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1993∼2000 <낮은 목소리>에서 <숨결>까지 [2]
2000-03-14
글 : 변영주 (영화감독)
변영주 감독이 말하는 <낮은 목소리>와 나와 할머니들

7년 동안의 진실찾기, 이제 다시 시작이다

1991. 7

<낮은 목소리>

도시빈민의 탁아 문제를 다룬 <우리네 아이들>에서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운동에 관한 <전열>까지 몇편의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촬영과 편집일을 하며 다큐멘터리 제작에 재미를 붙여가던 어느 날이었다. 내 앞에 거대한 벽 같은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과연 다큐멘터리는 무엇일까? 세계영화사 책을 보면 최근까지도 다양한 종류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져온 것 같은데, 극장에서 그 영화 중 어떤 것도 본 경험은 없었다. 영화를 보는 것이야말로 영화를 배우는 최고의 교과서일 텐데.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던 것은 당시 한국과 일본의 영화교류의 가교역할을 하던 아오키 겐스케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일본에 온다면 무척 중요한 다큐멘터리 감독을 만나게 해줄 수 있다”라는. 그리고 1991년 7월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사무실을 찾아가게 되었다. 꿈같은 여섯 시간이었다. 자신의 20여년간의 작품활동의 변화와 방법론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해주는 그의 태도에는 젊은 시절, 선배 영화감독들로부터 받았던 많은 정신적 도움들을 이제 자신도 후배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엿보였다. 자신에게 있어 다큐멘터리 영화란 사랑하는 피사체에 대한 러브레터라고 표현하는 그의 모습에서 다큐멘터리에 있어 피사체와의 관계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배우고, 또한 동료들끼리 피를 팔아가며 필름을 구했다는 그의 회상에서 열정을 배웠다. 그와의 만남 이후, 그의 작품들을 자주상영(일반 극장이 아닌 시민회관 등에서 상영하는 일종의 독립배급방식)방식으로 상영되는 공간에서 만나게 됐다. 다섯편의 영화를 보고 다음날 아침까지 하염없이 울었다. 머리 한쪽 구석에서 그의 방법론을 따라잡기로 결심하였다.

1992∼93

<낮은 목소리2>

푸른영상에서 첫 연출작인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완성하곤 처절한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일본인들의 제주도 관광매춘을 중심으로 한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제주도 신제주시의 관광요정 근처에서 요정종사자들을 만나기 위해 미장원, 사우나, 식당, 옷가게를 전전하며 지내기를 몇달. 몇몇 활동가들의 도움으로 겨우 두분의 언니를 만났다. 한달여간을 같이 만나며 무척 친해졌다. ‘아, 이게 이른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점차 구체화돼가는 나의 첫 작품에 대한 스스로의 기대도 잠시, 끝내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언니들과 실제 작품의 현장에선 고작 몰래카메라로 관광객들과 요정 아가씨들을 촬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절망하였다. 관광요정 앞에서 몰래카메라로 촬영할 때 나와 스탭들을 잔뜩 경계의 눈빛으로 적대 관계를 형성하는 아가씨들을 바라보며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겨우 완성시킨 영화를 보고 또 보며 새로운 결심을 하였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피사체와의 관계란 단지 개인적인 관계의 친밀함만이 아니라 영화적인 관계의 새로운 형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것을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외엔 없다는 것 또한 느끼게 되었다.

