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없는 자들의 지옥을 보여주고 싶었다”
새벽까지 믹싱 작업을 하고 왔다지만 피곤한 기색은 없었다. “프린트 나오면 감독이 할 수 있는 건 없잖아요.” 개봉을 3주 앞두고 막바지 후반작업에 진력하고 있는 김대승 감독은 겉은 몰라도 요즘 “피가 마를 지경”이라고 말한다. 2년 가깝게 <혈의 누>와 씨름했던 그는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자신의 영화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복기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편집본을 보니 촬영장소 헌팅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전봇대야 어디든 꽂혀 있을 거라 예상했었지만 대부분의 바다에 양식장이 있어서 힘들었다. 포구마을 세트 부지도 알아봤는데 오목하게 들어간 적당한 곳은 이미 현대식 건물들이 다 들어서 있었다. 발품 팔아서 찾아낸 공간들을 영화의 전체 톤에 맞게 통일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장마와 배우 스케줄 때문에 한달 정도 촬영이 멈춘 기간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쫓기는 심정으로 헌팅했다.
-주요 촬영지가 남도였다. 과거 임권택 감독님의 연출부 시절 봐뒀던 곳도 많았을 텐데.
=굿판이 벌어지는 당산나무는 <서편제>의 송화가 동생과 헤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굉장히 좋아하는 장면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꺼내기가 싫더라. 임 감독님이 담은 정취만큼 멋지게 찍을 자신도 없고. 그런데 결국 마땅한 장소를 못 찾아서 택했다. 주변 경관이 변했고 섬 느낌을 주기 위해 돌담을 쌓아서 임 감독님께선 영화 보셔도 못 알아보실지 모르겠다. 극중 강 객주의 폐가도 <태백산맥>에서 나온 곳이고, <서편제>에서 진도아리랑 대목을 찍었던 청산도의 풍경들을 참고해서 영화 속 섬의 전체 룩(look)에 참고했다.
-촬영현장에서 리허설을 굉장히 중요시하던데. 나중에 들어보니 배우들의 즉흥 연기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차)승원씨가 그러던가? (웃음) 맞다. 리허설 굉장히 많이 한다.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때까지 테스트한다. 그리고 테이크는 되도록 많이 안 가려고 한다. 충분히 맞췄는데 슛 들어가서 엉뚱한 걸 하고 있으면 못 참는 스타일이다. 다들 나보고 똥고집이라고 하고 투덜이라고 한다. 근데 내 생각이 무조건 맞다고 그러는 게 아니다. 슛 들어가서 약속하지 않은 걸 했을 때 그 한 장면만 놓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하기 어렵다. 다음 장면이나 관련장면과의 관계를 생각해봐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그걸 판단할 만한 내공이 아직 내겐 없다.
-초반에는 배우들과 트러블도 적지 않았을 텐데.
=배우들은 불만이 있으면 얼굴에 티가 난다. 승원씨의 경우 첫날 1분30초짜리 롱테이크 장면을 찍는데 자꾸 움직이려고 해서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표정이 아니더라. 촬영이 한두 차례 더 진행되면서 그런 불만이 쌓였겠지. 얼마 뒤에 승원씨가 맥주 한잔 하자고 해서 갔는데 첫마디가 ‘불편합니다’였다. 판 깔아놨으면 ‘혼자 놀게 내버려두면 안 되냐’고 물어서 ‘못하겠는데요’ 했다. ‘모니터만 보고 계시면 안 됩니까, 카메라 앞에서 꼭 들여다보셔야 해요?’ 하기에 ‘전 그래야 하는데요’ 했다. 분위기 정말 살벌했다. 헤어지면서도 승원씨는 ‘독선은 집에 가서 하십시오’ 해서, 나도 지지 않고 ‘집에 가서 왜 독선을 부리냐’고 반문했다. 한동안 차승원하고 감독하고 한판 붙었다는 말이 돌았다. (웃음)
-어떻게 풀었나.
