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슈렉>과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전략 [1]
2001-07-12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그대 흉측해요, 우리 결혼해요”

초록괴물, 엽기와 도발로 미키 마우스 울리다

<슈렉>은 재미있다. 그건 분명하다. 관객도 잘 알고 있다. 미국에서 지난 5월18일 개봉된 <슈렉>은 첫주 4200만달러를 기록했고, 현재 2억달러를 넘어 순항중이다. 잘하면 애니메이션의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는 <라이온 킹>을 넘어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만약 <슈렉>이 <라이온 킹>을 넘어선다면, 그건 전대미문의 일로 기록될 것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도전했던 폭스나 워너가 모두 몰락하고, 창립 10년도 되지 않은 드림웍스가 겨우 5편의 애니메이션으로 디즈니를 능가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승리를 거둔 것은 신화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흥행만이 아니다. 모든 언론과 비평에서도 칭찬 일색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도 이렇게 찬사 일변도였던 적은 거의 없었다.

<슈렉>의 성공은 무엇보다 제프리 카첸버그라는 한 ‘영웅’에게 의존하고 있다. 80년대 말 <인어공주>의 성공과 함께 시작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흥의 주역 역시 제프리 카첸버그였다. 70년대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부진으로, 당시 디즈니는 TV와 테마파크에 주력하고 있었다. 애니메이션 파트를 맡은 제프리 카첸버그는 <인어공주>의 성공으로 새로운 애니메이션 시대를 열었다. <인어공주>는 80년대의 시대정신에 충실한 애니메이션이었다. 인어공주의 캐릭터는 사랑에만 빠진 ‘공주’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위해 몸을 던지는 반항적인 X세대의 자화상이다. 또한 평이한 드라마를 뛰어넘어 경쾌한 뮤지컬 형식으로 변주된 <인어공주>의 드라마투르기는 90년대까지 이어지며 아이는 물론 어른까지 꿈에 젖게 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전형으로 남았다.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와 현실의 모순을 동화적으로 지워버리는 수법까지 여전히.

94년 마이클 아이스너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제프리 카첸버그는 스티븐 스필버그, 데이비드 게핀과 함께 드림웍스를 차렸다. 음악은 게핀, 실사영화는 스필버그, 애니메이션은 카첸버그가 나눠 진두지휘한 드림웍스는 10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메이저로 굳건하게 자리잡았다. <아메리칸 뷰티>와 <글래디에이터>는 흥행은 물론 아카데미상까지 휩쓸며 기존 할리우드 메이저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슈렉>은 지금까지 디즈니가 한번도 이룩하지 못한 칸영화제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제프리 카첸버그는 크리스마스에 <슈렉>의 아이맥스 3D버전을 상영할 계획이고, <슈렉2>도 제작에 들어간다.

디즈니와 달라도 성공할 수 있다!

<슈렉>의 성공은 드림웍스의 창립 초부터 예견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카첸버그는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을 ‘동화를 스토리텔링의 기초로 삼는 디즈니의 전통과는 다르게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첫 작품인 <개미>는 경쟁상대인 <벅스 라이프>와 사뭇 달랐다. 디즈니의 ‘새로운 희망’ 픽사가 만든 <벅스 라이프>는 여전히 밝고 귀엽고 아기자기하지만, <개미>는 어둡고 뒤틀린 느낌이 든다. 성우를 우디 앨런에게 맡긴 것부터가 의외였다. 나름대로 행복하지만 집단주의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개미 사회에서 자유주의적인 주인공은 스트레스와 두려움을 느낀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인’의 고민을 툭툭 던지는 개미의 모습 위로, 선병질적이고 온갖 공포증에 시달리며 투덜거리는 우디 앨런의 모습이 겹쳐진다. <개미>는 <벅스 라이프>의 관객보다 한층 위의 관객을 타깃으로 삼았고, 유머도 훨씬 의미심장했다. <벅스 라이프>는 북미에서 1억6천만달러를, <개미>는 9천만달러를 벌었다. 단순하게 수치를 비교했을 때 <개미>의 패배라고 볼 수 있지만, <개미>의 제작비는 6천만달러였고, 게다가 드림웍스의 첫 번째 애니메이션이었다. <개미>는 디즈니의 노선과 다른 길을 걷더라도, 얼마든지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드림웍스는 애초부터 디즈니와는 선을 그었다. 폭스나 워너브러더스의 전략과는 달랐다. 폭스와 워너도 디즈니와의 차별성을 중시하기는 했지만, 디즈니에서 벗어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디즈니의 전략을 베끼면서, 조금만 다르게. 폭스의 첫 애니메이션 <아나스타샤>도 나름대로 완성도는 인정받았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성인의 사랑을 그리는 것도 이미 <포카혼타스>에서 디즈니가 했던 소재였고, 노래로 끌어가는 뮤지컬 구성도 마찬가지였다. <타이탄 A.E.>는 디즈니가 잘 건드리지 않는 SF애니메이션이었다. 그러나 무대가 우주이고, 외계인이 등장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를 게 없었다. 별다른 복선이나 수수께끼도 없이 악인은 징벌당하고 세계는 구원된다. 그런 주제와 구태의연한 스토리로는 유치원생도 잡기 힘들다. 결국 폭스는 <타이탄 A.E.>를 마지막으로 애니메이션 사업부를 접는다. 워너는 폭스보다 나았다. TV애니메이션은 디즈니 못지않은 명성과 노하우가 있었다. 하지만 극장용에서는 여전히 디즈니의 뒤를 따라갔다. <매직 스워드>는 벅스 바니처럼 확실하게 못된 주인공이 등장하지도, 감각적이거나 새로운 주제의식을 담지도 못했다. 그냥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농담을 45도 정도만 더 비튼 격이었다. 결국 워너는 <아이언 자이언트>라는 걸작을 만들고도 지레 항복을 하고 말았다. 떠다니는 디즈니의 불빛이 태양이라고 믿었다가, 숲에서 길을 잃은 형국이 된 것이다.

