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옹박> 머지 않았다
90년대 타이영화 르네상스부터 2005년 현재까지의 타이 영화 산업
1996년의 어느 날. 논지 니미부트르와 위시트 사사나티앙은 방콕 쑤꿈윗가의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시파콘 예술대학 미술과 동기인 두 사람의 대화는 여느 때처럼 영화 이야기로 흘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틴에이저영화 지겹지도 않나”라는 불평을 했고, “볼 영화 참 없지” 하고 맞장구쳤다. 그리곤 만취해서 헤어졌다. 둘의 회합은 그뒤로도 계속됐다. 광고 후반작업을 위해 사사나티앙이 칸타나 스튜디오 편집실에 갔을 때 역사가 이뤄졌다. 거기엔 니미부트르가 와 있었고, 두 사람은 이날 “우리 말로만 그러지 말고 보고 싶은 영화 직접 만들어볼까”라는 데 의기투합했다.
아이템은 니미부트르가 오랫동안 품어온 1940년대 방콕을 배경으로 한 갱영화였다. 10대 영화나 슬랩스틱코미디로만 근근이 연명하던 타이영화를 바꿔보자는 심산이었다. 공동 작업 끝에 두 사람은 완성된 시나리오를 들고 타이엔터테인먼트를 찾았지만, 돌아온 건 수모와 핀잔뿐이었다. 한해 타이영화의 제작편수가 고작 해야 10편도 안 되는 때였다. 경력없는 신인들이 무턱대고 명함 내밀어 낙점받기란 당연히 어려운 것이었다. “‘2099 댕 버럴리와 일당들’이라는 제목은 또 뭐냐?” “이런 건 싸움질하는 공업고등학교 애들이나 보지, 누가 보겠냐.” 두 사람은 다른 영화사를 찾기로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타이엔터테인먼트에서 일주일 뒤에 연락이 왔다.
1997년 르네상스 원년 : <댕 버럴리와 일당들> 성공
연간 제작편수가 200편에 이르던 타이영화가 90년대 들어 추락에 이르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게다가 1994년부터 들어선 멀티플렉스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타이시장을 독식하는 발판이 됐다. 그런 점에서 니미부트르의 <댕 버럴리와 일당들>(Dang Bererly and young gangsters)의 성공은 놀라웠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7번의 시나리오 수정을 끝낸 뒤에서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 영화는 니미부트르의 개인 돈을 투자해서야 완성됐다. 타이엔터테인먼트에선 “제작비 문제로 동시녹음 대신 더빙을 하라”고 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촌티나는 영화를 보기 싫어서 영화를 만든 건데….” 복고풍의 소재에 세련된 화면을 덧붙인 이들의 집념은 결국 제작비의 3배에 달하는 7500만바트를 벌어들이면서 타이영화 르네상스 원년을 선포했다.
“타이영화를 보려면 극장에 들어서기 전에 얼굴부터 가려야 했다”는 말은 1997년부터 잦아들기 시작한다. <낭낙> <철의 여인들> <방라잔> <수리요타이> 등 흥행작이 해마다 터져나온데다 <펀 바 가라오케>의 펜엑 라타나루앙, <검은 호랑이의 눈물>의 위시트 사사나티앙, <달리는 사나이>의 옥사이드 팡, <메콩 강의 만월파티>의 지라 말리쿤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등장하면서 타이 영화계는 새로운 개성들을 수혈했고, 자국민들에게 각인된 타이영화의 불명예를 씻어갔다. 한편, 광고와 뮤직비디오 출신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타이 영화계는 빈사 상태에 있던 인력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흥행작들이 쏟아지면서 아류작들이 대거 양산되는 우려할 만한 상황들이 없지 않았지만, 아직은 낙관론이 더 우세한 편이다. <더 네이션>의 난타쾅 시라순토른은 “좀더 두고봐야겠다”는 유보적 입장이긴 하지만 “타이 관객에게도 이제 어느 정도 기준이 생겼다. 이를테면 드라마는 <마이 걸>, 코미디는 <보디가드>, 공포는 <더 셔터> 하는 식으로. 유행만을 좇는 영화들이 때론 성공하기도 했지만 이젠 타이 관객의 눈높이도 상당 부분 올라갔다”면서 장기적으로 낙관하고 있다.
