무로처럼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우리는 이래야 해’라면서 일방적인 입장을 강요하고 벽을 쌓는 행위 그 자체”라는 야무진 한마디를 건넨다. 이는 때때로 패배주의적 시각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가능성을 한정짓는 독립영화인들이 기억해야 할 소중한 충고다.

“대중과 만나고 싶지만, 대중의 정체를 모르겠다”-신재인

상영작 <신성일의 행방불명> 필모그래피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그런 거 말고 일본 자주영화에 대해서 취재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일본에서 만난 한국독립영화’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신재인 감독이 처음으로 건넨 말이다. 사카모토 준지, 쓰카모토 신야 등의 일본 감독들이 꾸준히 일정한 기술적 완성도와 규모를 견지한 35mm영화를 만들어내는 현실이 못내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는 어렵게 완성한 기이한 장편 데뷔작 <신성일의 행방불명>을 배급하기 위해 한국의 여느 독립영화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고군분투했던 그의 지난날, 그리고 충무로에서 애타게 연출부 자리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과거를 어느 정도 반영한다. 이제 그는 “미카엘 하네케가 부른다면 모를까, 더이상 연출부에 욕심은 없다”고 말한다. 이는 충무로로 대변되는 주류영화에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것과도 동일한 선언으로 들린다.

“온 마음을 다해 대중에게 영합하고 싶기는 한데 문제는 대중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난감함을 토로하는 신재인 감독은 자신의 마인드가 상업영화 감독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지금보다 훨씬 그로테스크하고 어두웠던 <신성일의 행방불명>의 전반부를 코믹하게 바꾼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흔히들 독립영화의 필수조건이라고 여기는 정치성에 대해서는, “미시적으로 정치적인 영화 정도라고 해두자”며 명확한 대답을 피한다.

<신성일의 행방불명>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작가영화와 대중영화, 실험영화와 극영화, 정치성과 비정치성, 논리와 비논리 사이에 자리한 그의 영화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는, 아마도 ‘영화적 쾌락’일 것이다. 신재인 감독은 이제 다음 작업을 위한 기지개를 켤 것이다. 그것이 알려진 것처럼 <김갑수의 운명>이 될지 그보다 적은 돈으로 찍을 수 있는 또 다른 장편이 될지 혹은 (각종 영화제 상금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단편이 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경제적 여건이 허락하는 한 그의 쉼없는 작업은 계속될 것이라는 것. 충무로를 향한 애절한 구애를 거두고 혼자만의 작업을 계획한다는 그의 모습은 오늘날 적지 않은 독립영화 감독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독립영화의 현재는 딱 거기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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