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큐멘터리, 새로운 숨결이 들려온다
“이제 영주가 다큐다운 맛을 안 것 같다.” 한국 독립영화의 대부 김동원 감독은 변영주 감독의 <숨결>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만이 아니라 뭇평론가들이 흐뭇하고 대견한 시선으로 <숨결>을 바라보며, <숨결>에서 <낮은 목소리> 3부작 시리즈의 명장면을 발견했다. 같은 소재로 3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변영주 감독은 동어반복에 빠지지 않고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을 이루었다. <낮은 목소리1>이 앎의 의지로 충천해 역사의 무덤가에 불을 밝혔다면, <낮은 목소리2>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들의 개인사를 기술하기 위해 카메라를 불러들인 다큐멘터리였다. <숨결>은 시리즈의 정점에서 감독과 할머니들의 시선을 조화롭게 이어준다. <낮은 목소리> 연작은 편수를 보태가면서 할머니와 감독이 함께 성장해갔으며, 스스로 작품의 의미를 교정해갔다.
<숨결>은 3부작 가운데 가장 단조롭고 고요한 다큐멘터리다. 1, 2편에는 ‘나는’으로 시작되는 감독의 내레이션이 도처에 깔려 있고, 그의 생각을 직선적으로 전달하는 자막이 간간이 끼어 있지만 <숨결>에서는 감독의 내레이션과 자막을 지웠다. 그 빈자리는 속살거리는 햇살, 맑은 겨울 하늘, 강의 물줄기로 채워진다. 그 위로 할머니들이 스케치북 위에 그렸던 새들이 날개치며 날아가고 있으리라. 3부에 이르러 감독은 관조의 여유를 얻은 것 같다. 그래서 2편에서 강덕경 할머니의 빈소에서 통곡하는 할머니들의 피울음을 담았다면, <숨결>의 강묘란 할머니의 장례식에서는 사운드를 모두 비워내고 바람소리를 채워넣었다. 바람소리와 함께 화면이 어두워지며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숨결>의 마지막 장면은, 이상하리만치 길고도 질긴 슬픔을 길어올린다.
<낮은 목소리>가 연작으로 나아가면서 카메라에 대한 감독의 성찰도 깊어간다. <낮은 목소리1>에서 조심스런 관찰자로 머물러 있던 감독의 시선은 2편에서는 점점 대상에 깊숙이 개입한다. 헤드폰을 쓰고 붐마이크를 든 감독은 굳이 카메라 뒤로 숨으려 하지 않는다. <숨결>에서 그는 ‘카메라를 든 여성’이라는 <낮은 목소리2> 포스터의 컨셉를 좀더 현실화한다. 이미 커밍아웃한 이용수 할머니가 감독을 대신해 다른 할머니들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그들의 대화는 정겹다. 관객은 잠시 탐문하는 감독의 시선을 벗어두고 할머니들이 두런거리는 이야기를 듣는 구경꾼이 된다. 인터뷰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종군위안부 할머니들과의 연애과정
<낮은 목소리> 연작은 역사와 실존, 민족주의와 성, 성의 역사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주진숙 교수(중앙대)의 평가대로 <낮은 목소리>는 “여성, 성, 정치, 권력, 제국주의, 모성 문제에다 우리나라 근대사까지 아우른 작품”이다. 하지만 <낮은…>은 스스로 의미의 경계를 확장하기보다는 할머니들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변영주 감독은 일본 다큐멘터리 감독 오가와 신스케의 “내 영화는 농민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라는 표현을 빌려 “<낮은 목소리>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과 연애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감독의 애정이 가장 눈에 띄는 건 2편이었다. “이사를 했으니 영화를 찍어야 한다”라는 할머니들의 전화를 받고 다시 나눔의 집으로 달려간 감독은 스스로를 연출하고 싶어하는 할머니들을 향해 다시 삼각대를 편다. 할머니들이 감독을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속편을 만들 생각이 별로 없던 감독은 거기서 걸음을 멈추었을런지 모른다.
이제 그에게 더이상 객관적인 관찰자의 위치는 의미가 없다. 그는 할머니들과 둥그렇게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노랫가락에 박자를 맞춘다. 2편을 가장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건 그래서일 거다. 1편이 고통스런 증언 채록에 고심했다면, 2편은 할머니들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데 더 큰 애정을 쏟는다. 곡식을 거두고 대지 위에 비료를 뿌리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마치 밀레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여기에는 삶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그들이 결코 대지의 여신이 될 수 없는, 모성을 박탈당한 불모의 여성임을 생각하면 이 아름다움은 금세 슬픔으로 전이된다.
그러니까, <낮은 목소리>가 제기하는 다양한 의미의 켜들은 영화의 외연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들의 볼품없는 몸뚱이와 일상에 내재한다. 그들은 카메라를 향해 발언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들이 감독을 불러 다시 카메라를 돌리게 하고 카메라 앞에서 자기를 연출했던 건, 턱없는 자기현시의 욕망이 아니라 50년간 지워졌던 자기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진저리나는 몸부림이었다. 1,2편에 보인 할머니들 그림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치마저고리 입은 10대 소녀와 할머니들의 일상에서 발견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소녀다운 순진함은 그 시간의 단절을 여실히 증언한다. <낮은 목소리>의 참된 가치는 종군위안부 문제라는 거대 담론을 제기하고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으려 했다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여성성을 잃어버리고 정체성이 찢겨졌던 여성들이 카메라를 빌려 상처을 어루만졌다는 데 있다.
그들에게 가해진 고통은 박제화되지 않은 채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힘을 북돋는다. “성폭행을 당한 그날 이후 나는 누구와도 만날 수 없었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지만 할머들은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하더군요. 앞으로는 나도 당당히 사람들을 만나고 웃겠습니다.” <낮은 목소리1>을 본 한 일본 여성관객의 고백이다. 변영주 감독은 3부작 내내 할머니들과 요즘 여성들을 이어줄 고통의 고리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에게 할머니들의 상처가 전승되고 있음을 거듭 확인시킨다.
한국다큐멘터리사, <낮은 목소리>이전과 이후
<숨결>의 후반부에 이르러 <낮은 목소리> 연작은 할머니들의 일상에서 최고의 장면을 길어올린다. 위안소에서 성병에 걸려 청각장애자인 딸을 낳은 김윤수 할머니는 철썩같이 딸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믿는다. 하지만 변영주 감독과 할머니와 딸, 세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딸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을, 다만 어머니를 위해 숨기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제작진도 예상치 못했던 기막힌 삶의 순간에 카메라는 갑자기 할머니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들어간다. 제작진조차 놀라고 흥분했음이 화면에서 엿보인다. 김동원 감독은 이 장면을 “다큐멘터리의 진수”라고 했다. 7년 작업을 결산하면서 변영주 감독은 최고의 마침표를 찾아냈다. 한국 독립영화사에, 혹은 한국 여성영화사에 빛나는 이정표를 세운 변영주 감독과 제작사 보임에게 그 7년은 전장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치열하게 싸웠으며, 그 싸움에는 독립 제작과 배급시스템에 대한 고민 또한 포함된다. <낮은 목소리>가 다큐멘터리 사상 최초로 극장 개봉하고, <낮은 목소리2>가 일본 121개 극장에서 개봉해 11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는 호사스런 기록들은 치열한 창작정신이 배태한 결과들이다. <낮은 목소리>를 한국 다큐멘터리의 최고봉이라고 평가하기는 섣부르다고 해도, 이제 한국 다큐멘터리의 역사는 <낮은 목소리> 전과 후로 나눠짐은 분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