2003년 GTH 출범 : 자본, 시스템, 콘텐츠 확보
중요한 것은 영화사들이 이러한 관객의 분위기를 얼마나 감지하느냐는 것이다. 펜엑 라타나루앙은 “요즘 타이에선 한해에 지나치게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흥행에 성공하는 작품이 10편 이하에 불과한 데 비해 늘어나지도 않는 시장을 갖고서 벌떼처럼 싸우는 형국”이라면서 “1년에 20여편이 적당하다”고까지 말한다. 논지 니미부트르도 한때 골드러시 시기 때 “새우양식을 하던 사람들, 가죽가방 만들던 사람들, 금은방 하던 사람들까지 영화를 만들겠다고 덤벼들었다”면서 “자본 투여에 앞서 프로듀싱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런 점에서 <마이 걸> <더 셔터>를 내놓으며 2003년과 2004년의 위너로 자리한 GTH의 출범은 몇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투자사 GMM, 제작사 타이엔터테인먼트, 감독들의 커뮤니티 헙호인이 결합한 GTH는 자본과 시스템과 콘텐츠를 확보하면서 동시에 시장에서의 위험요소들을 최대한 줄이는 윈-윈 전략의 산물이었고 주효했다. <마이 걸>의 감독 중 한명인 비짜 코지우는 “자체 시나리오 개발팀을 두는 동시에 신인감독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는 말로 GTH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마이 걸> <더 셔터> 모두 영화를 전공한 젊은 신인감독들을 기용했고 여타 영화들과는 차별되는 컨셉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케이스. GTH의 실질적 리더이자 기대작 <아름다운 탄광>의 연출자이기도 한 지라 말리쿤 감독은 “GTH와 비슷한 모델의 협력관계는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05년 해외진출 박차: <옹박> 효과
2005년 타이영화의 가장 큰 화두는 ‘해외로 눈을 돌려라’다. <수리요타이> <방라잔> 등의 시대극이 이국적인 스펙터클로 북미지역에서 타이영화의 가능성을 점검했다면, <옹박-무에타이의 후예>(2003)는 타이영화의 해외진출을 본격적으로 점화시켰다. 뤽 베송이 배급한 프랑스에서 <옹박>은 적은 스크린 수에도 불구하고 45만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북미에서는 한달 동안 400만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였다. 타이영화인협회 회장이자 배급사 사하몽콘의 솜삭 테차라타나프라세트 대표는 “<옹박>이야말로 타이영화의 해외 판로를 뚫었다”고 평가한다.
실제 ‘<옹박> 효과’는 지난 2년 동안 타이 영화인들 사이에 퍼졌던 위기론을 잠재웠다. 비공식 집계지만 2003년 개봉작 48편 중 제작비를 건진 타이영화가 6편에 불과하고 2004년 전체 영화시장 매출액 중 타이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17% 선에 그쳤다는 점을 들어 타이영화가 더이상 상승곡선을 그리진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지만 <옹박>은 이를 불식시켰다. <옹박>의 속편인 <똠얌꿍-무에타이 전사>의 경우 지난해 칸영화제에 사하몽콘사는 무려 120명이나 되는 해외 세일즈 인력들을 대거 급파해 1억6천만바트라는 사전 판매를 기록했고, 2억바트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똠얌꿍…>의 경우 납치당한 코끼리를 찾으러 토니 자가 갱들에 맞선다는 내용으로, 줄거리는 전편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스케일은 압도적으로 크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상당 부분 호주에서 촬영이 진행된 <똠얌꿍…>은 촬영 당시 자국기자 100여명을 남반구로 불러들이는 등 8월 개봉을 앞두고 대규모 물량 홍보전을 펼치고 있다.
흥행을 앞세워 제작비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 대개 유럽 수입·배급사들로부터 투자를 받아왔던 펜엑 라타나루앙,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시트 사사나티앙 등도 합작 범위를 넓히며 또 다른 해외 판로를 개척하고 있다. 펜엑 라타나루앙의 <보이지 않는 물결>에는 한국의 CJ엔터테인먼트가 투자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논지 니미부트르 또한 한국의 한 투자사와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프로듀서 부족, 검열은 고질적 문제
그러나 여전히 산적한 문제들이 타이영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실력 있는 프로듀서의 부족은 심각하다. 상당수의 영화에서 감독이 프로듀서의 역할을 겸한다. 파이브 스타의 한 관계자는 “<수리요타이> 같은 대작만 하더라도 감독의 부인이 프로듀서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전문적인 인력이 전무할 뿐 아니라 프로듀서의 역할 자체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아직 없다. 굳이 필요하느냐며 시기상조라고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면서 “순회상영을 통해 입소문 효과를 유도한 <마이 걸>의 마케팅은 철저하게 프로듀서가 관리한 케이스였고 그래서 의미있는 성공이다”라고 말한다.
