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김기덕 신작 <활> 이야기 [2]
2005-05-10
글 : 이종도

<활>의 활은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쏘는 활이며, 또 하나는 김기덕 감독이 쏘는 활에 소리통을 붙여서 만든 개량 악기이다.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며(무기), 남의 상처를 위로하기도 하는(악기) 두겹의 의미인 것이다. <수취인불명>에 활을 등장시켰던 김 감독은 그 활을 다른 뜻으로 다시 들고 나온다. 치명적인 무기로 쓰여 눈을 다치게 했던 화살은, 이 작품에선 운명을 읽는 점괘가 된다. 노인은 활점을 볼 때(노인이 활을 쏘면, 활이 맞은 지점을 보고 소녀가 점괘를 본다. 아무에게나 봐주는 것은 아니고 단골 낚시꾼만 그 특혜를 누릴 수 있다. 실제로는 없는 점술이지만 매우 그럴듯하다고 한다), 그리고 외지인(노인의 배 위에서 바다낚시를 하기 위해 온 낚시꾼)이 소녀에게 수작을 부릴 때 경계용으로 활을 쏜다. 전성환은 사직공원 근처의 활터인 황학정에서 촬영 시작 전날 집중적으로 국궁 연습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연습은 촬영 기간 틈틈이 했다. 무기인 활은, 손으로 줄을 잡고 활로 켜면 또 악기가 된다. 김기덕 감독은 아프리카 작은 북을 활대에 끼워 해금류의 악기를 만들었다. 소녀와 노인은 제각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때 이 악기를 쓴다. 특히 밤바다를 배경으로 노인이 뱃머리에서 활을 켜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꼽힌다. 그러나 두 가지 뜻으로 다 쓰이다보니 스탭들은 감독이 활을 가져오라고 하면 뭘 가져가야 할지 헷갈렸다. 감독님이 가져오라는 건 쏘는 활인가 켜는 활인가? 둘 다 가져가면 되지 뭐. 김기덕 감독은 한여름에게 활쏘는 법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김기덕 감독이 언제 활쏘는 법을 배웠느냐고 물으니, 스탭들 왈, 감독님 잡기가 하늘을 찔러요.

펄은 숙명처럼 제작진의 발목을 붙잡았다. 만조와 간조를 맞추지 않으면 제작은 아예 모든 게 중단되어야 했다. 스탭들은 늘 밀물과 썰물 시간을 잘 안배해서 촬영 스케줄을 잡아야 했다. 물이 모두 빠졌을 때는 온통 펄이기 때문에 배가 움직일 수가 없고, 카메라도 돌아갈 수 없다. 최악의 경우엔 펄을 잡지 않기 위해 카메라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어찌됐든 바다 위에 배를 띄워야 촬영을 할 수 있으니, 제작진은 자다가도 새벽 네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바다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날의 날씨를 확인하고, 배의 위치를 잡은 뒤에야 다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래봐야 한 시간 뒤에는 다시 일어나야 했지만.

조명은 최소한 기본적인 것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조명팀은 배 난간에 발을 디디고 바깥에 불빛도 없는 캄캄한 가운데 위태롭게 파도와 싸우며 조명장비를 설치해야 했다. 지미집을 설치해서 부감숏을 찍거나 트랙을 달아서 수평이동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비좁은 배 안에서 카메라는 맥을 못 추었다. 크레인을 단다고 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며, 김기덕 감독의 성격상 시간을 많이 내서 카메라를 설치하기도 힘들었을 것이었다. 밤촬영은 어쩔 수 없이 데이포나이트(낮에 찍어서 밤장면처럼 만드는 것)로 갔다. 카메라 무빙도 매우 힘들었다. 배 안의 선실을 찍을 때는 전체를 잡기가 어려울 정도로 공간이 비좁았다. 그러니 진짜 멀미로 고생한 것은 카메라였다. 파도에 배가 흔들리면 카메라도 함께 흔들렸다. 스탭들은 그래서 배가 기울지 않게 하기 위해 한쪽으로 몰려다니지 않고 균형을 잡기 위해서 애를 썼다. 안정된 공간에 카메라를 세팅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고구마

영화에 뭍은 나오지 않지만, 뭍에서 촬영한 적은 있다. 그 나흘간 제작진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군것질을 했다. 추위를 달랠 군것질이 없을까. 발전기를 돌려서 따뜻한 물을 만들 수는 있지만 캔커피나 따뜻한 음료는 사실 소용이 없었다. 넙죽 받아먹으면 화장실 가기가 무서우니 스탭들은 어지간하면 참고 먹지 않았다. 그래서 온수는 소녀의 목욕장면에 주로 쓰였다. 김기덕 감독이 평소 고구마를 좋아하는 것에 착안, 강영구 PD는 고구마 한 상자를 구하고, 주민들에게 구울 통을 얻은 뒤 장작에 고구마를 구워 수시로 날랐다. 힘을 돋워주는 간식도 됐지만 간이 핫팩 노릇도 했다. 그러나 30명 스탭이 모두 맛있게 익은 고구마를 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익지 않은 고구마를 배당받은 스탭은 억울한 심정을 어디 호소할 데가 없었고 그저 강영구 PD를 흘겨보는 수밖에 없었다.