고정된 이데올로기는 가라!

드림웍스는 <개미>부터 차별화 전략을 편 것이 성공했다. 똑같이 디지털로 곤충의 세계를 묘사하면서도 <개미>와 <벅스 라이프>는 질감과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이집트 왕자>의 마케팅 전략도 디즈니와 차이가 있었다. <이집트 왕자>는 전통적 의미의 뮤지컬이 아니다. 그런데도 음반은 3가지 종류나 나왔다. 음악의 장르를 바꿔가며 <이집트 왕자>에서 영감을 받은 노래를 모은 것이다. <이집트 왕자>는 장난감을 만드는 대신, 책을 펴냈다. <이집트 왕자>를 본 사람들이 만족스러워 할 때, 그들의 감동을 확장시킬 수 있는 ‘상품’을 다른 방식으로 개발한 것이다. <슈렉>의 경우에도 원작동화 이외에 시나리오를 각색한 <슈렉>이 다시 나왔다. <치킨 런>은 영국의 아드만 프로덕션과 계약하여 만든 클레이애니메이션으로 전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유일한 실패작으로 기록된 <엘도라도>는 워너나 폭스의 실패와 비슷하다. <엘도라도>는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디즈니와의 차별성을 별로 느낄 수 없다. 약간 성인취향이라는 것, 약간 비틀린 유머가 등장한다는 것 정도였다. 드림웍스가 성공한 이유는 간단하다, 차별성. 폭스나 워너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보다는, 디즈니의 뒤를 따라가며 조금씩만 장식을 달리하는 안이한 전략을 세웠고 모두 실패했다.

<슈렉>은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무엇이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슈렉>은 전형적인 동화의 스토리텔링을 뒤집는다. 마법에 걸린 공주를 구해내는 기사가 있고, 그들이 사랑에 빠지는 해피엔딩 같은 건 <슈렉>에 존재하지 않는다. <슈렉>은 그저 자기 본성에 맞게 살아가는 ‘괴물’이 등장할 뿐이다. <슈렉>은 일관되게 두개의 칼을 휘두른다. 하나는 디즈니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동화를 뒤집는 것이다. 제페토 할아버지가 피노키오를 팔아치우고, 신데렐라와 백설공주가 치고 받고 싸우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슈렉이 끝까지 괴물로 남아 있고, 공주에게 걸린 마법이 예상과 다르게 풀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는 미국에서 엄청 유행했던 ‘정치적 공정성’(political correctness)이다. <슈렉>은 사소한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쓴다. 공주를 가두고 찾아오는 기사들에게 불세례를 안겨주었던 용은 말하는 당나귀의 애인이 된다. 슈렉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고, 파콰드를 제외한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다. 동화 속의 주인공들도 나름의 자리를 찾는다. <슈렉>은 기존의 고정된 이데올로기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원작동화, ‘못된’ 괴물의 지독한 이야기