=다음 촬영 끝나고 승원씨가 캔커피 사들고 내 숙소로 왔더라. 냉장고가 이렇게 비어서 되겠느냐는 너스레로 시작해서 슬슬 자신이 생각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에 나도 내가 생각하는 원규에 대해 말했더니, 요런 연기는 어때요 하면서 실연을 하더라. 합의를 쉽게 봤다. 돌이켜보면 승원씨에게 고맙다. 그뒤론 나도 모니터 앞에 앉아서 승원씨한테 ‘괜찮아요? 그럼 OK’ 그랬다. 그때서부터는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구나 싶더라. 요즘엔 새벽 2시에도 잠 안 온다고 음악 믹싱하는 데까지 찾아온다.
-감독이 적극적으로 원한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 처음에 차승원이 원규를 한다고 해서 놀랐었다. 갓 쓰면 2m가 되는 배우를 사극에 써야 하다니. 그런데 본인 의지가 강했다. 원규라는 인물이 화면에 들어서면 장악력이 있어야 하는데 만나보니 가능할 것 같았다. 여수에서도 헬스 중독자처럼 운동하기에 왜 그러냐고 물어본 적 있다. 얼굴에 살 붙으면 얼굴에 감정이 안 붙는다고 그러더라. 욕심이 대단한 배우다. 징할 정도로. 언젠가 같이 멜로영화를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현장에서 임권택 감독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던 때는 없었나.
=수도 없이 했다. 조감독 한 작품 더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때도 많았다. 결말을 털어놔야 하는 것이라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신인배우가 컨디션이 나빠서 중요 장면을 반쯤만 보여준 장면이 있다. 30번 테스트 하고 20번쯤 슛을 갔는데도 원하는 걸 얻지 못했고 부아가 나서 캇, 한 다음에 최영환 촬영감독에게 잘라갑시다, 했다. 다음날 이 장면에 쓰일 음악을 조영욱 음악감독이 들고 왔는데 너무 좋았다. 나 자신한테 욕이 나오더라. 임권택 감독님 같았으면 어떻게든 빼냈을 텐데, 왜 난 집요하지 못했을까 싶었다.
-연쇄살인사건을 쫓는 조선시대 수사관 이야기에서 어떤 흥미를 느꼈나? 정작 영화에서 감독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던데.
=범인이 있을까, 어떤 반전이 숨겨져 있을까 하는 흥미만 주고 싶지 않았고, 사람들이 무참히 죽어나가는 상황을 장르적으로만 접근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안에 또 다른 어떤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또 주인공인 원규를 상황을 전달하는 스토리텔러 혹은 내레이터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궁리 하면서 옆길로 새기도 하고, 제자리를 반복하기도 하고, 고속도로를 타기도 하고, 그러다 1년이 갔다. 결국 내가 염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구나 깨달았고, 양심을 잃고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이 모여 사는 지옥에 관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원규를 밀어넣고 싶었다.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려고 하는 원규가 사실은 제 발밑을 파고 있었다는 그런 결론으로 끝맺고 싶었다.
-이전 인터뷰에서 극중 원규는 햄릿 같은 인물이라고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니 원규 이외의 등장인물들 또한 아버지와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어 있다.
=중·고등학교 때 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적어내라고 하면 아버지라고 썼다. 그래야 효자 같았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얼마나 비겁했나. 또 얼마나 치사했나. 누가 정권을 잡아도, 그래서 그 권력으로 누군가를 해쳐도, 제 삶을 보듬기 바빴던 분들이다. 그런 분들에 대한 연민을 사랑이라 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벗을 수 없는 굴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한번 다뤄보고 싶었다. 과거를 어떻게든 우리 시대로 끌어내고 싶었다.
-화면비를 2.35:1로 고집한 이유가 있나.
