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 명장면의 비밀 [1] - <올드보이> <그때 그 사람들>
2005-04-19
글 : 이종도
촬영감독 8인이 말하는 명장면 탄생의 비밀

아, 잊을 수 없는 그때 그 장면!

김기덕, 박찬욱, 홍상수, 이창동, 봉준호, 장준환, 임상수, 김지운 등 많은 젊은 작가들이 1990년대 말부터 한국영화의 지평을 비약적으로 확장했다는 데 동의하기는 쉬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작가와 함께한 김형구, 홍경표, 김우형 등 새로운 세대의 촬영감독이 화면의 때깔을 더 빛나게 했다는 데도 흔쾌히 동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높은 기술적인 완성도와 더불어 촬영이 그저 폼이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에도 성실하게 복무하면서 한국영화는 많은 질적인 성취를 거두었다.

도제수업을 거쳐서 입봉하는 전통적 수련을 거치기도 하지만, 김형구를 위시한 이들 새로운 세대들은 미국과 영국 등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바로 촬영감독이 되면서 충무로의 인력구조를 다변화했다. 전통적 수련과정을 거친 이들도 해외의 흐름을 호흡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키웠다. 4월의 양대 기대작이었던 <주먹이 운다>와 <달콤한 인생>이 감독의 역량 못지않게 촬영감독의 때깔도 기대를 모은 데는 이런 한국영화의 ‘본원적인 기술 축적’이 있기에 가능했다. <친구>에서 동수가 칼에 찔리는 마지막 장면, <살인의 추억>의 여중생 시체검시 장면, <올드보이>의 장도리신 등 최근 문제작들의 궁금한 장면을 직접 촬영감독에게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촬영현장의 팽팽한 공기와 촬영감독의 산고가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다. 신작 촬영으로 시간을 낼 수 없었던 몇몇 촬영감독을 만나지 못한 건 아쉬움이지만, 여기 모인 쟁쟁한 여덟 감독의 명장면은 그 아쉬움을 달래주고도 남을 것이다.


<올드보이> - 일당백 결투 살풍경의 장도리신

정정훈 촬영감독: 레일 타고 오른쪽으로 수평이동하면서 한컷에 OK

“AB형 손들어.” 오대수가 장도리로 철웅(오달수)의 이를 뽑은 뒤 감금방의 어깨들과 일당백으로 맞서는 살풍경. 박찬욱 감독은 이런 상황에서 뜻밖의 농담을 던진다. 그러나 마음 놓고 웃기에는 어깨들이 너무나 빽빽하게 복도를 메우고 있다. 50mm 망원렌즈가 오대수의 머리 위를 수직 돌리로 올라서서 복도 끝까지 보여주고 있다. 폐소공포증적 상황이다. 이제 오른쪽 벽이 사라질 것이다. 흔히 ‘덴깡’으로 불리는 벽 허물기를 하지 않으면 좁은 세트 안에 카메라가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대수가 적들을 덮치러 가는 컷이 이어진다. 천장 위의 철제 조명설치대(일명 아시바) 위에 트랙을 단 뒤, 핸드헬드로 찍은 연결장면이다. 이윽고 일당백 결투장면을 단 하나의 컷에 담아낸 장도리신.

정정훈 촬영감독은 오대수, 상대역, 결투장면별로 100컷씩 찍기만 해도 벌써 300컷이 소요되는 장면이었다고 떠올린다. 주어진 시간은 파주 세트장에서 단 사흘. 하루는 리허설에 기자들을 상대로 한 현장공개로 그냥 보내야 하니 정확히 이틀. 이틀에 300컷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박찬욱 감독이 농담조로 한 컷으로 가보자고 했다. 남들 안 하는 것 해보자는 실험성보다는 일정의 압박을 타개하려는 의도가 앞섰던 것이다. 한컷 안에서 오대수는 기진맥진하게 싸워야 했고 이 지독한 피로감이 화면에 묻어나며 오대수는 비로소 연민의 대상이 된다. 17번째 테이크를 고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힘이 넘치는 다른 장면이 많았고, 오히려 주먹 합도 맞지 않았지만, 여기엔 최민식의 고독감이 물씬했다. 티가 나는 구석은 CG로 이어붙였다.

장도리신은 카메라 본체를 움직이는 키그립팀과 카메라 감독이 한 호흡이 되어 레일을 타고 오른쪽으로 수평이동하면서 만들었다. 24mm 카메라 렌즈 앞엔 그러데이션 필터를 달아서 화면 위아래에 입체감을 주었고, 천장 위에 설치한 형광등 빛이 푸르스름하게 떨어지면서 거칠고 황량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여기에 블리치 바이 패스(필름 은입자를 씻어내지 않고 현상하는 것) 기법으로 채도가 낮아지고 콘트라스트가 증가하면서 질감이 더 나게 되었다.

장도리신이 끝나면 엘리베이터가 나오지만 여기는 미리 찍어둔 광교의 지하 주차장이며, 주차장 나오는 통로는 장승백이의 지하 주차장이다.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한줄기 빛은 햇살이 아니라 강렬한 조명이다. 바깥엔 비가 내렸다. 오대수를 위해 태양은 아무런 빛도 준비해두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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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0mm 망원렌즈를 썼다. 이 장면을 찍고 리버스숏으로 오달수가 동료들에게 실려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2. 장도리신은 왜곡이 거의 없는 24mm 렌즈를 썼다. 만약에 대비해 카메라 두대로 찍었지만 원신 원컷으로 가게 되어 나머지 한대가 찍은 것은 쓰지 않았다.

