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혈의 누> [1]
2005-04-26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김대승 감독의 두번째 영화, 역사 추리극 <혈의 누>의 새로운 도전

조선의 근대, 그 핏빛 미궁 속으로

숨기려 들면 더 궁금한 법이다. 조선시대 역사 추리극 <혈의 누>는 제작기간이 3년이나 되지만, 제작진이 약속하고 입을 봉한 탓에 좀처럼 얼개가 드러나지 않았던 영화.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이를 과학적인 수사방법으로 뒤쫓는 조선시대 수사관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저 <장미의 이름> 같은 모양새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할 뿐이었다. 하지만 5월4일 개봉을 앞두고, 슬쩍 들여다본 <혈의 누> 판본은 그런 추측이 완전히 틀렸음을 말해줬다. CG, 믹싱, 색보정이 마무리되지 않은, 게다가 VHS로 본 불완전한 판본이었지만, 피 묻은 칼자루를 쥔 자가 누구인지 묻는 데만 영화가 진력하지 않았음을 눈치채기란 어렵지 않았다. 봉건의 썰물과 근대의 밀물이 빠르게 교차하는 시대를 상상으로 불러들인 제작진은 피비린내 진동하는 연쇄살인극 아래 무엇을 숨겨둔 것일까. 직접 눈과 귀로 확인하는 것이 호기심을 달랠 최선의 방법이겠지만, 그때까지 참을 수 없다면 <혈의 누> 미리 보기, 김대승 감독의 인터뷰, 그리고 제작진의 240일 동안의 사투를 묶은 글로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격변의 시대는 상상의 터를 제공한다. 거기에는 매몰된 진실이 있고, 밀려난 자의 울부짖음이 떠돌고, 살아남은 자의 두려움이 숨어 있다. 혹은 그러하다고 상상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역사 추리물은 종종 이 가능성에서 시작한다. 예컨대, <혈의 누>는 7년 전 육지에서 벌어진 천주교도들의 박해와 연관하여 벌어진 사건으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조선시대의 어느 섬을 배경으로 한다. 역사 추리극의 주인공은 자신이 처한 어느 곳(것)에 거대한 미궁의 망이 짜여져 있음을 알게 되고, 그걸 풀어보려는 안간힘은 긴장의 역학을 가시화하며 언제나 반쯤만 성공한다. 그 반쯤 실패하거나, 반만 복원 가능한 불완전성이 역사 추리물의 동력이자 실체다. 혹은 거꾸로 그 불완전성의 근저를 다루고 싶을 때 역사 추리물은 적당한 대전제가 된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멜로드라마를 미스터리 구조로 매듭지었던 김대승이 두 번째 장편영화로 완성한 <혈의 누>는 바로 그런 점들을 담고 있는 역사 추리물의 어느 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5일간 벌어진 5건의 연쇄살인 사건

영화는 5일간 하루에 한건씩 발생하는 다섯 가지 방법의 연쇄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진행된다. 임금에게 상납할 만큼 좋은 재질의 제지를 생산하는 어느 섬마을. 조정에 상납하기 위해 제지를 가득 실은 선박에 원인 모를 불이 나고,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육지에서 이원규(차승원)와 최차사(김종원) 일행이 섬으로 들어온다. 제1일, 일꾼 중 한명인 장학수가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원규는 범인으로 또 다른 일꾼 독기를 지목하고 잡아넣는다. 제2일, 갇혀 있는 독기를 면회왔던 또 한명이 의문의 살인을 당하고, 제지소를 조사하던 이원규는 그곳에서 고의로 보이는 큰 사고를 당할 뻔한다. 제3일, 이원규는 옥에 갇힌 독기에게서 섬마을에 얽힌 어떤 원한의 전모를 듣는다. 7년 전 천주인들을 박해하던 그때 당시 제지소의 주인이던 강 객주는 알 수 없는 다섯 발고자에 의해 고발당했고, 조사를 한 토포사는 천주를 받들었다는 죄목을 달아, 본을 보이기 위해 “하루에 한 사람씩 닷새 동안 다섯 가지 방법으로 그 일가를 죽였다”는 것이다. 이원규는 이번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발고자 다섯명을 같은 방식으로 죽이며 복수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갇혀 있던 독기도 세 번째 희생자가 되고, 이제 남은 것은 두명의 발고자. 제4일, 이원규는 마을 세도가 김치성의 아들이자, 제지소의 실권자 김인권(박용우)과 사사건건 부딪치며 묘한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강 객주의 충실한 하인이었던 두호(지성) 역시 눈여겨본다. 마을 무당에게서 이 사건에 얽힌 또 다른 실마리를 얻게 되고, 네 번째 발고자를 찾아 내어 문초를 하지만, 그 순간 나타난 범인은 발고자를 죽이고 도주한다. 제5일, 이원규는 사건의 뿌리부터 송두리째 흔들릴 놀라운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다. 그즈음 마을에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비린내가 진동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복수극이 공존

