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 명장면의 비밀 [3] - <범죄의 재구성> <살인의 추억>
2005-04-19
글 : 이영진

<범죄의 재구성> - 구로동 샤론 스톤이 최창혁과의 관계를 털어놓는 장면

최영환 촬영감독: 필터 컬러 반대로, 현재를 초콜릿 과거를 그린·블루로

“이 영화는 머리와 싸우는 영화가 아니라 눈을 홀리는 영화다. 눈은 항상 부주의하고 비논리적이며 우매한 감각이다”(정성일), “끊임없이 넘나드는 과거와 현재의 아귀를 빠뜨림 없이 촘촘하게 맞춰내는 것만으로도 기특하게 여겨진다”(김은형),

<범죄의 재구성>에 대한 비판이든 찬사든, 수시로 등장하는 플래시백을 빼놓지 않고 언급한다. 어떤 맥락에서 쓰였든 영화 속 플래시백이 관객을 속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엔 최동훈 감독뿐 아니라 최영환 촬영감독의 공(?)도 적지 않게 들어 있다. 리얼사기극 <범죄의 재구성>을 가만 보자. 과거와 현재가 다른 색감으로 나눠져 있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다 그런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똑같지 않다. 대개 영화가 따뜻한 색감으로 과거를, 차가운 색감으로 현재를 그린다면, 이 영화에선 정반대다.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반대로 필터를 쓰면 어떨까 싶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전부 사기꾼들 아닌가. 그들이 말하는 과거는 진실이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처럼 생생하다.” 인물들이 펼쳐놓는 과거에 대한 ‘구라’들은 보통 현실을 묘사하는 차가운 색감과 한데 붙어 영화 속에서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길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다. 최영환 촬영감독은 최동훈 감독에게 이러한 아이디어를 전했고, 둘은 관객을 속이는 적절한 테크닉이라는 데 합의했다. <범죄의 재구성>의 현재 장면에 초콜릿 필터가, 과거 장면에 그린이나 블루 계열 필터가 쓰인 이유다. 서로 진실이라고 우기는 과거와 실제로 어떤 진실도 존재하지 않는 현재를 쉬지 않고 마주하게 하면서 영화는 매순간 관객을 향해 ‘난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말은 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하는 알쏭달쏭한 질문을 던져댄다.

서인경(염정아)이 어리숙해 뵈는 최창호(박신양)를 꾀어 처음으로 동생 최창혁(박신양)에 관한 이야길 흘리는 대목은 카메라 이동만으로 시간 벽을 허무는 장면. 현재-과거-현재로의 시간 이동이 이뤄지는데 이 장면에서 눈치채지 못하면 스피디한 편집 때문에 필터를 바꿔낀 제작진의 접시 돌리는 솜씨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필터만으로 가를 순 없어 과거를 보여줄 땐 현재의 장면보다 강한 콘트라스트를 줄 수 있는 필름을 썼고, 과감하고 역동적인 줌렌즈를 썼으며, 원색을 살리는 선명한 현상을 염두에 뒀다. 최영환 촬영감독은 과거(낮)와 현재(밤)를 오가는 동안 파트너인 김성관 조명감독이 가장 힘들었다면서 “똑같은 공간이지만 과거와 현재, 낮과 밤, 서로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야 했던 터라 이 장면에서 조명팀의 일이 두배가 됐다”고 말한다.

서인경(염정아)이 어리숙해 뵈는 최창호(박신양)를 꾀어 처음으로 동생 최창혁(박신양)에 관한 이야길 흘리는 대목은 두 차례 카메라 이동만으로 시간 벽을 허무는 장면. 현재-과거-현재로 시간 이동이 이뤄지는데 이 장면에서 눈치채지 못하면 스피디한 편집 때문에 필터를 바꿔낀 제작진의 접시 돌리는 솜씨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살인의 추억> - 여중생의 사체 검시 장면

김형구 촬영감독: 변형된 블리치 바이 패스 기법으로 채도 낮게

뭉게구름을 머금은 푸른 하늘이 열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황금색 들판이 펼쳐진다. <살인의 추억>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오프닝과 엔딩의 강렬한 원색 풍경이 아닐까. 하지만 카메라 들고 미궁 탐사에 나섰던 김형구 촬영감독 본인은 “과거를 어떻게 채색할 것인지, 어떻게 그 톤을 일관되게 끌어갈 것인지가 더 중요했다”고 말한다. <비트>의 김성수 감독부터 <역도산>의 송해성 감독까지, 김형구 촬영감독에 대해 하나같이 “드라마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평하는 것을 감안하면, 눈에 번뜩이는 장면을 순간 캡처하는 것보다 전체 영화의 톤과 리듬을 충실히 따르는 게 <살인의 추억>의 비주얼을 제대로 음미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1980년대는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끔찍하고, 암울한 시절이다. 망각하고 싶지만 우린 그 시대에 대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저 빛바랜 이미지로 과거를 표현할 순 없었다.” 오프닝과 엔딩을 제외하면 영화는 무채색에 가깝다. 일례로 박두만(송강호)과 서태윤(김상경)이 머무르는 경찰서를 보라. 유일하게 튀는 건 때묻은 벽의 푸른색 선풍기다. 화면의 채도를 낮추어 음울한 과거를 드러내되, 제작진은 프레임 안의 인물들과 사물들이 어둠에 묻히는 걸 원치 않았다. 김형구 촬영감독이 <살인의 추억>에서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장면은 연쇄살인범에 의해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여중생의 사체 검시 현장. 추적의 실타래를 잃어버린 두 형사의 한숨과 분노가 눈물과 비를 타고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것도 이러한 제작진의 의도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손에 넣기까진 쉽지 않았다. 크랭크업을 앞두고 충남 서천의 한 야산에 세팅을 해둔 촬영날, 하늘이 예상과 달리 ‘쨍’ 하고 빛났다. 원하던 잿빛 구름은 없었고, 스탭들의 입에선 “어디 노는 구름 없나” 하는 푸념만 나왔다. 그렇다고 촬영을 접을 순 없었다. 엑스트라가 100여명 이상 집결한 상황에서 포기할 순 없어 김형구 촬영감독은 직사광선을 차단하기 위해 나무 사이에 버터플라이(?)를 매달았지만 허사였다. “클라이맥스로 도약하는 지점인데 허연 화면에 여우비가 부슬부슬 오는 장면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고심 끝에 김형구 촬영감독은 김무령 프로듀서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촬영은 연기됐지만, 어찌된 일인지 무심한 하늘은 좀처럼 구름을 허락지 않았다. 한없이 하늘만 바라볼 순 없는 일. 서울로 귀환한 제작진은 3주 뒤에야 경기도 파주에서 머릿속 그림을 구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연쇄살인범에 의해 살해된 여중생의 창백한 얼굴 앞에서 서태윤(김상경)은 죄책감에 휩싸이고, 박두만(송강호) 또한 진범이 누군인지 도대체 알 수 없게 되자 체념의 한숨을 내쉰다. 분노의 감정을 머금고 박현규(박해일)의 집으로 향하는 서태윤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는 박두만. 전체 화면의 채도를 낮추기 위해 제작진은 필름의 은입자를 남겨두고 현상하는 블리치 바이 패스 기법을 사용했다. 콘트라스트가 너무 심해져 어두운 부분은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은입자 농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듀프 네거티브(오리지널 네거티브를 다른 네거티브 필름에 복사해서 만든 필름)를 따로 만들어 현상했다. 모든 인물들이 원색 대신 무채색에 가까운 옷을 입고 있고, 우산 또한 모두 검은색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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