검열 또한 여전히 창작자인 감독의 골칫거리로 남아 있다. 관련 개정법안들이 몇년 전부터 입법부에서 논의되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개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화평론가인 안찰리 차이워라폰은 “40년 전의 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별 위원들의 자의적인 판단까지 덧붙여져 가위질이 행해지고 있다”면서 “일단 등급제부터라도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놓는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상업적 가위질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열대병>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면서 전작들까지 DVD가 출시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와 협의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검열을 의식해 일부 장면을 삭제하기까지 했다. 왜 항의를 안 했느냐고? 법적으로 따졌다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거물이다. 지금도 내 영화 상영을 못하게 하겠다며 쥐고 흔들 정도다.”
타이 정부도 한국 정부처럼 영화산업 지원해야
타이 영화인들은 그런 점에서 한국을 부러워한다. 그들은 한국을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로 영화부문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꼽는다. 감독인 팜피카 토위라는 “스크린쿼터와 함께 체계적인 지원이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뒷받침하고 있다”면서 “직접적인 지원은 아니더라도 필름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등의 방안을 타이 정부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타이 영화인들의 입장에서 올해 12월31일 개봉하는 MC 차트리찰레름 유콘 감독의 5억바트(150억원)짜리 시대극 <나레수완>을 지켜보는 것(재벌이기도 한 탁신 총리가 상당한 자본을 투자했다)과 타이 정부가 토니 자를 홍보대사로 임명한 것이 썩 흡족하진 않을 것이다.
타이영화는 아직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요동친다. 솟아올랐다가 곤두박질한다. 그래서 어지럽다. 얼마전 개봉한 B급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 <더 홀리 맨>(The Holy Man)은 3주 동안에만 한화로 약 30억원을 벌어들였다. 이 영화는 제대로 홍보조차 되지 않은 영화였다. 안찰리 차이워라폰은 “오락영화로서도 예술영화로서도 퀄리티가 함량미달이다”라는 평가를 냈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피하는 배급시기를 택해 가족 단위 관객들을 대규모 동원하며 단기간에 역대 박스오피스10에 오르는 성과를 보고서는 놀랐다고 했다. 타이영화는 요동을 멈추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중요한 건 그 동안에 트렌드를 선도할 수 있는, 예술성을 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찬찬히 갖출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건 비단 타이에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다.
타이영화 역대 박스오피스 톱 10
타이 블록버스터도 힘이 세다
※단위 THB. 대략 1BHT=30원. 아래의 극장 관람료 수익 집계는 2004년까지 개봉한 영화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극장은 타이 전역이 아니라 직배가 이뤄지는 방콕으로만 제한했다. 타이의 경우 공식적인 박스오피스 집계가 이뤄지지 않는 상태라 제작사가 밝힌 아래 수익은 오차가 있을 수 있다.
1. <수리요타이>(2001) 3억2100만
16세기 버마의 침공에 맞서 싸운 아유타야 왕조 수리요타이 왕비의 일대기. 왕자인 MC 차트리찰레름 유콘이 감독을 맡았으며, 기획부터 제작까지 무려 7년에 총제작비 4억바트(120억원)를 들인 초대형 블록버스터다. 400개 극장을 확보한 3일 동안에만 타이 전역에서 무려 1억1천만바트를 벌어들였다.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 일렬횡대로 수백 마리의 코끼리가 전진하는 장관은 흉내내기 불가능한 장면. 해외판은 프로듀서이자 감독의 UCLA 동기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직접 편집했다.
2. <방라잔>(2000) 1억5100만
타이 영화계에 시대극 열풍을 불러일으킨 영화. 첫주에 4300만바트를 거둬들였다. 18세기, 버마군에 맞서 싸운 방라잔 사람들의 이야기는 TV, 문학 등에서 자주 써먹은 이야기지만 스크린에 옮겨지자 위력은 대단했다. 침략자의 살육 앞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사로 변모하는 방라잔 마을 사람들의 분노는 물소떼를 앞세우고 버마군의 진지로 쳐들어가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타이인들의 애국심에 불을 질러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이 후일의 평가.
3. <낭낙>(1999) 1억5천만
죽은 아내의 영혼과 살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 삶과 죽음을 넘어선 이 러브스토리는 영화로만 21번이나 만들어진 닳고 닳은 낭낙 전설에서 출발했다. 데뷔 당시 “지명도가 없는 탓에 쉽사리 리메이크하겠다고 맘먹지 못했다”는 논지 니미부트르는 <댕 버럴리와 일당들>의 성공 이후 자신의 두 번째 작품으로 <낭낙>을 선택했고, 귀신의 복수극으로만 알려져 있던 낭낙 전설을 지극한 멜로드라마로 바꾸고 이를 서정적이고 세련된 영상으로 포장했다. 1999년 최다 관객을 동원했다.
