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슈렉>과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전략 [3]
2001-07-12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슈렉> 제작자 제프리 카첸버그, 디즈니 회장과의 26년 애증 끝 승리

원더키드, 마침내 마법을 훔치다

<슈렉>의 영주 파콰드는 악당이다. 게다가 키가 아주 작고 얼굴은 큰데 매우 못생겼다. <슈렉> 시사회가 열린 직후부터 파콰드의 모델이 디즈니 회장 마이클 아이스너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미국의 점잖은 언론들도 이를 앞다퉈 보도했다. 아이스너를 골려먹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눈으로는 아무리 봐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미국 언론의 단정적인 태도가 좀 의아스럽다. 물론 <슈렉>이 흉한 외모를 찬미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과시하면서도, 유독 파콰드의 작은 키만은 계속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게 수상쩍긴 하지만.

어쨌거나 미국 언론의 호들갑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슈렉>의 제작자이며 드림웍스의 실질적인 리더 제프리 카첸버그와 마이클 아이스너의 30년 묵은 애증관계를 목격해왔다. 1999년 5월에는 카첸버그가 디즈니를 상대로 낸 2억5천만달러(추정액)짜리 소송에서 승소한 일도 있다. 무엇보다 눈부신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추앙되다가 아이스너와의 불화로 디즈니를 뛰쳐나온 카첸버그로선 디즈니와 아이스너를 제압하려는 욕망을 떨치기 힘들 만했다. 카첸버그는 갖가지 인터뷰에서 파콰드와 아이스너의 닮은꼴에 대해선 “난센스”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드림웍스)에게 없는 것은 디즈니가 종종 이뤄온 흥행기록 경신”이라며 날선 경쟁심을 감추지 않았다.

<슈렉>은 카첸버그에게 드림웍스 7년의 어떤 성과보다 큰 기쁨을 준 선물이 될 만하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것도 영광이지만, 경쟁작인 디즈니의 <아틀란티스>가 1986년 이래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기록하는 동안 <슈렉>은 흥행수익 2억달러를 넘기면서 올 여름 박스오피스 챔피언 자리까지 넘보게 된 것이다. 카첸버그는 자신의 주전공인 애니메이션으로, 도저히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던 애니메이션 왕국을 함락시킨 셈이다.

물론 승부는 단판이 아니며 디즈니는 재역전을 이룰 만한 내공을 여전히 갖고 있지만, 1998년 <개미>가 디즈니의 <벅스 라이프>의 아이디어 도용이라는 의심을 샀고 지난해 <엘도라도>가 실패하면서 체면을 구겼던 카첸버그로선 이번의 역전승은 그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간지 <인더스터리 스탠더드>는 ‘미키 마우스의 최악의 악몽’이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썼다. “카첸버그는 디즈니와 갈라선 뒤부터 이 마법의 왕국에서 마법을 훔치려고 애써왔다. <슈렉>으로 마침내 그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카첸버그&아이스너, 세기의 복식조가 되기까지

1950년 뉴욕생인 제프리 카첸버그는 영악한 소년이었다. 뉴욕 시장 후보로 나선 공화당 정객 존 린제이의 선거운동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게 14살 때였으니 세속적 성공에 놀랄 만큼 일찍 눈뜬 셈이다. 카첸버그는 지속적으로 린제이 진영에 참여했고 선거자금을 관리할 정도로 린제이의 신임을 얻었지만, 린제이가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닉슨에게 패하자 그는 현명하게도 쇼비즈니스로 눈을 돌렸다. 카첸버그는 처음엔 에이전트가 될 생각으로 인터내셔널 페이머스 에이전시에 잠시 들어갔다가 1년 만에 관두고 24살 때 파라마운트의 젊은 사장 배리 딜러의 조수로 들어갔다. 2년 뒤 배리 딜러는 또다른 젊은 인재 마이클 아이스너를 ABC에서 스카우트했다. 할리우드를 떠들썩하게 만들 두 수재의 파트너십은 이렇게 시작됐다.

