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김기덕 신작 <활> 이야기 [3] - 주연배우 전성환 인터뷰
2005-05-10
글 : 이종도
사진 : 정진환
˝인간의 정욕이란, 몸에 인같이 따라붙는 게 아닌가 싶다˝

<리어왕>에서 광야를 헤매는 전성환의 목소리는 질풍노도 같다. 천둥치는 듯한 박력과 우렁찬 성량, 끊어서 관객의 폐부를 치는 듯한 명확한 발음은 리어왕의 분노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악기 같다. 그는 낮에는 부산 MBC의 PD로 일했고 밤에는 연극을 했다. 40년 연극 생활 동안 그는 리어왕이거나 윌리 로먼(<세일즈맨의 죽음>)으로 무대 위를 통치했다. 흰 구레나룻과 이국적인 눈매, 압도적인 성량은 무대 위의 왕에게 잘 어울리는 외투였다. 영화 데뷔는 늦었다. <오구>와 <청풍명월>에서 잠깐 얼굴을 내비치긴 했지만 김기덕 감독의 <활>은 전성환에게 처음으로 제대로 맡겨진 영화 배역이다. 부산 연극계의 얼굴로 이해랑연극상을 받기도 한 이 배우의 크기에 비로소 맞는 역할이 아주 뒤늦게 도착한 것이다. 데이브 브뤼벡의 <테이크 파이브> 선율에 맞춘, ‘교수인 줄 알았는데 학생이더라’는 내용의 그가 찍은 이동통신 CF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전한다. 그것은 황혼을 새벽으로 만드는 이 늦깎이 영화배우의 전주곡으로 준비된 것 같다.

-<활>을 어떻게 보았나.

=한번 더 찍고 싶더라니까. 처음에 시나리오 읽을 때 생각한 게, 황혼은 아름다워야 하는데, 인생의 황혼이 아름다우려면 청장년의 삶이 건강하고 아름다워야 그게 황혼까지 지속되는 건데, 내가 그렇게 살았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 소녀와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인간의 정욕이란 게 인생 끝날 때까지 가지고 가는 건데 그것이 세월따라 흐르면서 정욕이 모습을 달리하면서 표출이 되는 거구나, 그게 항상 우리 몸에 인같이 따라붙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내 연기가) 더 투박했어야 했는데, 조금 더 거칠고. 그랬다면 드라마가 더 예뻐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더라고. 우리 딸들은 영화 보고, 아버지 손이 너무 맘에 들어요, 하더라. 그게 무슨 말이니 하고 물으니까 아버지 손에 담긴 감정이 너무 좋더래.

-한겨울 추위가 지독했을 텐데.

=영화로만 봐서는 추위를 못 느끼겠던데. 다섯겹을 껴입고 찍었는데, 작은 배를 몰고 급히 나갈 때는 모자도 쓰지 않고 나가는데 1월 찬바람이 머릴 때리니까 머리가 띵해. 혈압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도 되더라고. 물에 뛰어드는 장면은, 추울까봐 안에 다이빙 수트를 입었는데 들어가기만 하면 떠. 부력 때문에. 2번 뛰어들었는데 다 실패했지. 그래서 뛰어든 장면만 살고, 헤엄치는 장면은 잘렸지. 한여름(서민정의 바뀐 이름)은 거의 벗다시피해서 찍어서 너무 안쓰러웠어. 그래도 씩씩해. 덜덜 떨면서도 안 춥다고 그러니. 여름이가 한컷 찍고 나서 쉴 때 등을 쓸어주면 몸을 바르르 떨고 있어. 하려는 열정이 그걸 만드는 거지. 그러지 않고서는 되는 일이 아니지.

-김기덕 감독의 출연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동요극 공연을 하는 중인데 강영구 PD가 왔어, 시나리오 들고. 읽어보고 얘기해달라고. 공연 끝나면 바로 다른 연극 연습이 있다고 하니까, (촬영이) 빨리 끝난대, 소문에도 빨리 끝난다고 들었고. 무엇보다 함께 작품하자는 데 혹했지. 같이 하고 싶었으니까. 시나리오 보고 더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새해 첫날부터 작업한다는 게 축복같이 느껴지더라고. 새해 첫날부터 일한다는 게. 바닷가에서 촬영을 시작했는데, 좋았던 건 오프닝부터 순서대로 찍어나가는 거라. 내 머리 속의 리듬 그대로 가니까 좋았어. 처음 대본에는 오프닝이 커다란 남근상에 오색줄을 매단 장면이었는데 김 감독이 나랑 몇번 만나더니 그걸 없애고 활로 소리를 내는 장면으로 바꾸더라고.

-김기덕 감독에 대해 알았나.

=작품 몇개 봤지. <사마리아>는 보면서 울었어. 부정 때문에 울었을 것 같아. 아, 가슴 아프데. 부산 출신 조재현이가 김 감독하고 작업을 하고 해서 알지. 김 감독이 난 좀 거친 줄 알았어. 근데 참 예쁜 사람이더구먼. 조용하게 촬영을 진행시키고 누구보다 솔선수범해. 소도구 필요하면 자기가 갖다놓고 맞춰놓고. 조그만 배에서 앉을 데도 없으니까 구석에서 콘티 들고 벌벌 떨며 뭘 적는데, 아이고. 참, 저사람 고운 사람이구나. 아름다운 청년이구나 싶데. 때로는 너무 처절한 걸 느낄 때도 있는데 그 처절함이 오히려 오래 생각하게 만들어. 자기 내부의 안타까움일 수도 있겠고 문예작품을 하는 사람으로서 고집일 수도 있겠고. 바다에서 찍으니까 파도치고 구름끼고 막 눈도 쏟아져요. 그런데 그대로 강행군을 하는 거라. 다른 감독 같으면 구름만 쳐다보고 얼마 뒤에 구름이 없어질까 계산을 할 텐데, 그 사람은 그대로 찍는 거지. 그런데도 나중에 필름 보니 괜찮데.