감독의자

비좁은 배 안에서 촬영을 해야 하니 감독의자도 응당 없었다. 김기덕 감독은 평소에도 감독의자에 앉지 않는다고 한다. 여느 현장에서처럼 감독의자에 앉아 모니터로 확인하지 않고 선 채로 촬영감독의 카메라 모니터로 촬영장면을 확인했다. 전성환은 바람 피할 데도 없이 쪼그리고 앉아서 콘티를 쓰는 감독과 그저 바쁘게 일하는 것으로 추위를 잊는 스탭을 보며 추운 티를 도저히 낼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노인배

영화를 찍기 위해서 모두 다섯척의 배가 쓰였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로서는 거대한 스펙터클을 만들었던 셈이다. 영흥호는 다섯척 가운데 마당쇠 노릇을 했다. 작은 배들을 견인하고, 발전기로 전기를 생산했다. 평소에는 꽃게배로 쓰이는 큰 배다. 노인배(노인 역의 전성환이 주인인 배)로 불리는 인일호는 아예 동력이 없는 폐목선이었다. 소녀배인 동진호는 노인배보다 작은 크기의 배다. 소녀배는 영화에서 뭍의 낚시꾼과 바다를 연결하는 연락선으로 쓰였다. 남자 대학생(서지석)이 타고 오는 조그만 쾌속보트인 을왕호는 스탭들 장비를 옮기는 데 썼다. 그리고 밥을 공수할 때 쓰는 바지선이 있었다. 바지선엔 해상요원이 승선해 안전을 돌봐주었다. 비수기였으니 어민들 용돈벌이가 얼마나 짭짤했을까. 최은영(제작 회계)씨는 배를 빌리는 데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어갔다고 했다. 배 빌리고 밥 먹고 자는 데 너무 많은 돈을 썼다지만 그렇다고 해야 제작비는 10억원이고 그나마 제작비는 남았다. 17회차의 기념비적인 촬영횟수도 예전의 <사마리아>의 11회차, <빈 집>의 13회차를 넘어선 굉장히 많은 것이었다고 제작진은 아쉬워했다. 다른 영화사 스탭들은 이들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층침대와 그네, 그리고 탱화

배 안엔 김기덕 감독 특유의 손재주와 미술적 감각이 엿보이는 소도구가 많았다. 그네는 소녀가 타고 놀기도 하고, 점을 볼 때 쓰기도 하는 주요 소도구. 그리고 배 안에는 바다 낚시꾼들이 잠을 자는 선실과 소녀와 할아버지가 자는 이층침대(소녀와 노인은 분명 한방에 함께 있지만 같이 누울 수는 없다. 매우 상징적인 결합이자 분리이다)가 있다. 그리고 노인배의 옆구리엔 정병국 교수가 제자들을 이끌고 단 이틀 만에 그린 탱화(세월에 바랜 듯한 효과가 굉장히 뛰어나다)가 그려져 있다. 한복과 옷장 등 예스런 디자인들은 극중의 중요한 소도구로 쓰이는 MP3 플레이어와 비행기 같은 현대적 산물과 대비되어 근대와 전근대의 갈등, 부모세대와 자식세대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침식

영종도 앞 을왕리 선녀바위 인근의 촬영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근처의 모텔에서 잠을 청했다. 이곳은 을왕리 해수욕장과 낙조로 유명한 곳이다. 찬 소주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 나면 새벽 6시에 일어나 7시에 아침을 먹고 8시면 촬영을 했다. 밥은 주로 선녀바위 근처에서 주민들이 하는 포장마차 식당에서 먹었는데 조개구이가 주메뉴였다. 점심을 먹을 때는 특급 공수작전이 벌어졌다. 배가 너무 멀리 나가 있으면 음식을 들고 배를 타고 나가서 배달했다. 물때를 잘못 맞추면 아예 밥을 배달할 수도 없었다. 뭍과 가까우면 고무옷과 고무장화를 신고 펄에 몸을 빠뜨려가며 스티로폼 위에 밥을 싣고 밀고 나갔다. 김기덕 감독이 부리나케 식사를 하고 나면(해병대 출신이어서일까, 그의 식사 시간은 대단히 빠르다고 전해진다) 바로 촬영에 들어가자고 하기 때문에 밥때를 놓치면 큰 낭패를 보았다. 밥을 늦게 탄 사람들은 먹지 못하는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은설 도움말 | 강영구 PD, 장훈 조감독, 장성백 촬영감독, 최은영 제작 회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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