4. <마이 걸>(2003) 1억3700만
타이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성장영화. 어느 날 갑자기 날아든 여자친구의 청첩장을 받고서 10여년 전 유년 시절을 떠올리는 한 남자의 추억을 담았다. 20개교 이상을 돌며 고르고 골라 뽑은 두 아역배우의 깜찍한 연기는 개봉과 함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송유스 숙마카난 외 5명이 함께 연출했으며, 영화학교를 졸업한 제3세대 타이 감독들의 등장을 알린 신호탄 역할을 했다. 원래 이들은 단편영화를 만들려고 했는데, 스승인 지라 말리쿤 감독이 프로듀서를 맡아 장편영화로 내놓았다.
5. <킬러 타투>(2001) 1억2400만
먹이 하나를 두고 싸우는 볼품없는 킬러들의 소동극. 도무지 성한 데라곤 없는 늙다리 킬러 넷과 과대망상증을 앓고 있는 젊은 킬러가 동시에 경찰서장을 죽여달라는 청을 받아들이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담았다. 감독인 유틀럿 시파팍이 순수미술 전공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영화는 장르를 오가며 잡식성 취미를 과시한다. 코미디언들을 대거 등장시킨 이 영화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흥행을 기록했고, 이후 깜짝 캐스팅 영화의 원조가 되었다.
6. 옹박(2003) 1억1500만
오랫동안 스턴트맨으로 활동했던 토니 자를 일약 타이의 영웅으로 올려놓은 영화. 6년 전 토니 자와 그의 스승 판나 리티크라이의 데모 테이프를 프라차야 핀카엡 감독이 보면서 <옹박> 신화는 만들어졌다. 도둑 맞은 마을의 불상을 찾기 위해 방콕으로 온 팅이 갱들과 맞서 싸우면서 보여주는 무에타이 기술과 자세는 무려 100가지에 이른다고. 개봉 2주 동안 1억바트를 손쉽게 돌파하며 <옹박>은 한동안 침체기에 빠졌던 타이 영화계에 활력소가 됐다.
7. <더 셔터>(2004) 1억1천만
타이 공포영화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영화. “깜짝 놀라게 하는 데서 벗어나 분위기로 사람을 조여오는 힘이 있다. 이전에 나온 공포영화들과의 차별점은 바로 그것”이라는 게 흥행에 대한 현지 분석. 25살 사진작가인 통은 어느 날 자신이 찍은 사진에 누군가의 인광이 찍힌 것을 알게 되고, 갑자기 대학 동기들이 하나둘씩 죽는 상황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곧 한국에서 개봉할 예정이며, 최근 뉴 리젠시에서 리메이크 판권을 샀다.
8. <철의 여인들>(2000) 9900만
성적 소수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스포츠영화로 트랜스젠더 영화 붐을 만들었다. 1996년 게이, 성도착자, 성전환자 등으로 구성된 배구팀이 국내 대회에서 우승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다(이들은 2002년에 열린 제6회 국제 게이 배구경기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성적 소수자라는 이유로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천대받던 이들이 배구 코트에 모여 잠재력을 발휘한다는 줄거리. 대만, 홍콩 등에 팔려 좋은 흥행 성적을 거뒀고, 동명의 속편 또한 만들어졌다.
9. <댕 버럴리와 일당들>(1997) 7500만
좀처럼 깨지지 않던 <로만틱 블루>(1995)의 5500만달러 흥행수익 기록을 넘어서며 타이영화의 부흥을 알렸다. 논지 니미부트르와 위시트 사사나티앙이 함께 각본을 쓴 이 갱영화는 예고편부터 이전의 구닥다리 타이영화들과 다르다는 점을 과시했다.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갱 소설에서 소재를 빌려와 제임스 딘과 엘비스 프레슬리에 심취한, 승려보다 갱이 되고 싶었던 40년 전 방콕 청춘들의 이야기를 영화에 담았다. 꽃미남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 것도 흥행요소였다고.
10. <보디가드> 7400만
“만약 이 영화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코미디언이 영화감독이 되는 길은 막혔을 것이다.” 페치타이 웡캄라오 감독은 타이의 유명 코미디언. <킬러 타투>에 출연하기도 했던 그는 <옹박>에서도 돈을 위해 토니 자를 배틀에 출전시키는 말썽쟁이 친구 역할을 맡기도 했다. 경호를 맡은 유망한 사업가가 자신의 실수로 죽게 되자 위기에 빠진 중년의 보디가드가 그의 아들을 갱들의 손아귀에서 구해낸다는 줄거리의 코믹액션영화다. 페치타이 웡캄라오가 주연까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