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혈의 누> [3] - 제작기
2005-04-26
글 : 이영진
8개월간의 <혈의 누> 제작 과정 포토 코멘터리

피도 눈물도 없는 제작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장르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라는 기획이 구체화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나리오 작업에만 3년 가까운 시간을 들인 <혈의 누>는 지난해 6월28일 고대하던 첫 촬영을 개시했지만, 북상한 장마전선 때문에 크랭크인을 한 뒤 곧바로 한달 가까이 쉬어야 했다. 이후에는 찌는 듯한 무더위와 싸워야 했고, 이들의 고난의 사투는 올해 2월이 되어서야 끝을 봤다. 제작진의 대장정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 어디 변덕스런 기상뿐이었을까. 남도의 바닷가를 돌며 피를 뿌리고, 눈물을 뿌리던 제작진의 하소연을, 여기 모아 담았다.

“양반 되기는 글렀군”

예를 갖추려면 몸가짐부터 바로 해야 한다 했겠다. 차승원, 윤세아, 박용우, 3인의 배우 또한 촬영 전 한달 동안 삼청각(三淸閣)을 드나들며 절하고 차 마시는 기본 예법을 숙지해야 했다. “옛 양반들의 놀이문화라는 게 상놈들이 따라하지 못하도록 비틀고 비튼 것이더군.” 차승원은 날 때부터 새끼손가락이 휘어 아무리 예법 배워봤자 차 마시는 동작을 똑같이 흉내낼 수 없었다고 너스레. 서울 북악터널 지나 만나게 되는 삼청각은 유신시대 요정 정치로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바로 ‘그때 그 장소’다.


폭염 속의 고사

경주 양동마을에 모여 고사 지내는데, 덩실 춤은 아니라도 명랑한 표정 하나 찾을 수 없다. 슬리퍼 끌고, 운동복 입고, 돈 봉투 든 차승원은 이중 가장 찌뿌린 얼굴이다. 돈이 아까워서? 가시밭길 행군이 걱정되서? 듣고 보니 아니다. 이유인즉, 10년 만에 찾아온 폭서 때문이란다. 그림자 짧으니, 머리 위에 해 떴겠고, 그렇담 분명 정오에 가까운 시각. 수은주가 30도를 넘어선 이날 시종 흐트러짐 없었던 이는 김대승 감독이 유일했다 한다.


진짜 같은 가짜 말머리

범인을 뒤쫓는 말탄 차승원의 얼굴 클로즈업 장면 촬영을 위해 제작진은 진짜 같은 가짜 말머리를 만들어 트럭 위에 실었다. <반지의 제왕> DVD를 보다 말타는 장면 촬영시 이와 똑같은 방법을 활용한 것을 본 최영환 촬영감독의 한마디에서 비롯된 이 아이디어는 특수분장사 신재호씨의 손끝에서 빚어졌다.


엑스트라, 음메 무서워

엑스트라를 실은 버스가 보일라치면 분장팀은 몸서리부터 쳤다. 전주, 부산, 여수 각지에서 몰려든 단역배우들은 각양각색 헤어스타일을 뽐냈고, 그때마다 분장팀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오전 촬영이 있을 땐 6시부터 줄세워 분장에 들어갔다 한다. 개당 20명 정도의 헤어를 매만질 수 있는 컬러 스프레이만 100개 이상 사용했다. 김대승 감독은 풀숏이라 하더라도 군중이 리얼해야 한다며 꼼꼼한 분장을 요구했다.


거기 자는 사람 나와요

예비군 훈련장이 따로 없었다. 초반엔 짱 박혀 자는 단역배우들 색출하느라 제작진은 무진장 애를 먹었다. 특히 촬영현장이 익숙한 노련한 엑스트라들 때문에 매번 머릿수 부족 사태가 벌어졌고, 현장은 범인을 잡아내려는 확성기 소리로 시끄러웠다.