-김기덕의 캐스팅 의중은 무엇이었을까.

=60대 배우 중에 건강하고 구레나룻도 있고 그런 사람이 없겠느냐 그랬대. 추상미가, 아 있죠. 그리고 날 얘기했대. 재현이에게도 물어봤대. 좋죠, 그러더래. 국립극장 커피숍에서 첫 대면을 했는데 바로 결정을 했지.

-김 감독의 주문은 무엇이었나.

=내가 추울까봐 걱정을 하고 추위 때문에 병 걸릴까봐 걱정을 하고. 물에 뛰어드는 장면은 너무 추우니까 올림픽 수영장에서 장막 쳐서, 물빛 다르게 해서 찍으려 했는데, 내가 그랬지. 구태여 그럴 거 있나 바닷물에 직접 뛰어들어가면 되지, 그랬더니, 들어가시겠어요? 그래. 수트 입고 뛰면 된다고 했지. 김 감독은 또 그렇게는 안 하려고 하더라고. 물에 안 들어가도 됩니다 하더니 나중엔 그렇게 찍죠, 또 그러더라. 생각을 많이 하는 거야. 어떤 날은, 우리 점심 먹었나, 하고 스탭에게 물어보는 날도 있어.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쁜 거지. 김 감독부터 거기 모인 스탭들이 다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 몸과 마음이 다 건강하니까 일사천리로 그걸 다 화목하게 해내지. 저런 팀워크라면 뭐든지 잘해낼 거란 생각을 했어.

-무기인 활을 악기로도 쓴다고 하는데, 그 활이 소리가 나나.

=소리, 잘 나지. 우리 둘째 딸이 해금연주자거든. 그래서 현장에 한번 왔어. 프로니까 멜로디도 만들고. 난 그건 안 돼. 잡는 방법까지만 배우고 그렇게 한 거지. 김 감독이 소리통을 어디서 사왔대. 아프리카 작은 북을 밑둥 삼아 활대에 끼우고, 줄이 거기에 얹히는 거야. 우리 해금에서 브릿지(현악기의 줄 받침대)로 바가지를 쓰는데 그것도 가져왔어. 그걸 끼우고 줄을 켜면 아주 소리가 좋다고. 묘한 소리가 나. 촬영 끝나갈 무렵엔 재미가 들어서 매일 켜게 되는 거라. 김 감독이 선생님, 이젠 손에 익어서 보기가 좋습니다 그래. 아쉬운 건, 선곡이 미리 돼서 여기선 이 곡을, 저기선 그 멜로디를 한다고 생각하면 활의 움직임이 더 괜찮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다치지는 않았나.

=작은 배에서 큰 배로 뛰어올라가다가 갈비뼈에 금이 갔어. 근데 참을 만해. 아무도 그거 몰랐다고. 끝나고 연극 연습하는데 아프더라고. 연극 공연 마치고는 다 아물었지만. 약도 안 먹었는데.

-본격적인 영화의 시작이라 할 만한데.

-고향이 연극이니까. 무대에 대한 애정이 있지. 영화는 순발력이랄까 그게 요구되더라고. 처음엔 잘 안 돼. 세 번째라서 약간 익숙해져 있었고 중간부터 편해졌지. 기대, 두려움, 영화는 이게 매력있어. 할 만한 작품 있으면 계속 해야지. 동요 보급도 하고. PD 시절 때 어린이 프로그램을 담당해서인지 그때부터 동요를 좋아하고 아끼지. 집사람도 방송사 PD 출신인데 음악프로그램을 해서 어린이 합창단 지휘를 했다고. 둘이 거기서 잘 맞았지. 유럽 5개국 순회공연한 적도 있는데 연극 순회공연이 아니라 동요연주였어.

-왜 <청풍명월> 뒤 영화가 뜸했나.

=그뒤로 섭외 많이 들어왔어. 시나리오 보고는 다 안 했지. 지난해에도 세편 들어온 거 안 했고. 그거 안 해도 쉴 틈 없이 바빴으니까. 지난해엔 국제아동문화예술제 갔다왔어. 톈진에서 열렸는데, 대단한 행사인데 모두들 소홀히 하고 있어. 독일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에선 문화상 차관이니 하는 높은 사람이 오는데 한국에서는 전혀 그런 이들이 오지 않으니까 우릴 무시하더라고. 만찬장에서 자리 배치도 단상과 먼 외진 곳을 주더라. 기분 나쁘데. 그건 작은 올림픽인데 말이야.

-이제 서울로 올라올 일이 더 많아지겠다. 부산시립극단 예술감독직도 그만 두었으니.

=만주 북간도 노묘에서 태어나 해방되면서 원산에서 어린 시절 보내고 1·4 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온 뒤로 계속 부산에서 활동했지. 1953년에 전위무대라는 극단을 창단해서 연극을 했고, 지금도 마음이 맞으면 같이 해. 방송사 일은 편성부장까지 지냈는데, 지금은 하나만 해. 스물아홉살 때부터 방송 진행하던 게 있어. <항구야화>라고. 지금은 <부산별곡>이지. 부산의 선각자들, 부산지역의 형성, 일제와의 대립 등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의 모습하고 비교하고 노래듣는 1시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어. 일요일 저녁 7시5분이야. 주말엔 방송하러 부산에 있고 주중엔 서울에 와서 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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