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할 것인가 지배당할 것인가
감독론 요지 - 노예에서 주인이 되는 법을 알려주는 감독들 혹은 영화들
‘노예에서 주인이 되는 법을 알려주는 감독들 혹은 영화들’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루이스 브뉘엘의 영화에서 제시되는 환상과 로베르 브레송, 잉마르 베리만의 작품에 나타나는 실존적 공허함에 대한 의미를 규명하고, 이를 주체성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자 하였다(이들 감독들의 작품들에 더하여 <카게무샤> <메멘토> <거미숲> 등의 개별 작품이 포함된다).
먼저 브뉘엘의 영화에서 내가 주목했던 것은 내러티브의 구조였다. 브뉘엘은 일반적인 선형적 내러티브에서 철저하게 감추려하고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보이는 손’으로 무대화한다. 이러한 서사적 특징은 상징계의 주체가 입각과 실각을 반복하는 기표 위에서 떠돌아야 한다는 사실을 ‘에피소드의 연쇄’로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영화적 주제를 내러티브의 공식으로 성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브뉘엘은 환상 자체가 아니라 환상 속에 살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주체의 태도를 조롱한다. 결론적으로 브뉘엘의 영화 속 인물과 극장 속 관객은 이명동인(異名同人)이다. 광대짓처럼 느껴지는 인물들의 삶을 보며 관객이 웃을 때, 이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조소와 다르지 않다. 관객은 그것이 실제로는 피학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로 가학적 웃음을 웃는다.
브레송과 베리만은 스타일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한 관점의 변화에서는 유사점을 지닌다. 브레송은 초기작에서 은유로서의 감옥으로부터 신의 세계로의 초월 가능성, 달리 말해 (<사형수 탈옥하다>의 부제처럼) ‘바람은 소망하는 곳으로 불어간다’는 사실을 믿었다. 하지만 이후 작품에서 이러한 믿음이 균열되기 시작하고, 마지막 작품인 <돈>에 이르러 신의 은총은 사라지고 바람은 멈추어 선다. 이러한 변화는 신의 침묵 3부작 이후의 베리만에게도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나는 이들 감독들의 변화가 갖는 의미를 부정신학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했다. 신이 인간의 언어로 규정될 수 없는 ‘결여로서의 실재적 대상’이라면, 주체는 그로 인해 공허함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데, 이때 ‘실재(신)의 응답’이라는 환상이 그 공허를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브레송과 베리만은 신의 죽음을 느끼면서도 신을 대체하는 어떤 숭고한 대상도 인정할 수 없었는데, 때문에 이들 영화의 인물들은 자신을 휩싸고 도는 삶의 공허를 무방비 상태에서 맞이해야 한다. 그것이 이들 감독들의 후기작에서 인물들이 파국을 겪는 이유이다. 브뉘엘이 관객에게 주체란 ‘환상 속의 그대’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면, 브레송과 베리만이 변화하면서 드러낸 삶의 공허는 환상을 작동시키는 응시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갖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들 감독의 작품들이 함축하는 영화적 특징과 변화, 그리고 그 의미는 주체의 문제에 있어 텅 빈 응시를 위한 연기자로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이로부터 ‘분리’(se perarere)하여 스스로를 생산하는 삶의 주체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제기와 맞닿는다. 주체의 응시를 향한 공격이 없다면 상징적 토대는 결코 아무것도 변화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무셰트의 유일한 성공이었던 자살이 전하는 아픈 교훈이다.
“저널비평의 통과의례라 생각하고 응모했다”
우수상 수상자 안시환 인터뷰
안시환(32·본명 배경민)씨는 마감 6일 전에야 공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급하게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니 챕터 사이에 비약이 너무 심해서 창피했다는 그는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영화과를 박사과정까지 수료했다. “학부 시절 공부를 너무 안 해서 사회생활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생각도 조금 있었지만, 무언가 공부를 해보고 싶어” 대학원에 가기로 마음먹었고, 좋아했던 영화를 전공으로 택했다고. 학원 강사한 아르바이트 봉급으로 단편영화를 찍기도 했다는 안시환씨는 “선택을 잘 못하는 성격이지만 그때의 선택은 참 잘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직관으로 풀어갈 수 있어서 저널리즘 비평에 매력을 느낀다는 말로 쓰고 싶은 비평의 성격을 우회적으로 전해주었다.
=영화를 전공하면서 연출이 아닌 이론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엔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단편영화를 찍고 싶어했다. 주변에 답답해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통신으로 사람을 만날 수도 있어서, 나도 사람을 모아 단편영화를 하나 찍었다. 그런데 같이 본 친구들이 청소년 대상 모 TV 프로그램과 똑같다고 했다. 충격을 좀 받았다. (웃음)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대학원 전공을 정해야 할 시기가 왔는데, 학부 때는 그렇게 싫었던 이론 서적이 재미있었다. 하나씩 새로운 걸 알아가는 게 너무 좋았다. 그래서 그 이후 쭉 이론을 공부해왔다.
=이론비평에 굉장히 많은 영화를 녹여썼다. 주로 어떤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나.
-예전에는 에미르 쿠스투리차를 좋아했다. 영화 좀 좋아한다 싶으면 이름 어려운 감독을 대고 싶어하지 않나. (웃음) 지금은 박찬욱 감독에게 관심이 많다. 나도 김지미씨와 비슷하게 박찬욱 영화와 고어영화들에 나타난 신체훼손으로 이론비평을 쓰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시간이 너무 없어서 포기했다. 작품비평으로 쓴 <아들>의 다르덴 형제도 좋아한다. <로제타>와 <아들>은 내게 가장 충격을 준 영화들이었다.
=학부를 뒤늦게 졸업한 것에 비하면 석·박사 과정은 빠르게 마친 편이다. 영화 공부하는 게 좋았나보다.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엔 내가 시네필이라고 믿었는데, 아니었다. 공부도 부족했고 영화도 많이 보지 못했고 무엇보다 영화를 사적(史的)으로 보는 시선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래서 몇년을 꾸준히 영화를 보다보니까 영화가 진짜 좋아지더라. 의식적으로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경우라고 할까. 그리고 잡식성이 됐다.
=어떤 비평을 쓰고 싶은가.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웃음) 저널리즘 비평은 논문과는 다르게 쓸 수 있어서 매력을 느꼈다. 논문은 정확한 근거를 대고 그걸 주석화해야 하니까 숨이 막히기도 한다. 그리고 논문은 내가 아는 걸로 써야 하는데, 저널비평은 내가 느끼는 걸로 쓸 수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저널에 글을 쓸 수 있을까 싶어서 주변에 물어봤더니 그냥 원고 보내고 실어줄 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더라. (웃음) 그렇게는 하기 싫었고 통과의례를 거치고도 싶어서 공모전에 응모했다. 가끔 <씨네21>에서도 눈에 띄는, 자극적인 표현만 가득한 평론은 좋아하지 않고,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전해주는 허문영씨의 평론이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