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타이틀]
모은영의 오리엔트 특급 <녹차의 맛>
2005-04-06
글 : 모은영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커피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소박하고 은은한 맛과 향기가 때로는 상쾌하게, 때로는 알싸하게 번져오는 녹차. 지난해 부천영화제의 최고 인기작 중 한 편이었던 이시이 가쓰히토 감독의 <녹차의 맛>은 질 좋은 녹차처럼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가족의 일상과 교감, 성장을 담는다. 어두운 화면 위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짝사랑하던 소녀가 전학을 가든 날 소년은 소녀가 탄 기차를 쫓아 가슴이 터져라 내달린다.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멈춰 선 소년. 그런데 영화의 정체가 드러나는 건 이제부터다. 소년의 이마에서 난데없이 기차가 쓰윽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렇듯 평범함에서 시작해 느닷없이 끼어드는 엽기적이고 기발한 상상력과 기이함은 영화를 관통하여 흐르는 양념 같은 장치다. 물론 메인 코스는 ‘기차소년’(?)이 일원인 ‘하루노 가족’의 일상이다. 애니메이터에 재도전하는 어머니, 최면치료사로 가끔 식구들에게 천국을 선사하는 아버지, 행위 예술가와 변태의 중간쯤인 괴이한 할아버지, 자기 자신의 환영을 보는 조숙한 막내딸, 하릴 없이 어슬렁거리는 외삼촌과 생일을 자축한다며 엉터리 노래를 작곡하고 있는 친삼촌. 무료한 표정으로 마루에 앉아 있거나 괴상한 손동작을 하거나 모두 모여 밥을 먹는 것이 가족이 하는 일의 전부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 평범한 일상을 비집고 엽기적이고 기이한 상황과 웃음이 속출한다.

영화 속에서 할아버지와 친삼촌이 부르던 엽기적인 노래 ‘산이여(山よ)'가 놀랍도록 어이없어서 오히려 한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고 어느 순간 동화되는 것처럼, 관객 역시 그들의 범상치 않은 일상에 서서히 매혹된다. 이쯤 되면 엽기 코믹만화가 연상될지도 모르나 영화의 호흡은 오히려 한 템 늦춘 듯 천천히 흘러간다. 하지만 사실 결코 조용하지만은 않다. 사람들의 고함이나 과장된 효과음 대신 푸른 숲을 흔들며 달려가는 바람소리, 풀벌레, 새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들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영화를 채운다. 튀지 않지만 섬세하게 들려오는 사운드와 온통 투명한 초록빛인 화면의 조화는 제목처럼 ‘녹차의 맛’을 고스란히 화면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DVD로 맛보는 <녹차의 맛>이 2%쯤 더 즐거운 것은 이러한 섬세함과 함께 영화 속에서 미처 만나지 못한 이야기들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중 극중에서 어머니가 완성해 옛 동료들에게 선보였던 애니메이션 <슈퍼 빅>의 완성버전(어머니의 옛 동료로 ‘안노 히데아키’가 깜짝 출연한다. 그 외, 카메오 출연도 화려하기 그지없다)은 절대 놓치지 마시길. 행여 할아버지와 삼촌의 ‘산이여‘ 노래를 여전히 잊을 수 없다는 분들을 위해서는 러닝타임 무려(!) 5분의 DVD도 별도로 출시되어 있다. 영어자막은 아쉽게도 본편만 지원한다.

애니메이션 "슈퍼 빅"
가운데가 안노 히데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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