<혈의 누>를 광의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구문물과 신문물이 혼융하는 시기를 영화의 배경으로 잡았다는 것이다. 근대성 연구자들이라면 이 영화를 전근대와 근대의 마찰을 뚜렷히 보여주는 예로 손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건의 발단이 되는 강 객주 일가의 처형 이유는 그가 신문물의 바람을 타고 들어온 천주교와 관련이 있다고 의심받은 데서 시작했고, 구문물의 주도자인 김치성의 말에 따르면 그 강 객주는 “반상의 질서가 엄연하거늘, 종놈들과 겸상을 하고 천한 백정놈에게 장부를 맡겨 그 질서를 어지럽히니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긴장관계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범죄자의 범죄방법(특히 선박에 불을 낸 방법)과 수사관의 수사방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범인이 도르래를 줄곧 이용할 만큼 신기술에 능통하다는 것과 그에 맞서는 이원규가 망원경을 사용하고, 안경을 쓰고, 수학에 능한 근대의 과학적 수사관이라는 점은 신기술의 경합처럼 보인다. 그러나 <혈의 누>를 지배하는 진짜 공포는 살아 있는 자가 벌이는 복수와 죽은 원혼이 일으키는 복수가 겹쳐서 진행된다는 것인데, 그 점에서 신기술을 대변하는 과학적 수사관으로서의 이원규와 구시대적인 믿음을 대변하는 무당이 이원적인 관계에 놓인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원규의 임무가 “귀신의 짓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라면, 무당의 역할은 귀신의 짓을 막는 것이다. 인간의 복수극과 원귀의 복수극이 <혈의 누>에는 동시에 있으며, 이것은 어떤 공포요소의 상승적 역학관계를 이룬다.

협의의 차원에서 영화 자체의 논리에만 집중하여 보는 것도 가능하다. 격랑의 시대, 매장되지 않는 거대한 비밀, 외지에서 온 조사관, 폐쇄적인 장소, 암묵의 공동체, 총명하지만 완결에 이르지 못하는 주인공, 그 주인공을 둘러싼 진실 등은 <혈의 누>의 내러티브 요소들이다. 반면 시각적인 요소도 강하다. 감독의 말대로라면, <혈의 누>는 “염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이 섬은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이 모여 사는 지옥에 관한 이미지”처럼 보여야 할 곳이다. 미술감독과 1.85:1의 비율로 준비를 맞췄음에도, 촬영감독이 제안한 2.35:1에 동의한 이유는 바로 그 “염치없는 인간들의 얼굴들이 화면 가득 진열된 장면을 찍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그 장면 하나 때문에 설득에 넘어갔다”고 말할 정도다. 영화의 화면비율을 바꾼다는 것은 큰 혼선을 초래할 수도 있는 문제다(실제로 첫 촬영날 찍었던 장면은 모두 버렸다고 한다). 즉, <혈의 누>의 2.35:1 화면비율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염치없는 인간들의 탐욕적인 심성을 담아내고 있는지를 주목해서 보는 것도 이 영화의 시각적 관람 포인트다.

덧붙이자면, 이원규가 탄 배가 끼적끼적 힘없이 물살을 타고 멀어져가는 마지막 장면은 가슴을 시리게 만든다. 김치성과 이원규가 독대하여 한판 서로 논쟁을 벌일 때 보이는 김치성의 독단적인 자태와 그의 뒤로 둘러싸인 병풍의 글씨는 함께 어울려 어떤 합일의 이미지를 만드는 묘한 힘을 갖고 있다. 제지소 안의 풍경을 상상으로 재현하는 장면은 인물들과 그 동선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세밀화의 한폭을 보는 것처럼 놀랍다. 그러나 오히려 애초 감독이 의도한 그 지점, 지옥처럼 보여야 할 장면은 인물들의 느슨한 관계와 갑작스런 도착 때문에 다소 미진한 정서를 준다. 정서를 포착한다는 것은 화면비율에 의지해서만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멜로드라마의 감성을 가진 추리극

요새 같은 전공분야 시대에 멜로드라마로 데뷔한 감독이 차기작에서 역사 추리극을 만든다는 것이 짐짓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은 두 영화를 같은 구성의 묘에 기대어 만든다. 혹은 이것이 주목해야 할 김대승의 방식일 수도 있다. 두 작품을 연계하는 것은 ‘플래시백’과 그 사용 방법이다. 예컨대 <번지점프를 하다>는 네개의 내러티브 시퀀스가 있고, 그것을 세개의 편집 덩어리가 구성적으로 채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적인 시간을 따라서 설명하면, 1983년으로 시작하는 인우와 태희의 이야기가 첫 번째, 2000년으로 시작하는 인우와 현빈의 이야기가 두 번째, 그 과거와 현재가 교차편집으로 만나지는 이야기가 세 번째, 에필로그처럼 붙어 있는 뉴질랜드에서의 이야기가 네 번째다. 이 네개의 내러티브 시퀀스를 구성하는 편집의 덩어리는 1983년으로 시작하는 인우와 태희의 장면들, 2000년으로 시작하는 인우와 현빈의 장면들, 그리고 ‘인우와 태희의 장면에서 생략되어 인우와 현빈의 장면에 끼어드는 플래시백’, 이렇게 세 덩어리다.