1993. 6

<숨결>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출연했던 한 언니는 처음 매매춘을 하게 된 이유가 어머니의 자궁암수술비 마련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이었다. 바로 이 사실이 나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 ‘나눔의 집’을 방문하게 했다. 할머니들과의 만남도 잠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는 것이 어떠냐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그 자리에서 겨났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진심으로 이 할머니들을 촬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50여년간을 과거의 상처로 인해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는 이분들에게 다큐멘터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면 나도 그리고 할머니들도 즐거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존재하는 장점을 떠올렸다.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시간이었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인 특징과 성격상의 유별남이 할머니들에게 끊임없이 관심유발을 시킬 수 있을 거란 확신이었다(그 중 육제적인 특징은 단점으로도 작용하였다. 할머니들 생각에 눈만 나와 마주치지 않으면 친해질 일이 없고 그렇다면 계속 거절해도 뭐 미안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내가 나눔의 집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눈높이의 것들만을 보고 다녔다. 하염없이 눈을 맞추고자 허리를 굽혀야 했다). 다음날부터 거의 매일을 나눔의 집에서 지냈다. 또다른 한편에서는 실질적인 다큐멘터리 작업준비를 시작하였다. 16mm 필름으로 작업하기로 결심했기에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장기간 대여할 수 있는 카메라와 동시녹음 장비였다. 위암으로 타계한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사무실로 무작정 팩스를 보냈다. “이제 감독이 존재하지 않으니 감독이 사용하던 카메라와 녹음장비는 누가 사용을 하고 있나요? 저에게 주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이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오가와프로덕션의 히로 후세야 프로듀서는 선뜻 받아들였다. 장기간 무료로 대여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야호! 들뜬 기분으로 1993년 6월 ‘기록영화제작소 보임’을 프로듀서 신혜은과 함께 설립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제작비를 모으는 일과 할머니들의 마음을 여는 일, 그리고 영화를 완성하는 일뿐이었다. 아, 대부분이 남아 있는 거였구나.

1994. 4

1년간의 만남으로 할머니들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계셨다. 특히 강덕경 할머니는 누구보다 먼저 작품에 관심을 보여주셨다. 강덕경 할머니의 방에서 매일 할머니와 회의를 하며 다른 할머니들을 파고들어갈 계획을 의논하던 어느 날. 한창 일할 나이의 젊은 아이를 1년이나 백수로 살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며 할머니들이 드디어 촬영을 승낙하셨다. 마침 동교동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혜화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영화의 첫 장면으로 이사하는 상황을 기록하고자 마음먹었다. 이삿날. 혜화동 집으로 찾아뵀을 때, 할머니들은 모두 마당에 앉아계셨다. 장판조차 깔려 있지 않은 집. 보일러도 고장이 나있었고, 이삿짐들은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마당에 널브러져 있었다. 4월에 때아닌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쩌면 할머니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최고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촬영을 할 수는 없었다. 장판을 사다 깔고, 수리공을 부르고, 이삿짐을 옮기니 어느새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할머니들의 태도는 많이 변화되어 있었다. 우리 일을 포기하고 자신들을 도왔다고 생각하신 걸까? 할머니들과 만난 뒤 처음으로 비싼(?) 과일을 우리를 위해 손수 깎아주셨다. 사과 한쪽 입에 물고 마당 한켠으로 나와 질질 울어버렸다. 내친 김에 조금더 시간을 가지며 이제 영화적인 관계를 만들어보고자 결심하였다.

1994. 8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낮은 목소리: Murmuring>로 제목을 정하고 기본적인 제작원칙을 결정하였다. 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이야기체 영화(narrative film)와 비이야기체 영화(nonnarrative film)로 구분하는가라는 너무나도 원칙적인 것에 대해 이상스럽게 집착하였다. 촬영을 통해 내러티브의 구성요소들을 획득하기 전에는 영화 서술구조의 결정도 사전에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단지 상상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몇 가지 장면을 떠올리고 기본적으로는 할머니들의 일상을 기다려가며 촬영하기로 하였다. 핸드헬드일 것, 조명은 사용하지 않는다(단 한번 조명기를 사용하였다. 영화 촬영이 모두 종료된 뒤, 할머니들과 기념촬영을 하며 무언가 뒷배경으로 있어보이게 하고 싶어서 조명기를 배경으로 세워놓았다). 당연하겠지만 인터뷰를 제외한 일상의 장면들엔 감독의 개입은 존재해선 안 된다. 할머니들에게 카메라를 보여드리고 동작되는 메커니즘을 쉽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본촬영 전에 몇번의 예비촬영을 통해 할머니들에게 당신들이 나의 카메라를 통해 어떻게 영상화되는지를 보여드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 중 몇분은 클레퍼(딱딱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동시녹음 신호를 위해 신번호 등을 적어 소리와 영상을 맞추는 판)를 카메라라고 촬영종료까지 우기셨지만. 제작비 마련은 몇번의 기업 후원에 실패한 뒤(정신대 문제 따위가 기업홍보에 도움이 되겠냐는 말엔 정말 할말이 없었다) 필름 100피트씩을 후원해주는 회원 모집과 후원배지 판매를 해보자는 신혜은 프로듀서의 제안을 받아들여 홍보활동 및 후원금 모집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필름구입과 현상은 각각 태창사와 당시의 영화진흥공사에 협조를 얻어 장기간 외상으로 거래를 개시하였다(다시 한번 태창사 사장님, 그리고 진흥공사 관계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래도 모자라는 제작비는 친구들의 신용카드를 압수하여 현금을 인출하였다(그뒤로 연락이 끊긴 친구가 몇 있다).