<서편제>의 그때 그 나무

나무를 자세히 보라.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가. 전남 영광에 있는 이 덩치 큰 나무는 <서편제>에서도 등장한다. 김대승 감독이 연출부 시절 눈여겨봐뒀던 나무다. 10년 전과 달리 나무 주변은 이제 도로가 됐다. 종이를 실은 배가 뭍으로 나가기 전 동화도 사람들이 벌이는 굿장면 촬영이 이뤄진 곳. 미술팀은 나무 바로 옆에 있던 고추밭을 모조리 엎고 공수해온 돌로 담을 쌓느라 곤욕을 치렀다. 장구치는 분은 김혜경 씨. 인간문화재 김금화 선생의 제자인 그는 영화 속 굿판 코디네이터였다. 이 장면은 영화 속에서는 3분 정도 나오지만 워낙 규모가 큰 촬영이라 나흘을 찍었는데, 늦여름 돼지 썩는 냄새 때문에 모두들 기진맥진했다고 전해진다.


땡볕 아래 시체놀이

극중 강객주 역할을 맡은 천호진은 3시간 이상 걸리는 피범벅 분장을 하고 무려 4일을 땅바닥에서 죽은 듯 지내야 했다. 물엿 같은 끈적한 액체로 만든 피를 뒤집어쓰고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과 싸우며 달궈진 지반 위에서 뒹굴어야 했던 고통은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아깝다 7천만원

7천만원이 단번에 홀라당? 동화도에서 만든 제지를 한성으로 운송하는 함선은 청해진수산연구소에 의뢰해 진짜 목조로 만든 것이다.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함선 방화장면 촬영을 위해 제작진은 척당 7천만원이나 되는 이 배를 단번에 태웠다. 바다 날씨는 당최 가늠하기 힘든데다 조수 간만의 차도 너무 커서 촬영일을 정하기가 가장 어려웠다고. 사체가 발견되는 동굴장면 촬영 때도 조수 간만의 차이 때문에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스티로폼 뗏목에 카메라 실어서 접근한 해안 절벽 촬영 때는 갑작스럽게 차오른 물 때문에 2∼3분 안에 오케이 컷 간신히 건져내고 철수했다고.


이래봬도 최첨단 사극

사극이라 해서 첨단 테크놀로지 사용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극중 CG로 매만져야 할 컷만 142개다. 영화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이 장면은 전남 장흥에서 찍은 것. 20X10m가 넘는 거대한 ‘ㄱ’자 블루매트 뒤엔 차가 쌩쌩 달리는 국도가 있다. CG를 맡은 인사이트 비주얼이 공들여 매만지고 있는 장면 중 하나다. 미술팀이 만든 가짜 절벽은 진짜처럼 너무 자연스러워 제작진이 당황했을 정도란다.


여관 주인이 기절한 사연

에그머니나. 놀랄 법도 하다. 욕조엔 핏물 그득했고, 게다가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져 있었으니 이 광경 보고 어느 누가 가슴 철렁하지 않았을까. 분장팀이 머문 여관을 청소하기 위해 방문을 열어본 주인은 기절하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영화의 라스트를 장식하는 혈우(血雨)신 대규모 군중이 등장하는 터라 오케이가 쉽지 않은 상황. 게다가 폭풍우까지 몰아쳐서 촬영을 중도에 접기도 했다. 3일 이상 찍은 장면인데 NG나면 새빨간 옷 그대로 입고 카메라 앞에 설 순 없는 터라 의상, 분장팀은 카메라가 멈춰서면 빨랫감 모아, 머리에 이고 여관으로 직행하기 바빴다.


이제는 추위와 싸우다

10월로 들어서면서 제작진은 이제 더위가 아닌 추위와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됐다. 배우들의 입에선 허연 입김이 토해져 나왔는데, 입김은 대사와 맞물리는 것이라 CG로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고민이었다고. 살인극이 벌어지는 주요 공간인 제지소 세트 곳곳에 눈에 띄지 않게 온풍기들을 숨겨놓았지만 슛 들어가면 꺼야 하는 터라 난감한 상황. 여름 고생해서 난 걸 하늘이 알아준 것일까. 다행히 필름에는 한컷을 제외하곤 허연 입김이 담기지 않았다 한다.


1일 연출부 막내 지성

연출부로 변신한 지성. “뭐든 해보고 싶어했던” 지성의 의욕은 슬레이트를 들자 연출부 막내의 긴장으로 변했다.

사진제공 좋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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