감독은 첫 번째 이야기의 거의 모든 신마다 두 번째 이야기 속 인물들이 기억해낼 수 있는 추억의 ‘단서들’을 하나씩 배분해놓는다. 새끼손가락 올리며 물건 집기, 절벽에서의 대사, 숟가락 에피소드, 라이터 등 이것들은 두 번째 이야기에서 차례로 등장하면서 첫 번째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동시에 감독은 첫 번째 이야기를 이루는 각각의 주요 신들의 일부를 정확하게 잘라내어, 두 번째 이야기에 붙여, 세 번째 이야기와 네 번째 이야기를 만듦으로써 전생의 기억을 찾는 ‘해답’처럼 사용한다. 우리는 플래시백을 보면서 사건의 전모를 알 듯이 그들 사랑의 영원성을 본다. 요약건대 김대승은 그냥 하는 말로 미스터리 멜로드라마를 만든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단서’를 배치하고, ‘해답’을 제시하는 추리물의 구성방식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영화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정서는 멜로드라마이지만 방식은 추리물인 영화가 <번지점프를 하다>이다.

<번지점프를 하다>를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은 <혈의 누>가 유사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소요소에 아직 말하기 이른 것들이 있지만, <혈의 누>를 전체적으로 관장하는 것은 플래시백이고, 그것들이 영화 전체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번지점프를 하다>가 추리물의 구성을 가진 멜로드라마였다면, <혈의 누>는 멜로드라마의 감성으로 그 추리들을 종합하여 수렴하는 형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어느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단서는 ‘X가 Y를 사랑한다’는 것이다(가정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범행 동기와 단서는 없고, 이것보다 중요한 플래시백 장면도 몇 되지 않는다. 플래시백은 아직까지 김대승의 영화적 출구이자, 무의식에 가까워 보인다.

묵직한 밀도감, 느슨한 인간관계

<혈의 누>를 보고 있으면 압착력이 느껴진다. 김대승은 영화의 밀도를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그런 감독이 아니다. 때때로 신의 접근도는 떨어뜨리면서, 영화 전체의 밀도는 높이는 그런 방법을 고안하는 것 같다. 플래시백도 이 전체 밀도에 있어서의 고려 대상일 것이다. 그는 만만한 마음으로 숏과 신을 붙이지는 않는다. <혈의 누>는 바로 그것에 힘입어 사건의 인과율에 매달리기보다 총합적인 전체의 밀도로 긴장감을 만들어내려는 독특한 노력을 구사한다. 그러나 <혈의 누>에서의 문제라면, 내러티브가 명확히 기능해야 하는 장르를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그 기능에 대한 기본적인 의무까지 벗어던지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몇몇 캐릭터 설정과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느슨하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예컨대 무당은 영화의 모티브와 맺고 있는 관계로 봤을 때 매우 중요한 위치로 영화 안에 배치된 인물이지만, 그 존재감이 너무 희박하다. 주인공 이원규의 경우에도 추리하는 사고 과정과 사용도구로 그의 학식을 알 수 있으며, 아비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 배경도 보여주지만, 정작 이 인물 자체의 내재성이 와닿지 않는다. 그건 김인권과 두호도 마찬가지다(덧붙이자면, 김인권 역의 박용우는 그의 출연작 중 가장 좋은 역을 만났고, 그에 비해 두호는 거의 미스 캐스팅으로 보인다). 인물들이 있는데 기능적이거나, 상징적인 자리에 더 가까이 있다. 설정에 대한 인과관계, 그러니까 사건에 대한 핍진성이 아니라 제한적인 조건부여에 관한 이유가 부족하다. 예컨대 왜 다섯 발고자인가. 이건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며, 왜 다른 사람이 아닌 그들 다섯이 발고한 것인가? ‘염치없는 사람들의 지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 맨 앞에 선 이들의 염치없음이 설명되어야 하는 수고’가 있다. 그것이 없어 아쉽다.

어쨌거나 <혈의 누>는 신중하게 만들어진 영화다. 빈 구석은 찾을수록 더 보이겠지만, 이미지에 대해서도 배려를 했고, 역사 추리물이라는 장르 안에 있어도 자기만의 방식을 찾기 위한 고민이 있다. 무엇보다 요새 유행하는 게임같은 영화가 아니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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