3. 오대수가 적들을 다 물리치자, 카메라는 10mm 광각렌즈로 바싹 오대수의 얼굴에 붙는다. 피로에 지친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잡히고(그래서 여자배우들에게는 잘 쓰지 않는 렌즈다), 목에 연결한 분사기에선 핏물이 흘러나온다.

4. 오대수가 적들을 소탕하고 지하를 빠져나오는 장면. 10mm 광각렌즈로 잡은 카메라가 트랙을 따라 그의 뒷모습을 잡는다. 오대수와 건물 기둥이 이지러져 나타난다.



<그때 그 사람들> - 주 과장이 시해 현장 돌아보는 부감숏

김우형 촬영감독: 이층 높이로 쌓은 비계 위에 트랙 달고 지미집 이용

(영화가 아닌)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고 일부 언론의 의도적인 홀대에, 게다가 사법부의 린치까지 당했지만 <그때 그 사람들>의 미덕은 적지 않다. 대표적인 미학적인 성취 가운데 하나라고 할 만한 것으로 궁정동 연회장 부감숏을 꼽을 수 있다. “가장 좋았던 건 영화 중반에 부감으로 카메라가 궁정동을 훑는 장면”(김영진), “안가를 적신 흥건한 피와 시체를 천장에서 내려찍은 장면의 미학적 완성도는 감동적”(<조선일보>),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장면 중 하나는 중앙정보부의 고문실들을 순례하는 트래킹숏…(중략) 이 장면은 성실한 경호원들과 순박한 요리사들의 곳곳에 흩어진 시신을 공중 트래킹으로 응시하는 후반부의 숏과 조응한다”(허문영).

바로 주 과장(한석규)이 시해 현장을 돌아보는 양수리 세트장면이다. 감독이 주문한 부감숏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 천장에 케이블을 달아 카메라를 설치한 뒤 트래킹을 해야 할까. 아니면 비계(일명 아시바. 건축공사 때에 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설치하는 임시가설물)를 복도 옆에 쌓은 뒤 지미집(무인크레인)으로 찍을 것인가. 주 과장이 연회장에서 복도, 경호원 대기실, 식당을 거쳐가는 이 긴 공간 옆에 모두 비계를 쌓는다면 대공사가 될 텐데. 김우형 촬영감독은 ‘가장 무식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비극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기 위해, 좁은 공간을 최대한 입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VP(Variable Prime: 줌과 일반 렌즈의 장점을 두루 합친 렌즈) 기종 가운데서 1번(16∼30mm. 광각효과가 난다)을 쓰기로 했다.

천장과 벽을 넘어다니며 카메라는 ‘특권적’ 높이에서 베일에 싸인 절대권력의 밀실을 내려다본다. 쇠창살 사이로 들어간 카메라 렌즈를 따라 비밀스런 궁정동 실내를 처음 보게 된 관객은 유혈 낭자한 부조리극의 끝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를 착잡하게 바라보게 된다.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2인자 차지철(정원중)이 나뒹구는 장면으로 스쳐지나갔다면 김우형 촬영감독의 말대로 지루한 연결 숏밖에는 안 됐을 것이다. 그러나 주 과장(한석규)이 시체를 확인하고 불을 끄고 나가는 과정으로 처리함으로써 관객이 주 과장의 죄의식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강력한 정서적 환기력을 얻는다. ‘너는 그때 어디에 있었느냐’라고 묻는 다큐멘터리 앞뒤 삽입장면이 관객에게 저마다 다른 입장을 물었다면, 이 장면은 누구나 똑같이 느꼈을 죄의식을 소환하는 것이다.

이층 높이로 쌓은 비계 위에 트랙을 달고 지미집이 한석규와 함께 움직이면서 자아내는 비장감은, 내내 차갑게 문제의 사건을 바라보던 영화의 시선을 뜨거운 것으로 만든다. 어두운 조명과 한석규의 그림자, 바닥에 흥건한 경호원의 피가 어우러지며 문제의 역사적 공간에 고뇌의 표정을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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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 과장이 차지철을 내려다보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2인자로 호가호위하던 차지철의 죽음을 카메라는 아주 차디차게 바라보고 있다. 이 장면부터 세트 옆에 지은 2층 높이의 비계에서 지미집에 달린 카메라가 레일을 따라 복도 아래를 훑어나간다.

2. 박정희 대통령 시신이 나가면서 떨어진 피 위를 주 과장이 지나치고 있다. 마룻바닥에 희미하게 조명이 반사해 흰색으로 빛나고 있다.

3.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죽임을 당한 청와대 경호원의 시신. 한석규의 시선은 관객에게 착잡함과 비장함을 두루 안긴다. 좁은 복도가 광각렌즈로 인해 넓고 꽉 차게 보인다. 현장을 최대한 한 화면 안에 다 드러내기 위해서다.

4. 연회장과 복도의 천장을 뜯어내 지미집을 설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식당 주변 세트까지 뜯어낼 수는 없었다. 부감숏 장면은 그래서 단번에 연결되지 않고 한번 끊어진 뒤 식당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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