=민언옥 미술감독과 컨셉 이야기하면서 1.85:1로 생각하고 짰다. 장대 하나 서 있어도 거칠게 하늘을 찌르는 듯한 분위기를 내고 싶다고 해서 그러면 1.85:1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크랭크인 며칠 전에 최영환 촬영감독이 2.35:1로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위아래가 좁아진다고 생각하지 말고 좌우가 넓어진다고 생각하라고 설득했다. 시나리오 수정하면서 사실 염치없는 인간들의 얼굴들이 화면 가득 진열된 장면을 찍고 싶었는데 그 장면 하나 때문에 설득에 넘어갔다. 2.35:1 화면의 경우 클로즈업 찍으면 좋은데 바스트 숏은 별로다.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처음에는 많이 헤맸다. 클로즈업이라고 찍었는데 어정쩡한 바스트 숏처럼 나왔다. 첫날 찍은 건 다시 찍었다.
-과감한 생략 때문에 이야기 전개가 빠르게 느껴지지만 일부 관객은 불친절한 영화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사극 하면 벌써 고리타분하지 않나. 그걸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싶었고, 속도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컷을 많이 나누어 찍는다고 속도감이 얻어지는 건 아닐 테고. 예를 들어 지금 차를 마시다가 화장실 가는 장면을 찍는다 치자. 굳이 다 보여줄 필요가 없다. 차 마시다 곧바로 화장실에서 손 씻는 거 보여줘도 된다. 촬영 때나 편집 때나 불필요한 장면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속도감을 얻을 수 있다고 봤다. 강우석 감독은 이번 영화로 편집상 받으려고 하냐면서 불편하다고 했지만, 개인적으론 플롯상 속도가 충분히 붙었다는 판단이 든 순간에 긴 호흡으로 롱테이크를 찍을 장면도 보이더라. 최종 사운드 입히면 의도가 지금 버전보다 잘 전달될 거라고 본다.
-과거 강 객주의 사지를 찢는 거열장면에 현재의 원규를 갖다놓는 등 한 장면 안에서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한데 뒀다.
=이 장면은 다섯번의 연쇄살인이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주인공 원규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처형장면을 볼거리로만 흘러가도록 두는 건 못 참겠더라.
-원규는 영화 속 주요 공간인 제지소에 당도하자마자 갑작스런 사고로 팔을 다친다. 이 장면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액션장면들이 최소한의 컷으로 상황을 간소하게 전달한다.
=중요한 건 차승원이 어떻게 다치느냐를 보여주는 게 아니다. 제지소가 너를 배척하고 있다, 어쩌면 이 공간은 살아 있을지 모르고 그래서 널 공격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느낌을 주고 싶었다. 넘어진 원규가 허공을 바라보면 흔들리는 밧줄이 보이는데 음악도 그 부분에 쓸 거다. 그래서 정두홍 무술감독에게 너무 복잡하지 않게 가자고 했다. 다만 원규가 흰 종이가면 쓴 범인을 말타고 뒤쫓을 때는 긴박하고 멋있게 찍고 싶었다.
-<번지점프를 하다>에 이어 이번에도 플래시백이 수시로 등장한다.
=<대부> 3편을 시간 순서대로 보면 지겨울 것이다. 이민 온 이야기부터 한다고 생각해봐라. 영화연출은 현실적인 시간을 어떻게 영화적인 시간으로 바꿔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래시백은 흥미로운 장치다. 현실적인 시간의 일부를 빼내서 속도감을 높이고, 이 빼두었던 카드를 관객에게 스토리를 설명하거나 주인공을 난관에 빠뜨리거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쓸 수 있다. 생략한 사실들을 후반부에 누구를 위해 봉사하게끔 하느냐 결정하는 것이 현실에 대한 재해석 방법 중 하나라고 여긴다.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원규는 뭍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그런 원규의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클로즈업을 했다 카메라가 멀어지는 식으로 찍었는데 파도가 울렁거려 결국 일부는 CG로 해결해야 한다. 중요한 장면이라 매끄럽게 보이도록 계속 만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