12월31일. 송년회를 하는 ‘나눔의 집’촬영을 마지막으로 <낮은 목소리>의 모든 촬영을 마쳤다. 송년회에서 할머니들은 마치 이제 카메라를 자신들의 식구로 받아들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셨고, 그동안 결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던 모습, 이를테면 술을 마시고 취한 모습이나 혹은 서로 의견충돌이 생기는 것조차도 서슴없이 보여주셨다. 또한 그때까지도 자신의 얼굴을 정확하게 드러내기를 싫어하셨던 김순덕 할머니께서 망년회 뒤 큰 결심으로 카메라 앞에 단독으로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해준 것도 기쁜 일이었다.

1995. 4

<낮은 목소리>가 극장에서 공개되었다. 한달간의 상영 동안 할머니들은 매일 극장으로 나와 관객과 만남을 가지셨다. 위안소로 연행되었던 그날 이후 단 하루도 자신을 사랑해본 적이 없는 할머니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애정을 갖는 관객들의 만남이란 흡사 상처를 치유하는 정신치료 같은 거였나보다. 마지막 상영날, 할머니들은 한편 더 만들어보자며 나에게 제안을 하셨다. 나는? 엄청난 외상값에 치를 떨고 있던 터라 떨떠름해 할 뿐이었다.

1995. 12

강덕경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폐암 진단을 받으셨단다. 다른 것은 상관없는데, 죽고 난 뒤 모두들 나를 잊을까봐 겁이 난다며 자기 자신이 죽을 때까지를 촬영해달라신다. 이젠 도망갈 곳도 슬퍼할 곳도 없었다. 바로 오늘부터 2편이 새롭게 시작된다고 선언을 하곤 조감독인 장호준과 바로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나눔의 집으로 향했다. 정확한 이유를 모르시던 다른 할머니들. 그저 또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기쁘신가보다.

1996. 5

<낮은 목소리2>는 두 가지의 이야기 구성을 갖게 되었다. 1편을 통해서 좀더 적극적으로 영화를 대하시는 할머니들이 흡사 장기자랑을 하는 것처럼 카메라 앞으로 달려와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어떤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가 한편에 존재한다. 카메라의 위치를 보곤 자신이 가장 잘 나오는 위치라고 생각되는 곳을 서로 차지하고자 싸우기도 하고, 정성스레 키운 호박이 반드시 영화에 나와야 한다며 일주일 동안 스탭들 숙소로 매일아침 성화를 하시는 할머니들. 그 곁엔 또한 점차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강덕경 할머니가 존재한다. 1996년 5월 강덕경할머니가 또다시 입원을 하셨다. 스탭들이 할 일이라곤 번갈아 가며 할머니를 간병하고 자리를 지키거나 나눔의 집에서 다른 할머니를 촬영하는 일뿐이었다. 1997년 1월 자신이 너무 오래 살아 우리 제작비가 너무 많이 나오겠다며 걱정하는 할머니에게 엄청 화를 내고 말았다. 끊임없이 부인하는 마음의 한켠이 들킨 걸까? 할머니가 고비를 겪으실 때마다 돌아가시면 안 된다는 마음과 함께 불어가는 제작비에 서서히 지쳐가는 나 자신을. 할머니에게 왜 나에게 이런 못된 일을 시키냐며 대들고 말았다.

