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는 센세이션이 아니라 캐릭터다”
‘미식축구’는 오래도록 정치와 전쟁을 이야기해 온 올리버 스톤에게 구미 당기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필드에서 뛰고 뒹구는 선수들의 모습은, 사생결단으로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의 모습이며, 구단주의 권력과 돈, 언론의 스피커가 뒤엉킨 거대 스포츠산업은 정치판에 흡사하니 말이다. 개인기 과시나 지나친 승부욕을 경계하고 팀 스피리트를 강조하는 코치, 가업으로 물려받은 구단을 어떻게 굴리면 돈이 될지가 유일한 관심사인 구단주의 만남은, 처음부터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다. 팀이 연패의 늪에 빠지고 선수들이 줄줄이 부상으로 실려가자, 구단주는 오만한 신참을 쿼터백 자리에 앉히고 완치되지 않은 선수들을 필드로 불러내는 등 독단으로 새 진용을 짠다. 코치와 구단주가 사사건건 부딪치고, 팀닥터까지 구단주편에 서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간다.
<애니 기븐 선데이>(Any Given Sunday)는 맹수가 우글거리는 거칠고 삭막한 ‘정글’의 이미지를 위해 촬영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는데, 카메라의 속도와 동선을 따라가노라면 멀미가 일 정도다. 형식미에 있어 <킬러>와 <U턴>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 뉴스 캐스터로 출연, 직접 연기를 해보이기도 한 올리버 스톤 감독은 모리츠 드 하델른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에게 미리 편지를 띄워, 지난해 겨울 미국 개봉에 맞춰 서둘러 편집한 사정과 재작업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양해를 구했다. “미식축구에 익숙지 않은 유럽 관객에게 강렬한 느낌을 주면서도, 접근하기 수월한 작품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2주간 재작업을 거쳤고, 미국 상영분보다 12분 짧은 2시간30분짜리 특별 편집판으로 상영했다.
-전작들과 비교하면 좀 난데없는 느낌이다.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나.
=<킬러>와 <U턴>은 내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어두운 작품들이다. 나는 그 작품들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했고, 예술적인 성취감을 느꼈다. 반면 이 영화는 새 밀레니엄에 어울리는 아주 긍정적인 영화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축구의 광적인 팬이다. 그런 마음이 이 영화에 영감으로 작용한 것이다. 축구경기 이면의 풍경과 사람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고, 경기가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변수와 위험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영화에는 미국인들의 가슴에 직접 다가갈 만한 요소가 있다. 어떤 의미에선 스포츠를 매개로 한, 미국사회에 대한 논평이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논평을 하고 싶었던 건가.
=몸이 사람의 포트폴리오가 되는 세상이다. 그 중에서도 미식축구는 사회를 반영하는, 지극히 상업적인 스포츠다. 돈, TV와 밀접해지면서, 스포츠는 비대해지고 있다. 그뿐인가. TV는 정치와 그 모든 걸 먹어치웠다. 그런 현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려 했다. 일부 스타급 선수들에게 고액 연봉을 지급하고 나머지 팀원에게 최소한을 지급한다면 팀으로 움직이기 어려워지지 않겠나. 윌리(신참 쿼터백)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경기했다. 팀플레이는 생각지 않고. 그가 시야를 넓혀 팀 전체를 바라보고 생각하게 된 순간, 그는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었다. 그건 신과 교감하는 것 같은 경험이다.
-사회비판의 의도였다면, 다른 스포츠를 영화화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축구 경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의 개성을 지켜나가려는 노력들이 보이지 않나. 축구가 단체 경기라는 측면에선, 기본적으로 삶의 메타포라는 생각이 든다. 경기 자체, 룰 자체에는 모순이 있지만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지 않나. 내 아들은 축구 경기를 매우 즐기고, 그 자신이 팀에 속해 있다는 걸 자랑스러워한다. 나는 종종 테니스를 하고 크로스컨트리 경주를 하는데, 그건 나 자신과의 승부다. 축구와는 완전히 다른 얘기다.
-제작 과정에서 전미축구리그(NFL)과 갈등을 빚었다는데, 어떤 문제가 있었나.
=NFL이 영화 제작 지원을 약속했다가 취소했다. 약속대로라면 그들은 우리의 메이저 스폰서였다. 그들은 지원 약속을 철회함과 동시에, 선수들도 이 영화에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많은 선수들이 우리를 격려했고 도와줬다. NFL은 미국사회에서 활개치는 유일한 독점단체인 셈이다. 그들은 이 영화가 자기들을 반대하거나 비난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 같다. 지금에 와선, 이 영화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못하도록 스포츠 기자들에게 압력을 넣고 있다. 조금이라도 영화에 호의적이었다간 소속 선수들의 취재에 불이익을 받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쿼터백의 우악스런 아내(로렌 홀리), 냉혹한 구단주(카메론 디아즈) 등 여성 캐릭터의 묘사를 두고, 미국 평단에서 이 작품이 남성 우월주의에 기반한다고 지적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감은 있다. 로렌 홀리가 데니스 퀘이드 등을 후려칠 때 미국 관객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가정을 유지시키는 건 대개 그런 아내들 덕이다. 카메론 디아즈는 공공연히 ‘bitch’라는 욕까지 들었다. 하지만 비슷한 캐릭터의 구단주로 남성이 나왔다면, 그에게 과연 ‘bastard’라고 욕했겠나. 여성들은 영화 속 카메론 디아즈처럼 당당히 라커룸에 들어가, 남자 선수들의 나체를 대할 만큼 용감하다. 실제로 나는 몇년 이내에 여성 구단주가 탄생할 것을 믿는다.
-정치와 전쟁이 오랜 관심사였던 것 같다. 그런 소재들을 영화화할 때 부담은 없는지.
=사람들은 내 전작에 비추어 또다시 정치적인 소재를 택할 것인지에만 관심을 뒀다. 내 결론은 논란거리가 되지 않을 작품을 만드는 거였다. 난 가슴의 소리를 따를 뿐이다. 미국에서 정치 영화를 만든다는 건 참으로 힘들다. 마틴 루터 킹의 영화를 만드려고 준비하는데, 언론이 일제히 ‘봐라. 올리버 스톤이 그렇지. 또 논란거리가 될 소재를 택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내가 영화를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센세이션이 아니라 캐릭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