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사랑은 쉽지 않은 운명임을 보여주는 12편의 영화가 있다. 그중에서도 <관성의 법칙> <귀걸이> <Flower Shop>은 우연히 마주친 과거의 사랑이 더 가슴아프다고 말한다. 한편, 열쇠공과 여고생의 사랑을 다룬 <괜찮아>, 한국 남자와 베트남 처녀의 사랑을 다룬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성적 소수자들의 사랑을 다룬 <이만큼만 가져갈게>, <동구밖 과수원길>은 그 차이 자체 때문에 힘든 여정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정해져 있는 것이 없으니, 개인의 취향만으로 감상해도 상관없는 것이 바로 여기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부문이다.
내일의 사랑을 잃고 찍네
<토끼와 곰>/ 김효정/ 21분/ 2005년
유독 과거와 현재에 대한 사랑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영화들과 다르게, 또는 이미 서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힘든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과 다르게, <토끼와 곰>은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사랑하게 됐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푹푹 찌는 더운 여름날 곰인형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배포하는 남자가 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영어 교습서를 팔기 위해 토끼인형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어떤 사람. 호기심에 말을 건네니 젊은 여자다. 토끼가 곰에게 묻는다. 물 드실래요? 그러면서 친절하게 물병을 건넨다. 남자는 나중에 다시 한번 만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자에게 전화번호를 적어준다. 하지만 그뒤로 둘의 인연은 이상한 방식으로 성사된다. 어느 날 남자에게 전화가 온다. 토끼인형을 쓴 여자가 교통사고로 죽었고, 그녀의 신원을 확인해달라는 것이다. 그는 무슨 수로 그녀의 신원을 확인해줄 수 있을까? 그녀가 누구인지 그는 모른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 그녀 가족들이 안치실로 뒤늦게 찾아와 오열하지만 그는 그냥 옆에 서 있을 뿐이다. <토끼와 곰>은 처연하다. 그녀와 그는 관계가 있지만 그 관계의 정의는 없다. <토끼와 곰>에는 미래의 사랑을 놓쳐버린 가슴아픈 한 장면만 있다. 그 모든 만남의 가능성을 죽음이라는 사신이 한순간에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소재의 힘에 기대지 않고 죽음이라는 거대한 질문 앞에까지 가서 사랑을 생각하는 성찰의 힘이 돋보인다. 감정에 취해 무너지지 않는 영화적 리듬도 탄탄하다.
저 남자가 네 남자냐
<사과>/ 김민숙/ 21분/ 2005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 젊은 부인은 막막하기만 하다. 몸은 지쳐가고, 엄격한 장례 의식은 버텨내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사주가 좋지 않은 그녀 때문에 아들이 죽은 거라 여기는 시어머니의 눈길은 가장 혹독한 고통이다. 부인은 이제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며 다른 세계로 접어든다. 남편을 떠나보낸 슬픈 마음은 공무도하가와 전통 무용으로 표현되고, 저승에서 다른 여자들과 희희낙락하는 남편의 모습이 힙합의 리듬과 함께 장례식장 마당 한가운데서 실제처럼 벌어진다. 그때쯤 나타나는 환상 속의 미소년. 부인은 그에게 마음이 끌리기 시작한다. 그와 그녀가 부르는 사랑 노래. <사과>는 독특하게도 주인공의 흐릿한 모든 의식의 흐름을 뮤지컬 방식으로 표현한다.
바람난 가족
<생리해서 좋은 날>/ 김보정/ 38분/ 2005년
<생리해서 좋은 날>은 사랑을 둘러싸고 고민하고 화해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생리는 그들을 이어주는 끈이자 고민거리다. 여고생 영후는 학교에서 인기 많은, 그래서 별명까지 ‘콧대’인 남학생을 좋아하게 된다. 한편, 집안 내력상 40만 넘으면 생리를 하지 않는다는 영후의 가족. 그것이 바로 영후 어머니의 고민이다. 남편의 마음이 다른 여자를 향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 점이 더더욱 그녀를 괴롭힌다. 영화는 영후와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 이렇게 세명의 젊고 늙은 사랑의 시작과 교차를 ‘생리’라는 고리로 이어준다. 옥상에서 모녀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올라왔다가 서로 보듬어주는 장면이 따뜻하다.
부르다 내가 죽을 이름이여
<초혼>/ 김기남, 김은주, 박용주, 박윤오, 윤준상, 최정선/ 14분/ 2004년
<초혼>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부문 본선에 출품된 단 한편의 애니메이션이다. 1940년대, 일제 점령하에서 살아가는 독립투사와 기생의 사랑 이야기를 아련하게 표현한다. 독립운동을 하던 중 순사들에게 쫓겨 숨어 들어온 주인공. 그를 숨겨준 기생과 그는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를 알아차린 동료 기생의 밀고로 주인공은 다시 도주의 길을 나선다. 그것도 사랑에 빠졌던 여자의 배신으로 오해하면서. <초혼>은 전통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수사를 부리지 않고 간결한 캐릭터와 이미지로 표현해낸다. 상상 속에서 유곽으로 다시 돌아와 진실을 알게 되는 후일담이 영화 속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