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50회 베를린영화제 결산 [5] - 밀로스 포먼 인터뷰
2000-02-29
글 : 박은영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최우수감독상 수상작 <맨 온 더 문>의 감독 밀로스 포먼

“미국영화는 엔터테인먼트가 먼저 유럽영화는 영혼이 먼저다”

<맨 온 더 문>의 시사가 있던 지난 2월18일은 밀로스 포먼의 생일이었다. 같은 날 열린 기자회견은 기자들과 영화제 스탭들의 생일축하곡 합창으로 유쾌하게 시작됐다. 97년 <래리 플린트>로 금곰상을 수상한 그는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새 영화 <맨 온 더 문>에 대한 연출의 변을 늘어놓았다. 이 작품은 ‘미국적인’ 한편 ‘반미국적인’ 실존 인물을 통해 미국사회를 반추한다는 의미에서, <래리 플린트>의 연장선상에 있다.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 플린트에 이어, 밀로스 포먼의 낙점을 받은 이는 70년대에 활동한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 밀로스 포먼은 스스로를 코미디언으로 인정하지 않은 코미디언 카우프만의 고민과 자연인으로서의 나머지 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웃음을 만들기 위해 평생 노력한 한 코미디언의 비애를 절절히 담아내, 코미디와 드라마의 경계를 탄력있게 넘나든다. 앤디 카우프만은 기상천외한 유머로, 관객과 시청자를 웃기고 당황케 한 문제의 인물이다. 코미디 클럽에서 데뷔한 그는 유력한 에이전트의 눈에 띄면서, TV 시트콤에 출연하는 등 인기를 더해가지만, 짜여진 각본에 염증을 느끼고, 자신을 위해 그리고 관객을 위해 도발을 꿈꾸기 시작한다. 웃기길 기대하는 관객 앞에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책 한권을 통째로 읽어내려가고, 여성 관객을 모독해 레슬링 시합을 벌이는가 하면, 토니 클리프톤이라는 분신을 만들어 두 사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앤디 카우프만으로 분한 짐 캐리는 발군의 연기 실력을 뽐내고 있는데, 무대 위로 쭈뼛쭈뼛 등장해 괴상한 말투로 ‘영화 오리지널 컷이 너무 형편없어 짧은 인트로를 추가하기로 했다’며 영화 속 영화로 안내하는 첫 머리부터 관객을 매혹시킨다.

-왜 하필 지금 앤디 카우프만의 영화를 만든 것인가.

=왜 지금이냐에 대한 답은 없다. 나도 모른다. 다만 줄곧 머릿속을 맴돈 아이디어 하나를 이제야 구체화한 것이다. 72년인가 73년에 친구에게 이끌려 LA의 작은 코미디 클럽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앤디 카우프만을 처음 봤다. 그는 손에 책을 들고 나와, ‘이제부터 얘기 하나를 들려주겠다’더니, 진짜로 몇분 내내 책만 읽어내려가는 거였다. 처음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었지만, 어느 순간 그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 순간에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의 삶이 특별한 것은 어떤 이유에선가.

=그를 통해 모든 코미디언이 공유하는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가장 위대한 코미디언의 삶엔 가장 짙은 비애가 드리워져 있다. 관객 하나하나를 웃게 만드는 것, 그건 대단한 파워인 동시에 무한한 부담이니까.

-그의 일대기를 영화화하기 위해 자료 조사 등 많은 준비가 필요했을 것이다.

=영화화하기로 하면서 여러 차례 토론이 진행됐다. 이 역할에 누가 적역이냐에 앞서, 우리가 알아야 했던 것은 앤디 카우프만이 대체 누구냐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가족 친지들을 만나 수소문해봤지만, 어디에도 일치하는 모습이 없었다. 진짜 앤디 카우프만은 없었다. 누가 알겠나. 그는 아주 지루한 사람인 동시에 재기발랄한 사람이기도 했다.

-앤디 카우프만은 미국 밖까지 알려진 얼굴이 아니다. 낯설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했나.

=내가 지금 여기 온 이유가 바로 그거다. 유럽 관객의 반응이 궁금해서다. 한번 관객 반응을 직접 체크하고 싶었다.

