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1993∼2000 <낮은 목소리>에서 <숨결>까지 [3]
2000-03-14
글 :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감독)
찍는이와 찍히는 이, 두개의 반전

<숨결>을 보는 동안 우리는, 이 영화의 본질이 종군 위안부의 배상문제가 아니라 위안부였던 여성들이 스스로의 활동을 통해 획득해가는 내적변화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랫동안 등굽힌 채 자기 안에만 가둬둠으로써 화석처럼 경직되었던 ‘슬픔’이란 명사를, 그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슬퍼한다’는 동사로 바꿔나간다. 그리고 이 변화를 통해 그들은 ‘슬퍼함’의 행위와 그 감정을, 타자와 공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간다. 이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슬픔은, 늠름하고 굳건하게 살아갈 힘으로 ‘반전’(反轉)되고 있다.

감독 변영주는 그 과정을 꾸준히 함께 하면서, 한결같은 자세로 그네들의 ‘슬퍼함의 행위’와 ‘슬픔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자 힘쓴다. 거기 있는 것은 안이한 동정이나 공감이 아니며, 분노의 공유나 사회정의도 물론 아니다. 슬픔을 공유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들의 몫이며 우리의 것이 아니다, 다만 그저 진지하게 그 음성에 귀기울이자, 그것만이 지금의 내게 허락된 일이다… 라고 말하는 듯한, 어쩌면 흡사 일종의 체념을 닮은, 작가로서의 냉철한 각오가 거기에 있다. 이렇게 든든한 ‘청취자’를 얻으면서, 모놀로그는 다이얼로그로서의 강도를 지니게 된다. ‘청취자’라는 타자를 얻음으로써, 비로소 ‘슬픔’은 아이덴티티를 둘러싼 보편적 문제제기로 발전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라는 것은 우물바닥에 있던 슬픔을 해방시키고, 슬퍼할 수 있는 힘을 퍼올리는 펌프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변영주는 스스로의 존재방식을 통해, 듣는다는 행위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능동적 행위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것은 다큐멘터리라는 영화의 방법, 다큐멘터리 작가라고 하는 인간의 존재의의에 대한 깨달음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여기에 또 하나의 반전이 있다. ‘슬픔’을 삶의 힘으로 바꿔가는 여성들, ‘듣는다’는 것을 적극적인(positive) 행위로 삼아가는 한 사람의 영화감독. 한편의 영화를 통해, 찍는 이와 찍히는 이가 서로 획득해가는 이러한 반전은 무엇보다도 감동적이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주름 팬 미소 못지 않게, 이 영화의 풍요로움을 더해주는 전화의 과정이다.

(이 글은 <숨결> 일본배급사인 판도라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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