하지만 <슈렉>의 ‘정치적 공정성’이 합당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단신인 파콰드의 콤플렉스는 시종일관 놀림감이지만 누구도 감싸주지 않는다. 파콰드는 이등신으로 희화화된, 악인의 스테레오타입이다. 공주의 마법은 풀리지만 그녀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 그게 원래의 모습이란 말인가? 원래 인간이 아니라 괴물?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는 마법이 풀리고, 벨과 행복한 미래를 약속한다. 야수에게 미녀를 허락하지 않은 것처럼, 슈렉에게도 미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일까. <슈렉>은 론 하워드의 <그린치>를 보는 것과 유사한 느낌이 든다. 슈렉은 진짜 악당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소외되었기에 스스로 ‘악인’이라고 자처하는 마음 착한 괴물이다. 사람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몰려올 때도 결코, 사악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그린치도 그랬다. 슈렉은 말하는 당나귀와 공주를 만나면서, 자신의 얼었던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낀다. 슈렉은 진흙으로 목욕을 하고, 들쥐 바비큐를 좋아하고, 개구리로 풍선을 만드는 독특한 취향의 존재일 뿐이다. 악당이 아니라 그냥 어느 정도의 커뮤니케이션을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다. 론 하워드의 <그린치>가 닥터 수스의 원작을 너무 예쁘게 덧칠했다는 비판을 받은 건 같은 이유였다. 닥터 수스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밝은 면만이 아니라 어두운 면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린치>는 그런 동화다. <슈렉>의 원작도 그렇다.

<슈렉>의 원작은 90년 발표한 윌리엄 스타이그의 동화다. 스타이그의 <슈렉>은 애니메이션 <슈렉>보다 훨씬 지독하다. 슈렉은 용과 싸워서도 이기는 고약한 괴물이다. 슈렉이 끔찍하게 여기는 것은 ‘아이들이 꽃밭에서 슈렉을 얼싸안고 뽀뽀’해주는 것이다. 슈렉의 부모는 그를 ‘네 몫의 못된 짓을 하라고 세상에 내보’낸다. 길을 가다 만난 마녀는 ‘너보다 훨씬 못생긴 공주를 만날 거야’라고 예언을 한다. 말하는 당나귀를 타고 가서 공주를 만난 슈렉은 “내가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는 까닭은 바로 당신은 너무 못생겼기에”라고 말한다. 공주도 “당신의 모습은 너무 소름끼쳐요, 우리 결혼해요”라고 답한다. 그래서 슈렉과 공주는 결혼한다. 그들은 “영원히 무시무시하게 살았대. 앞길을 막아서는 것은 뭐든지 겁주어 쫓아버리면서 말이야.” <슈렉>의 원작은 ‘못된’ 괴물의 이야기다. 공주는 마법에 걸린 게 아니라 원래 못생겼다. 애니메이션의 슈렉처럼 어쩔 수 없이 악당처럼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게 그들의 생존방식이다. 고양이가 나무 위로 기어오르고, 악어가 호수에 들어온 물소의 다리를 잡아채는 것처럼 단순한 생존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슈렉>은 원작의 컨셉을 가져오면서, 21세기의 대중적인 감각을 흠씬 풀어놓는다. <슈렉>의 엽기성은 이미 주류로 부상한 <심슨 가족> <비비스와 버트헤드> <사우스 파크> 등 TV애니메이션의 흐름을 가져온 것이다. 여기에 <매트릭스> <와호장룡>,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WWF 레슬링의 패러디는 물론이고, 디즈니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디즈니랜드 등 디즈니의 모든 것에 대한 지속적인 조롱이 가해진다. 심지어 파콰드가 디즈니의 회장 마이클 아이스너를 모델로 했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어쨌거나 제프리 카첸버그는 <슈렉>을 통해 공식적인 복수를 마무리지은 것과 동시에, 개인적인 원한까지 갚은 셈이다.

<슈렉>은 정말 교활하다. 기술적인 완성도와 함께, 이데올로기적인 ‘정치적 공정성’까지 <슈렉>은 꼼꼼하게 모든 것을 봉합시켜놓았다. 수십년간을 제왕으로 군림하던 디즈니가 <슈렉>처럼 모든 면에서 과거의 공식과 관습을 철저하게 되짚은 작품을 만들기는 어렵다. 최근 디즈니의 걸작이 간섭을 가장 덜 받은 작품이었던 <뮬란>이었고, 워너 역시 무기력한 통제의 틈에서 빚어져나온 <아이언 자이언트>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몸집이 커지고, 성공에 도취되면 이미 낡아버린 과거 ‘성공의 법칙’에만 몰두하게 마련이다. 제국의 몰락은 오만과 나태에서 비롯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걸작이 발상의 역전과 도발,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탄생한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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