1997. 2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빈자리를 채워주신 건 다름 아닌 살아계신 다른 할머니들이었다. 강덕경 할머니를 잃고 난 뒤의 허탈함을 자신의 희망과 소원을 소녀처럼 이야기하는 할머니들의 맑은 눈으로 위로를 받는다. 이제 밭에 비료를 주며 새로운 생산을 하고자 하시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낮은 목소리2>의 촬영을 마치고 편집에 들어갔다. 화면 곳곳엔 너무나도 맑고 적극적인 할머니들의 일상과 강덕경 할머니의 점차로 야위어 가는 얼굴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해 8월 <낮은 목소리2>를 개봉하였고, 나는 한동안 나눔의 집을 찾지 않았다.

1998. 5

거의 6개월 이상을 할머니를 생각하지 않으며 지내려 애썼다. 해외영화제에서, 또는 98년 3월 개봉한 일본의 극장에서도 나는 앞부분 얼마를 보았을 뿐, 언제나 극장 밖에서 영화가 끝나기를 기다려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였다. 이제 다른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쉬고 있던 어느 날. 프로듀서로 복귀한 신혜은이 함께 영화를 보자고 한다. <낮은 목소리2>였다. 정말 이걸로 할머니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완결해도 상관없겠냐고. 미련이 없냐고. 없다면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라고. 완결적인 영화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낮은 목소리> 1, 2를 통해 나는 할머니들의 현재를 끊임없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현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과거의 끔찍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그때의 경험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었다. 위안소 시절에 관한 인터뷰를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일방적인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것은 어쩌면 서로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일방적인 것이 아닌 대화로서의 과거이야기를 화면에 담을 수 있을까. 그 고민의 과정에서 생각해낸 것이 할머니가 할머니를 인터뷰하면 어떨까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낮은 목소리2>를 통해 생성해낸 할머니들의 영화에 대한 적극성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특이한 상상에 문득 떠오른 것이 이용수 할머니였다. <낮은 목소리2> 완성 이후 무려 3개월 동안 이제 자신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어달라며 전화를 해대던 할머니의 모습에서 어떤 인터뷰어로서의 자질이 보였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할머니를 인터뷰한다는 단 하나의 아이디어로 <숨결>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떤 영화가 될지.

1998. 10

<숨결>은 촬영의 방법론부터가 <낮은 목소리1, 2>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반복되는 일상을 기록하는 전작의 경우, 오늘의 촬영이 실패할 경우, 내일 다시 기다려서 촬영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할머니가 할머니를 인터뷰한다는 방식의 내용이기에 만약 한번의 촬영이 실패하면 재촬영이라는 것은 재미도 없어질 뿐 아니라, 이미 현장의 동시적인 느낌들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숨결>은 100피트 회원 모집을 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이용수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를 인터뷰하는 장면이 어느 순간 촬영에 실패하는 경우, 복원이 불가능하기에 작품 자체의 제작을 중단하기로 프로듀서와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완성을 책임질 수 없는 작품이었다. 도박과도 같은 촬영의 방법 속에서 나에게 또 한번의 계기를 심어준 것은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작품들이었다. 1, 2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법론의 길을 나 나름대로 걸어가 본 것이었다면, <숨결>에서는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 차이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피사체는 현재 자체가 중요한 사람들이다. 나의 피사체는 현재가 중요하지만 과거의 경험이 있기에 현재가 중요한, 어쩌면 이미 잊혀져가는 시간의 인물들이었다. 일본 농민들의 삶을 주로 다룬 오가와 감독은 스스로 농민이 될 수 있었지만, 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될 수 없다. 즉 나의 카메라는 아무리 할머니들과 가까워져도 할머니의 시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에겐 어떤 다큐멘터리 촬영의 방법론이 있을까? 그때 이 도박과도 같은 상황을 더욱 극단적으로 가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만을 집중해서 촬영해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실제 세 시간 정도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제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를 촬영하여 편집에서 좋은 부분들을 골라냈다면, <숨결>은 나에게 시간의 옵션을 주기로 한 것이다. 25분 정도를 촬영할 수 있는 양의 필름만을 내 자신에게 강제한다. 그러므로 함부로 셔터를 누를 수 없다. 모든 촬영의 준비가 완비된 상태에서 그 세 시간 중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빛나는 순간을 20여분간 쉬지 않고 촬영하고 그 모든 것을 끝낸다. 그것은 어쩌면 좀더 다양한 상황들을 촬영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한순간의 과정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장점도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를테면 <숨결>의 촬영방식은 도박 같은 즉흥연주를 촬영하는 것이었고, 그 연주의 어느 순간의 호흡을 영화 속에 담아내는 촬영과 편집을 동시에 수행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면에서 할머니들의 빛나는 호흡을 모아낸다는 의미에서 제목을 <숨결>로 최종 결정했다.