-앤디 카우프만의 유머를 이해 못하겠다. 그는 그저 사람들에게 시비나 걸고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것 아닌가.

=그의 인생은 그래서 비애가 느껴지는 동시에 매혹적이다. 그 자신도 스스로를 코미디언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뭐가 우스운지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끝없이 자신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았다. 관객은 때로 웃어주고 때로 야유를 보낸 것이다.

-앤디 카우프만은 ‘환자’와 ‘천재’의 경계를 오간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사람들이 뭔가 제정신이 아닌 듯한 언행을 보일 때 즐거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모든 행동은 우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세밀한 부분까지 계산된 것이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듯한 말과 행동이 사람들을 매혹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짐 캐리가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거론되지 않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마디로 충격이다. 그는 수상하고도 남을 만한 배우다. 그처럼 자기 일에 온 영혼과 마음을 다하는 배우는 없다. 오스카가 코미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예상 밖의 일이다. 영화 속에 짐 캐리의 연기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앤디 카우프만이 보일 뿐이다. 그렇게 잘해낸 대가가 고작 이것뿐인가 싶다.

-<래리 플린트>에 이어 다시 여주인공으로 커트니 러브를 캐스팅했다.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커트니 러브를 사랑하고 아낀다. 그 재능은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얼마나 원기왕성하고 총명하고 아름다운지. 커트니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다.

<맨 온 더 문>

-‘REM’이 영화음악을 담당했다. 그들과의 작업은 어떻게 이뤄졌나.

=오래 전부터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고 즐겼다. 92년경에 알게 됐고, 영화음악을 부탁하고 싶다고 했더니, 기꺼이 응했다. 그들도 마침 앤디 카우프만의 팬이더라. 명석하고 지적인 아티스트인 그들은, 기대 이상의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앤디 카우프만에 대해 새롭게 배운 것이 있나.

=아니. 중요한 건 영화 속에서 다 얘기했고, 더 말할 것도 없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앤디의 어린 시절 대목에 여동생으로 등장하는 꼬마가 앤디의 외손녀라는 거다. 앤디는 그에게 딸이 있는지도 몰랐으니, 만일 영화에 나오는 그의 손녀를 볼 수 있다면 깜짝 놀랄 거다.

-앤디 카우프만이 이 영화를 좋아할까.

=모르겠다. 많이 웃을 것 같은데.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다.

-TV물 제작이나 연출은 더이상 하지 않나.

=앤디 카우프만은 TV시트콤을 통해 명성을 얻었지만, 그 세계를 혐오했다. 나 역시 그에 동의한다. 앤디는 시트콤에서 객석 사람들의 웃음을 ‘죽은 자들의 웃음’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바다.

-당신의 영화 인생을 돌아볼 때 어떤 감회가 드는가.

=내 자신을 분석하기 싫다. 솔직히 말하면 돌이켜 볼수록 우울해진다. (웃음) 체코에서나 미국에서나 영화를 만드는 일은 우스꽝스럽다. 미국에 있다고 해서 내 것을 버리고 미국적인 영화를 만든다거나, 지금에 와서 굳이 체코영화를 만들겠다고 고집하는 것도 우습다. 모든 영화에는 각기 어울리는 때와 장소가 있는 거다.

-영화적 정체성으로 보면, 유럽쪽인가 미국쪽인가.

=감정적으로 사람들은 세계 어디서나 똑같이 반응한다. 극복할 차이라는 것도 별로 없다. 영화 만드는 스타일이나 경향들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난 몰라도 당신들은 알 거다.

-타지 출신 감독에게 오스카상은 어떤 의미인가.

=오스카가 중요한 오직 하나의 이유가 있다. 수상과 함께 권력을 누릴 수 있다는 것, 그 권력이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게 쇼비즈니스의 생리다.

-유럽영화와 미국영화가 어떤 점에서 차별화된다고 생각하나.

=일반화는 위험한 것이지만, 내가 보기엔 이렇다. 미국영화는 엔터테인먼트가 먼저다. 만에 하나 여력이 있다면, 영혼의 탐구가 뒤따른다. 유럽영화는 영혼의 탐구가 먼저다. 그리고 만에 하나 여력이 있다면, 엔터테인먼트가 뒤따른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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