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적이라는 비판만은 못참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들에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 폴커 슐뢴도르프는 새 영화 <리타의 전설>(Die Stille Nach Dem Schuss)에서 ‘무너진 장벽, 그뒤’를 이야기하고 있다. 서독 적군파의 테러리스트 출신인 리타는, 동지들이 제3국으로 떠날 때 동독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테러금지협정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리타를 공개적으로 보호할 수 없는 비밀경찰은 그녀에게 새 이름과 새 삶을 제공한다. 동독으로 건너간 리타는 서독을 동경하는 타티아나와 친구가 되지만, 새로운 신분도 그녀에게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리타의 전설>은 ‘테러리스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그 흔한 로맨스와 스릴도 없이, 줄곧 건조하고 냉정한 스토리텔링을 구사하고 있다. 독일 현지에서 호평과 혹평을 오가며, 가장 많은 화제를 불러모은 작품. 장벽이 무너진 이후의 독일사회를 리얼하게 그린 작품이 없었던 만큼, 기자회견장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뜨거웠다. “영화제 상영작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는 찬사가 터지는가 하면, “동독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영화화할 수 있느냐”는 항의로, 기자와 감독 사이에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폴커 슐뢴도르프는 다음날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평론에 의해 내 영화가 또다시 죽고 있다”고 호소했다. <젊은 퇴틀레스>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양철북> 등 부조리한 사회 전면에 냉소적인 시선을 꽂아 온 폴커 슐뢴도르프는, 여전히 그렇게 논쟁의 한가운데 서 있다.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 영화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모호하기 마련이다.
=시나리오를 쓴 볼프강 콜하제가 동독 출신이다. 그와 함께 신문 기사를 읽고, 슈타지 파일 재판 기록을 열람하고,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조사하고 탐색하는 과정에 많은 사실들을 접했고, 그것들을 토대로 가상의 스토리 하나를 엮기 시작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최근 테러리스트 출신 잉게 비트로부터 저작권 침해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는데.
=어려움은 말로 하기 힘들다. 저작권 침해에 관해선 특별히 할 말이 없다. 이건 개인의 전기 영화도 아니고,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특정 사실이나 인물에서 가급적 거리를 두려했다는 것만 밝히고 싶다. 이 영화는 픽션이고, 작품에 대한 접근도 다분히 그런 방식을 취했다.
-70,80년대 작품보다 최근작에 더 만족한다고 말했다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장벽이 무너진 다음, 서독 정부가 슈타지의 보호를 받던 테러리스트를 동독에서 넘겨 받아 구속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결정적으로 영화화를 결심했다. 이렇듯 믿기 어려운, 독일의 오늘, 그 현실을 그리고 싶었다. 이것이야말로 100% 독일의 이야기, 독일인의 이야기다. 통일과 같은 역사를 영화계에서 외면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만든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와도 이어지는 얘기가 될 수 있겠고. 그러나 통독 이후의 리얼한 정치 상황이 영화화되길 바라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서독의 유력한 방송사도 이 프로젝트를 내쳤다. 다른 경로로 간신히 200만마르크를 구했지만, 투자자를 찾느라 허비한 세월이 무려 5년이다.
-서독 여자와 동독 여자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둘은 처음 동독에서 만난다. 동독 여자는 떠나고 싶어하고, 서독 여자는 머물고 싶어한다. 두 사람 다 자기가 나고 자란 땅, 그 환경을 혐오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의 이상향으로 날아간다. 이것이 바로 독일이라는 나라의 특수한 상황이다. 그들의 이상이 현실과 부딪쳐 변질되고 좌절되는 과정을 그리려 했다.
-캐릭터와 스토리가 파격적이다. 감독은 소재적 선정주의에 빠진 것 아닌가.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난 지난 40년 동안 영화 앞에 진실했다. 누군 내 영화를 좋아할 수도 있고, 다른 누구는 싫어할 수도 있다. 그 어떤 평도 개의치 않겠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내 연출 의도가 선정적이라고 의심했다는 건 정말 충격이다. 절대 동의할 수 없다.
-동독에서 살아본 경험도 없으면서, 어떻게 이것이 현실이라고 자신하나. 영화 속의 동독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다큐가 아니라 픽션이란 얘기를 다시 해야 하나. 감독 자신이 직접 경험한 세상, 그리고 잘 알고 있는 것들만 영화화할 수는 없다. 대신 이 작품의 스탭 중에는 동독 출신이 적지 않아서,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작가가 그랬고, 카메라맨이 그랬고, 여배우 나디아 울이 그랬다. 이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고, 그러므로 현실감이 떨어지진 않는다고 자부한다. 중요한 건, 이 작품의 집필, 캐스팅, 그리고 촬영의 전 과정이 ‘픽션’이라는 전제 하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동·서독 출신의 스탭 간에 협업은 어떻게 이뤄졌나.
=서로 입장이 다르다보니,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는 편이 낫겠더라. 대신 우리는 전체적으로 영화 톤을 가라앉혀, 냉정하게 가기로 했다. 그리고 매일 서로의 의견을 듣고 조율했다. 동독의 일상 묘사에는 ‘겸손한 리얼리즘’을 내세우기로 했다. 또 두 여자 주인공이 동독 교통경찰에게 걸렸다 풀려나는 에피소드는 동·서독 ‘앙상블’의 성과다. 그러나 모든 과정이 무난했던 건 아니다. 페이퍼 작업까진 뜻이 잘 통한다고 믿었는데, 촬영에 들어간 다음부터 작가와 내가 완전히 다른 두편의 영화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영화사에 동독인들의 삶을 제대로 그린 영화가 어디 있었나. 촬영이 진행되는 중간에도, 뉴스릴 필름을 보고 책을 읽으며 보충학습을 해야 했다. 어쨌거나 볼프강과 나는 이 영화에 대해, 그리고 정치적 사안에 대해, 아직도 다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