1998. 11

어린 시절부터 위안소 생활까지 이용수 할머니의 인터뷰는 조금씩 진행되었다. 특히 할머니는 단순한 질문자를 넘어서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 경험 속에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 촬영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이용수 할머니가 현재 암투병중에 있는 서봉임 할머니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이다. 아픈 할머니에게 불현듯 이용수 할머니는 대만이 어디 있는지 아냐며 자신의 위안소 시절을 이야기한다. 대화로서의 증언이 생성되는 순간이었다. 계속되는 촬영 속에서 점차 고민이 생겼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의 생활, 특히 50여년간 숨길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들의 아픔들은 좀더 적극적인 개입 속에서 논쟁거리가 되기를 바랐고 그것은 이용수 할머니의 역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현재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내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김윤심 할머니를 떠올렸다. 자신의 삶을 일기로 써서 그해 전태일 문학상 수기부문에 당선된 할머니는 그 어떤 할머니들보다 해방 이후 자신의 삶과 자신의 위안소에서의 경험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선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재주, 즉 논쟁할 수 있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이때, 영화를 크게 두 부분, 즉 이용수 할머니가 인터뷰어로 어린 시절부터 위안소 시절까지를 다른 할머니들에게 이야기듣고 이야기하는 전반부와, 현재 할머니들의 심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감독과 김윤심 할머니로 나누는 구성방식을 선택했다.

1998. 12

강덕경 할머니의 묘소로 가는 길이었다. 어쩌면 <숨결>을 통해 할머니의 죽음으로 받은 상처가 치유된 것일까? 유난히도 맑은 겨울 하늘이 눈부셨다. 불을 붙인 담배 한 개비를 놓아드리고 모든 스탭들이 차례차례 절을 했다. 할머니도 우리를 보고 계실까? 어찌됐건 할머니. 우리 또 할머니들에 관한 영화를 찍고 있어요. 때늦은 제작발표회가 그곳에서 진행되었다.

1999. 6

1년간의 만남을 통해 김윤심 할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에겐 청각장애인인 따님이 계셨고, 할머니는 따님에게 아직 자신의 아픈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이제 촬영을 앞에 두고 할머니에게 제안을 하였다. “할머니도 알고 계시겠지만, 나는 따님도 촬영하고 싶다. 그 결정은 할머니께서 하셔라”라고. 할머니 또한 내가 처음 할머니를 만났던 그날부터 그 생각을 계속 해오셨던 것 같다. 그러나 그건 내가 요구할 수 있는 결정은 아니었다. 그저 할머니의 결단을 기다릴 수밖에. 촬영날. 할머니의 방엔 따님이 함께 앉아계셨다. 할머니는 그러나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애꿎은 재봉틀만 돌리고 계셨다. 힘겹게 한마디. “너 내가 쓴 일기 본 적 없지? 내 옛날이야기 모르지?” 할머니의 수화를 하는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따님은 의외의 대답을 하고야 만다. “다 알고 있었어요. 다만 엄마가 힘들어할까봐 모르는 척한 거지.” 나의 카메라는 우왕자왕하고 만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촬영이 끝난 뒤, 할머니와 난 한참 동안을 서로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고만 있었다. 1년간을 고민하고 결정한 오늘이었는데, 따님에게 그만 한방 얻어맞고 만 것이다.