배리 딜러의 지휘 아래 76년 파라마운트는 1년 만에 흥행실적 1위의 스튜디오가 됐고, 카첸버그는 고속승진을 거듭하며 마케팅 담당, 텔레비전 담당을 거쳤다. 마침내 <스타트렉> 시리즈의 영화화 임무가 그에게 떨어졌다. <클로스 인카운터> <스타워즈> 등 다른 스튜디오들의 성공적인 SF에 파라마운트가 자극받은 것이다. 카첸버그는 최초 예산 1800만달러를 들고 고집세고 늙은 배우들, 특수효과 경험이 전혀 없는 감독 로버트 와이즈와 악전고투를 벌여가며 스케줄대로 제작을 마쳤다. 그러나 제작비는 4500만달러로 치솟았다. 당시 평균제작비가 1천만달러 정도였으니 경영 재난이 우려됐지만, <스타트렉>은 8천만달러를 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둬 원더키드 카첸버그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리스2>의 실패 이후 제작담당 이사 돈 심슨이 밀려나자 82년 카첸버그가 어린 나이에 그 자리를 차지했고, 일중독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아이스너의 마스터플랜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둘의 파트너십은 <레이더스> <사관과 신사> 등을 잇따라 성공시켜 파라마운트의 기세를 80년대 초까지 이어갔다. 그러나 84년 배리 딜러가 갑자기 20세기폭스로 자리를 옮기자, 아이스너는 디즈니 회장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였고 망설임 없이 34살에 불과한 카첸버그를 디즈니의 스튜디오 책임자로 기용했다.

당시 디즈니는 쇠락해가는 왕국이었다. 실적에서 메이저 중 말석을 못 면했고, 테마파크의 수입도 뚝 떨어져 기업사냥꾼들의 인수합병 메뉴 앞머리에 오르는 신세가 됐다. 당시 디즈니엔 디즈니 순수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전통파들이 완강히 버티고 있었다. 이들은 디즈니 테마파크에 <스타워즈>와 <인디아나 존스>의 테마를 들여오자 “월트라면 그런 꼭두각시를 빌리는 짓은 하지 않으며 오히려 캐릭터를 창조해낼 것”이라며 반발할 정도로 66년에 사망한 창업주 월트 디즈니에의 향수에만 빠져 있었다. <애니메이션의 천재 디즈니의 비밀>이란 책에서 한 직원은 “외부인이 들어와 우리의 뺨이라도 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들의 뺨을 때려 정신들게 한 외부인이 다름 아닌 아이스너와 카첸버그였다.

디즈니 재건작전, 200% 성공

카첸버그 같은 사람을 상사로 모시고 사는 일은 누구라도 선뜻 반기기 힘들 것이다. 아침 6시에 출근하기, 일요일에도 일하기, 툭하면 회의하기, 없던 일 만들어내기가 그의 습관이요 일과였다. 디즈니영화가 개봉하면 직원들은 전국의 상영관을 돌아다니며 로비 장식까지 점검해야 했다. 디즈니의 신화와 자존심을 복원한 탁월한 지도자였지만 그는 존경만 하기엔 너무 ‘위협적인’인물이었다. <…디즈니의 비밀>에 따르면 94년 그의 사임이 알려지자 “사내의 많은 이들은 카첸버그와의 이별을 마치 자전거에서 연습용 바퀴를 떼어내는 것처럼 느꼈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임을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다른 사람들에겐 그는 “없으면 불편한 자연의 힘”이 됐다. 그를 따르는 수십명의 직원들은 그와 함께 드림웍스로 옮겨갔고, 남은 직원들도 몸값이 뛰어오르는 망외의 기쁨을 누렸다. 이 덕에 카첸버그는 잠시나마 디즈니 애니메이터들 사이에서 ‘성자 제프리’로 불렸다.

카첸버그의 최대 업적은 무엇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소생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인어공주>를 비롯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으로 이어지는 히트 행진은 추억의 레퍼토리였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당대의 팝 아이콘이란 명예를 돌려주었으며, 디즈니는 아이스너-카첸버그 체제가 들어선 지 10년 만에 최고의 메이저 자리에 올랐다. 디즈니의 전통을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변화한 대중의 감각을 민감하게 반영한 까닭이다. 좀더 자연스럽고 빨라진 동작의 캐릭터들엔 X세대의 발칙함이 가미됐고, 흥겹고 모던한 음악과 굽이치는 이야기의 재미는 어른들까지 매혹시켰다.

<가디언>의 앤드루 풀버는 <제시카와 로저 래빗>(1988)이 카첸버그 이력의 분기점이라고 말했다. 음모가 판치는 이야기에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절묘하게 결합하면서도 결국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판타지를 찬미하는 이 획기적인 영화는 애초 예산을 두배나 초과하는 고투 끝에 완성됐다. 이 일을 통해 카첸버그는 자신의 일, 특히 애니메이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의 구상을 처음부터 싫어했던 아이스너는 카첸버그와 “미친 듯한 언쟁”을 수차례 벌였고, 이 세기의 복식조에 심각한 이견이 있음을 드러냈다.