1999. 6

드디어 7년 동안의 마지막 촬영이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현장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할머니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종료되었다. 서로서로 수고했다면 웃으며 덕담을 나누는 그곳엔 1, 2편에 함께 하셨던 박두리, 김순덕 할머니와 새롭게 <숨결>에 출연한 할머니들이 있었다. 물론 우리의 뒤편에는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이 함께 있었고. 그렇게 마지막 촬영이 이루어지고 편집을 하던 6월25일, <숨결>에 출연하신 강묘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스탭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미 종료된 촬영. 그러나 한분의 할머니가 또 세상을 떠나셨다. 어떻게 해야 하나. 촬영을 한다는 것은 <숨결> 이후에도 우리가 계속 할머니들의 마지막을 기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박두리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죽어도 지방에 살고 있는 친척들은 장례식에 올 필요가 없어. 너희들이 다 찍어서 그 사람들 보여주면 되고, 부조금은 계좌로 보내면 되니까.”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까지 할머니들과의 관계에서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이게 아닐까? 특별히 이 부분은 비디오로 촬영하여 키네코작업을 하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숨결> 이후 세상을 떠날 다른 할머니들의 경우 필름으로는 작업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또한 어쩌면 할머니의 장례식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현재를 가장 극명하게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영화의 마지막에 에필로그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1999. 9

이렇게 <숨결>까지의 7년이 완성되었다. 이용수 할머니는 후반부의 김윤심 할머니 부분이 조금 지루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김윤심 할머니는 왜 홍보용 포스터가 이용수 할머니만 크게 나오냐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 소녀 같은 질투심을 바라보며 난 그저 7년간 나의 카메라를 즐겨주신 할머니들이 고맙고, 또한 어려운 상황에서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모든 스탭들이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1999. 9

<숨결>이 완성되었다. 후반의 사운드 믹싱 작업과 색 보정 작업 등을 도쿄에서 진행했기에 도쿄의 현상회사 내의 조그마한 시사실에서 처음 완성된 <숨결>을 보고, 혼자 도쿄의 밤거리를 서성거렸다. 나에게 있어 <낮은 목소리>에서 <숨결>까지의 7년이란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다큐멘타리 영화에 매료당한 영화 어린이가 몇명의 지인들과 함께 그 매료당한 영화의 감독이 걸어갔음직한 바로 그 길을 상상 속에서 함께 걸어간 것. 수없이 실패를 맛보고 때론 몇번의 달콤한 성공을 뒤로 하며 계속 걸어간 것. 그 방법 외엔 다큐멘타리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그저 끝없이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며 걸어가 보는 것. 순간 행복한 마음이 들었든 건, 어느덧 뒤를 돌아보니 할머니들이 어느새 나와 함께 그 길을 걷고 계셨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리고 500여명의 100피트 회원들, 그리고 후원뱃지를 사주신 수천명의 후원자들, 극장에서 혹은 시민회관 등 상영장에서 영화를 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모든 관객에게 이제 마침표 하나가 찍혀졌다라는 보고를 해야겠구나. 아, 정말 이렇게 하나가 끝이 났구나….

2000. 3

지금, 이용수 할머니는 후반부의 김윤심 할머니 부분이 조금 지루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김윤심 할머니는 왜 홍보용 포스터에 이용수 할머니만 크게 나오냐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 소녀 같은 질투심에 몸 둘 바를 몰라하며 개봉준비를 하고 있는 지금,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이 <숨결> 평에서 쓴 두개의 반전을 떠올려본다. 여기에 감히 한 가지의 반전을 더 첨가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모두들 이야기하는 영화를 가장 상업적인 공간으로 이동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다큐멘타리 작가들에게 필요한 단 하나를 고르라면 그것은 제작비가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작품을 관객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극장 개봉이란 관객과 만나는 기쁨이기보다 영화시장의 틈새를 조금이라도 넓혀보고자 하는 투쟁이다. 그리고 지금 당신의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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