어쨌거나 외적으로 두 사람의 디즈니 재건작전은 완벽한 성공 가도를 달려갔다. 특히 <라이온 킹>(1994)은 미국 박스오피스에서만 3억12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려 카첸버그 이력의 정점을 이뤘다. 카첸버그는 실사영화에서도 거의 실패를 몰랐다. <귀여운 여인> <시스터 액트>는 저렴한 제작비에다 발랄한 컨셉으로 모두 극장수익 1억달러를 훌쩍 넘겼으며, 반디즈니적인 영화 <펄프 픽션>에까지 손대 칸 황금종려상과 흥행 대박이라는 믿기 힘든 성과를 낚아올렸다(미라맥스와 디즈니 자회사 터치스톤이 공동제작한 <펄프픽션>은 카첸버그로서도 선뜻 응하기 힘든 프로젝트였다. 미라맥스의 와인스타인 형제가 이 프로젝트를 설명했을 때, 카첸버그는 “20분 동안 웃었다”고 한다).

‘디즈니’를 벗어나, ‘디즈니’에 맞서다

1994년 10월 카첸버그는 디즈니를 나와 최고의 흥행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음반업계의 거두 데이비드 게펜과 자타공인의 ‘드림팀’을 구성 드림웍스를 창립했다. 카첸버그가 디즈니를 떠난 이유는 아이스너 회장의 암묵적 불신임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담당 사장이던 넘버2 프랭크 웰스가 헬기 사고로 사망했는데도, 아이스너는 넘버3 카첸버그를 승진시키지 않고 자신이 웰스의 자리를 접수한 것이다. 19년의 파트너십이었지만 카첸버그가 아이스너가 더이상 다루기 힘든 거물로 성장한 까닭으로 관측됐다. 결국 넘버2와 3을 한꺼번에 잃은 아이스너가 충격으로 심장질환을 앓다 채식주의자가 됐다는 후일담도 있다. 카첸버그는 제작수입의 2%를 보너스로 준다는 약정 불이행을 근거로 디즈니를 고소해 아이스너의 상처를 깊게 했다.

<엘도라도>를 빼면 드림웍스에서 카첸버그가 제작한 <개미> <이집트 왕자> <치킨 런>은 일정한 성공을 거뒀지만 디즈니 시절의 위업에 비하면 아무래도 왜소했다. 드림웍스의 <딥 임팩트>가 디즈니의 <아마겟돈>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먼저 개봉했다는 의심을 받았는데, 이 패턴은 <개미>와 <벅스 라이프>에서도 반복됐다. 디즈니가 의구심을 제기하고 카첸버그는 “허위사실 유포”라고 맞섰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드림웍스의 이미지에 좋은 영향을 미치긴 힘들었다. 소송까지 겹쳐 아이스너와 카첸버그는 돌이킬 수 없는 앙숙이 된 것으로 비쳐졌다. 둘 중에서도 내로라 할 만한 독창적 작품을 못내놓고 있던 카첸버그의 심기가 더 불편했을 것이란 짐작을 하기란 어렵지 않다. 스필버그가 관여한 실사영화 <아메리칸 뷰티> <글래디에이터>가 작품성과 흥행에서 성가를 드높였다는 것도 초조해할 만한 일이었다. 총제작기간 5년이 걸린 <슈렉>이 칸에 초청되자 카첸버그는 “나는 우리 영화가 아카데미를 휩쓰는 것보다 칸 경쟁에 진출한 게 훨씬 영광스럽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아이스너의 디즈니는 피터 슈나이더 사장을 해임하고 애니메이션 예산을 25% 삭감하는 등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7년 전 드림웍스가 창립될 때 <타임>의 리처드 콜리스는 “1920년대의 디즈니 이후론 어떤 메이저도 새로 태어나지 않았는데, 만일 이 규칙을 깬다면 그건 카첸버그 팀일 것이다”라고 썼는데, 콜리스의 예측은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지휘봉은 카첸버그가 쥐고 있다. 디즈니에서 일하던 91년 초 카첸버그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멘털리티가 위험수위다. 예전처럼 온건하고 스토리 중심의 영화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의 내부용 메모를 돌렸다가 외부로 유출돼 언론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다. 스튜디오 책임자에 의한 최초의 블록버스터 마인드 반성이라는 점에서 화제가 됐지만, 그 메모가 대작화 경향을 되돌리진 못했다. 메이저로 군림한다 해도 드림웍스라면 80년대 이후의 스튜디오들이 피하지 못한 대물숭배의 위험에 쉽게 빠질 것 같진 않다. 카첸버그는 그의 파트너 스필버그와 마찬가지로 아주 단단하고 알뜰하게 그리고 다양한 메뉴로 승부하고 있다. 관객으로서도 이 편이 훨씬 재미있다. 그러고보면 카첸버그는 이제야 아이스너의 진정한 라이벌로 우뚝 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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